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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5화 (16/120)

15화

“이런 짓 해도 소용없어.”

거침없이 말을 내뱉은 남자가 아르밀라의 지도를 빼앗아 박박 찢었다.

아르밀라는 황망한 얼굴로 남자의 작태를 바라보았다. 보좌관인 나시르가 리카르도의 오른팔이라면, 기사단장인 이자는 그의 왼팔이다. 그런 자의 적의에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까.

“에치오 님, 오해예요.”

“기사단장님이라고 해.”

남자는 갈기갈기 찢긴 지도를 보란 듯이 아르밀라의 앞에 흩뿌리고서 쏘아붙였다.

“오해고 뭐고, 우리 기사단은 네가 그린 지도를 보지 않을 거다.”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 명하신 일인걸요.”

“전하 핑계 대지 마. 네가 하겠다고 나선 거 모를 줄 알아?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사기를 치려고.”

에치오는 으르렁거리며 아르밀라의 멱살을 잡았다.

“레나토에서 꺼져.”

“아……!”

장신의 남자가 손에 힘을 주자 아르밀라의 다리가 땅 위에 들리고, 그녀의 몸이 끌어 올려졌다.

아르밀라는 숨을 헐떡이며 옷깃을 쥐고 있는 에치오의 손을 잡았다.

“이거 놓…….”

아르밀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에치오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는 그녀가 닿는 게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르밀라를 내동댕이쳤다.

“아!”

아르밀라는 가련한 비명을 내질렀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탓에 바닥을 짚는 손목뼈가 앙상했다.

매일같이 고된 훈련을 하는 에치오라면 그녀를 한 손으로도 으스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에치오는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은 것을 참는 것처럼 아르밀라를 노려보았다. 그가 손가락의 뼈마디를 꺾자, 아르밀라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항변했다.

“기사가 무력한 사람을 공격해도 되나요?”

기사의 맹세를 한 보통의 기사라면 기사도에 따라 여자에게 험한 짓을 하지 않을 터. 기사단장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에치오는 아르밀라의 질문에 코웃음을 쳤다.

“난 용병 출신이라서 그런 건 몰라. 주군의 명에 따르겠다고만 맹세했거든.”

“그럼, 전하께서 제게 이러라고 명하셨나요? 왜 항상 저만 보면 이렇게…….”

“닥쳐!”

아르밀라의 추궁에 에치오가 성을 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낚아챘다. 붉은 머리카락을 쥔 남자의 옅은 회색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 난 너 같은 걸 질리도록 봐 왔어. 얼굴 믿고 남자 하나 꼬셔서 팔자 고치려고 하는 것들. 당장 시내에만 나가도 넘치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안 속아.”

아르밀라는 두피의 통증에 인상을 쓰다가 입을 앙다물었다. 에치오는 그녀를 길거리의 창부 취급 하고 있었다. 적나라한 적대감에 서러움이 복받쳤다.

“난 그런 게 아니에요. 난, 내가 누군지도…….”

“하! 기억이 안 난다고? 하다못해 참신하기라도 해야 믿어 주는 시늉이라도 하지. 운 좋게 마수로부터 주군을 구한 걸 핑계로 레나토에 눌러앉더니, 이제는 감히 안주인의 자리까지 탐해?”

아르밀라는 에치오를 습윤해진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다들 아르밀라를 미워한다.

아르밀라는 대공을 꼬신 불여우였으니까.

“이봐, 내 얘기 잘 들어.”

에치오는 아르밀라에게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멀리서 보면 밀어를 나누는 연인이라고 착각할 만큼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에치오는 아르밀라의 귀에 입술을 가져가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갈 곳이 정 없으면 하룻밤 침대를 데울 자리에 소개라도 해 줄게. 그게 싫으면 수녀원에 보내 주지. 어때?”

“당신……!”

“에치오.”

인내심이 바닥난 아르밀라가 에치오를 밀치려 할 때였다. 두 사람의 뒤에서 고요한 음성이 들려왔다.

낮게 가라앉은 주군의 목소리를 들은 에치오가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이 몸을 일으켰다.

“전하!”

“검을 가지고 오겠다더니, 여기서 시간을 뭉개고 있었나.”

리카르도의 날카로운 물음에 에치오가 흠칫하더니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는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알면 어서 움직여.”

“예!”

에치오는 가슴에 주먹을 얹고서 허리를 숙여 보였다. 리카르도는 예의를 표하는 기사단장에게 눈짓을 해 주고서 아르밀라를 보았다.

아르밀라는 자신을 쏘아보는 에치오의 눈빛을 모른 척했다. 그녀는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 비가 오지는 않았는데.”

아르밀라를 보던 리카르도가 눈매를 좁혔다. 이어 그녀를 살피던 그가 아르밀라의 가슴께를 바라보고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서재에 있다가 잠시 나온 탓에, 그녀는 얇은 봄 드레스 차림이었다. 흠뻑 젖은 상태에서는 윗가슴의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내가 방해를 했나.”

“네?”

“에치오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나 해서.”

리카르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아르밀라는 그의 시선에 뒤늦게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리고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이, 이건 우연히.”

“우연히?”

리카르도는 나른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우연히 물에 젖어서. 그 차림으로 우연히 에치오를 만나. 우연히 얘기를 나눴다?”

아르밀라가 변명을 할 새도 없이 그녀의 몸이 홱 돌려졌다. 시리도록 날카로운 시선이 아르밀라에게 와 박혔다.

“에치오와도 거래를 했나? 아니면 하려고 들었던 건가.”

“아니에요!”

리카르도가 내민 의혹에 아르밀라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에요, 전하. 제게는 전하뿐인걸요.”

“그래야 할 거다.”

아르밀라를 뚫어지듯이 바라보던 리카르도가 읊조렸다. 가냘픈 어깨를 쥔 그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명심해. 대공비는 대공만을 바라보고, 대공에게만 충실해야 한다. 다른 놈과 붙어 있는 건 절대 허락 못 해.”

아르밀라는 눈을 깜박였다. 배우자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얘기를 하는 리카르도의 기운이 더없이 스산했다. 세뇌라도 시키려는 것처럼.

“알아들었어?”

“……네.”

리카르도의 시야에 갇힌 아르밀라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 충실한 아내가 될게요.”

아르밀라의 대답에 리카르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안도, 만족, 그리고 옅은 집착이 보라색 눈동자에 일렁였다.

“그래.”

리카르도는 짧게 말하고서 아르밀라를 놓았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를 만졌던 손을 닦았다.

단순히 젖은 손을 닦는 행위였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르밀라의 마음 한구석이 아파 왔다.

마치 자신이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것 같아서.

아르밀라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음에도 리카르도는 별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하기야, 그는 아르밀라를 궁금해하질 않았다.

어째서 아르밀라가 젖어 있는지, 에치오와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왜 그녀의 발치에 찢어진 종이 조각이 흩어져 있는지.

모두 다 그의 관심 밖이었다.

리카르도가 알고자 했던 건 아르밀라가 온전히 그의 것이 될지, 그것뿐이었다.

“그럼, 두고 보겠어.”

때마침 뒤에서 다가오는 에치오의 소리에 리카르도가 몸을 틀었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아르밀라에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내 아내.”

아르밀라는 떨리는 가슴으로 리카르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렴 어떤가. 그의 아내라는데.

리카르도가 아내라고 불러 주는데.

리카르도가 관심을 주지 않아도, 아르밀라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 * *

황금으로 장식된 궁은 새벽이 되어서야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낮에 인기척이 끊기지 않던 황태자궁에는 새소리만 간헐적으로 퍼졌다.

넓은 침대에 누워 있던 발레리오는 새소리 사이에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켰다.

체중을 반쯤 실어 낙엽을 지르밟는 소리.

자객이다.

발레리오는 황제를 닮은 보라색 눈동자를 빛내며 베개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에 날카로운 단검이 빠져나왔다 싶었을 때, 발코니의 창문이 살며시 열렸다.

슉!

“윽!”

발레리오는 한 치 흐트러짐도 없는 자세로 검은 그림자를 향해 단검을 날렸다. 급소에 단검을 맞은 자객이 쓰러지자, 그는 눈을 빛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번 놈은 쉽군.”

발레리오가 중얼거렸을 때였다. 발코니 뒤에 숨어 있던 자객 둘이 갑자기 튀어나와 그를 공격했다. 발레리오는 뒤로 빠르게 물러나며 허벅지에 차고 있던 단검을 빼냈다.

달빛을 반사하며 검날이 서로 맞부딪치고, 자객들의 숨이 흐트러졌을 때쯤.

푹!

푸욱!

발레리오가 날랜 동작으로 자객들의 심장을 연달아 찔렀다. 자객들이 힘없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지고, 발레리오만이 달빛을 받고 서 있게 되었다.

발레리오는 아직 숨이 끊기지 않은 자객에게 다가갔다. 몸을 숙여 자객과 눈을 맞춘 그가 화려한 외모에 어울리는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보냈지? 그것만 말해라. 그러면 네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러나 회유는 통하지 않았다. 자객은 발레리오를 노려보다가 입 안의 뭔가를 와득 깨물었다. 저지할 틈도 없이, 자객은 독을 먹고 자진했다.

“하.”

자객들의 시신 사이에서 발레리오는 허망함에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밝은 달을 바라보았다.

부쩍, 발레리오의 목숨을 노리는 시도가 잦아졌다.

자객, 독, 기습……. 수법도 다양했다. 덕분에 제대로 잠을 자는 건 사치가 되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건지.

황제의 지병이 심각해졌다는 소문이 퍼진 건가.

그렇다 해도 의아한 점이 있었다. 지금 제국의 후계자는 발레리오가 유일하다. 그가 위험해진다면 제국이 흔들릴 터인데. 누가 이런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

발레리오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보라색 눈동자를 빛냈다.

용의자는 둘 중 하나다.

제국이 망하기를 바라는 자이거나.

아니면…….

발레리오가,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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