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하얀 백합 다발이 파르르 떨렸다. 집무실 앞에 선 아르밀라는 꽃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손등이 하얘지도록 손에 힘을 주었다.
카타리나 부인의 지시로 집무실의 화병에 백합을 꽂아 놓으러 온 것뿐인데, 어마어마한 얘기를 들어 버렸다.
전부 다 들은 건 아니지만, 드문드문 들린 것에 의하면 대공이 결혼을 하려는 것 같았다.
‘벌써…….’
아르밀라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꽃을 와락 껴안았다. 진한 백합 향이 독하게 풍겼으나,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리카르도가 백작이라는 자에게 하던 말이 머리를 빙빙 도느라 바빴다.
“넌 뭐냐?”
아르밀라가 리카르도의 말을 곱씹던 때에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갈색 머리의 중년 남성이 나왔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이는 장식을 잔뜩 한 남자를 본 아르밀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붉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두란테는 자신에게 허리를 숙인 아르밀라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르밀라라고 했나?”
아르밀라는 이름이 불리자 어깨를 움칠했다. 그녀가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백작이 거만하게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허락하겠다.”
아르밀라는 백작의 명에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백합 꽃다발을 든 청초한 여인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나고, 맑은 눈동자가 시선을 맞추었다.
아르밀라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한 두란테는 넋을 잃고 있다가 불현듯 인상을 구겼다.
“얼굴은 반반하구나. 하긴, 그러니 대공을 홀렸겠지.”
“오해이십니다, 전 그런…….”
짜악!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날카로운 마찰음이 복도에 퍼졌다. 바닥에 백합이 후두둑 떨어지고 아르밀라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르밀라는 비틀하며 얼얼해진 뺨을 거머쥐었다.
“천한 것이 허락도 없이 입을 열어?”
두란테는 아르밀라의 뺨을 올려붙었던 손을 털털 털며 말했다. 그는 화풀이를 하고서 개운해 보이는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빈대 같은 게.”
폭언을 내뱉은 두란테가 뒷짐을 지고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부지불식간에 봉변을 당한 아르밀라는 뺨을 쥔 채로 얼어붙었다. 두란테가 보인 선명한 적의에 온몸이 다 떨려 왔다.
‘괜찮아.’
하나도 아프지 않아.
아르밀라는 침착히 자신을 다독였다. 레나토의 구박데기이니 이런 취급은 놀랄 일이 아니다. 사용인들에게 치이는 신세이니, 고귀한 귀족 나리에게는 오죽 하잘것없어 보일까.
아르밀라는 눈을 크게 깜박이고서는 가슴이 들썩이도록 숨을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저앉아 바닥에 떨궜던 꽃으로 손을 뻗었다.
괜찮았다, 버틸 수 있었다.
문 저편에 리카르도가 있으니까. 그를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하지만 문이 열리고 집무실에서 나온 리카르도의 등장에, 그의 말 한마디에.
아르밀라는 그만 무너져 버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백합을 쥔 아르밀라의 손등 위로 맑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말없이 몸을 웅크리고만 있는 그녀의 시야에 검은 구두가 들어왔다.
“아르밀라.”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낮은 음성에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미 흐른 눈물을 감출 도리는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떨군 채로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백작을 만났나?”
“아뇨, 전…….”
아르밀라가 변명을 지어내려 할 때였다. 그녀의 가는 손목이 두꺼운 손아귀에 잡혀 홱 들렸다. 아르밀라의 시야가 흔들리고, 붓으로 그린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리카르도의 매서운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내게 거짓말은 하지 마. 그런 건 질색이다. 말해. 방금 여기서 나온 작자를 만났지?”
“……뵈었어요.”
“그리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게 단가?”
아르밀라를 살피는 리카르도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제 뺨이 부디 부어오르지 않았기를 빌었다.
괜한 문제를 일으키거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리카르도를 성가시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뺨을 맞았군.”
“아닌…….”
“눈물이나 닦아.”
다급하게 대꾸하던 아르밀라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백합이 깔린 복도에 앉아 있던 아르밀라의 몸이 일으켜진 건 그 다음이었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손목을 잡은 채로 그녀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의원이 아직 본관에 있다. 따라와.”
“괜찮아요.”
영문도 모른 채 리카르도에게 끌려가던 아르밀라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잡아당겼다. 리카르도에게 손목을 잡힌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면, 또 소문이 날 거다. 그런 건 절대로…….
“뭐가 그렇게 겁나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바빴던 아르밀라의 앞에 보라색 눈동자가 불쑥 다가왔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양 뺨을 차가운 손으로 감싸 쥐며 말했다.
“누구 눈치를 보는 거냐, 아까부터.”
리카르도는 눈썹을 모았다. 잘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을 자꾸 해 대는 아르밀라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괘씸해하는 것 같기도, 짜증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곳의 주인은 나다. 네가 신경 쓸 자는 달리 없어.”
“하지만, 저를 가까이하시면 전하께 안 좋은 소문이 붙는걸요.”
“소문?”
리카르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차가운 웃음에 아르밀라의 가슴이 선득해졌다.
“소문이라…….”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놓고서 허리에 손을 짚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르밀라를 응시했다.
“지난번에도 그런 얘길 했었지. 네가 내 정부라는 소문이 돈다고.”
리카르도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턱 선을 쓸었다. 아르밀라는 벌을 서는 아이의 심정으로 그가 다음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런가. 이왕이면, 정부가 아니라…….”
리카르도의 낮은 중얼거림에 아르밀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눈물 자국이 번진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덕분에 좋은 생각이 났다. 이리 와.”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에게 명을 내리고서 복도의 창문을 열어젖혔다. 유리창이 열리자마자 몰아치는 북부의 바람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백합이 마구 휘날렸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가냘픈 어깨를 잡고서 그녀의 뒤에 섰다. 그의 손길에 아르밀라가 긴장하며 숨을 들이켰다.
이가 딱딱 떨리는 것이,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리카르도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거래를 하자. 네게 원하는 것이 생겼다.”
“뭔가요?”
리카르도는 대답을 바로 하지 않고 창 너머로 보이는 드넓은 장원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를 따라 황폐한 토지를 내다보던 아르밀라의 귀에 권태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난 대공비가 필요하다. 야욕을 가진 친정이 없는 여자. 얌전히 저택 안에 처박혀 있을 여자.”
설마…….
아르밀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메마른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리카르도는 집요한 시선으로 아르밀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아내가 되어라.”
리카르도는 건조하게 말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삭막할 청혼이었다.
그런데도, 아르밀라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리카르도의 청혼이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몰래 바라 왔던 소망이, 꿈이 현실이 되다니.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닐까.
또 정신을 잃어서 허망한 꿈에 빠진 건 아닐까. 아르밀라의 작은 머리가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찼다.
“……네.”
아르밀라는 홀린 듯 대답했다.
아무렴 어떠한가. 꿈인들, 허망한 것인들. 잠시나마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그럴게요. 전하의 아내가 될게요.”
리카르도는 고분고분한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것 같은 그의 미소를 본 아르밀라는 이게 꿈이라고 확신했다.
꿈이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 * *
촤악!
“이런, 실수.”
찬물을 뒤집어쓴 아르밀라의 귀에 키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건성으로 한 사과가 들어왔다.
가만히 서 있어도 몸이 덜덜 떨리는 추위에 홀딱 젖어 버린 아르밀라는 턱을 떨며 시선을 올렸다. 2층 발코니에서 양동이를 탁탁 털던 하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당당히 말했다.
“뭘 봐? 실수라고 했잖아요?”
아르밀라를 괴롭히는 데 늘 앞장서는 회색 머리의 하녀, 비앙카였다.
아르밀라가 대공과 혼인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고서 이런 작은 괴롭힘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비앙카의 수작질은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아르밀라의 옷시중을 들겠다고 나서서, 날카로운 바늘로 하얀 살결을 매일 아침 푹푹 찔러 댔다.
하지만 아르밀라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뺨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닦았다.
아르밀라는 별말 없이 비앙카에게서 눈을 돌렸다. 초연한 반응에 이번에는 양동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쇠로 된 양동이가 요란하게 발치에 나뒹굴었지만, 아르밀라는 한숨을 가볍게 쉬고 걸음을 옮겼다.
예전 같았으면 눈치를 보느라 바빴을 터. 하지만 이젠 아니다.
곧 있으면 리카르도의 아내가 될 것이니까. 대공비가 되어 당당히 그의 곁에 있게 될 테니까.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도를 다시 그려야겠네.’
아르밀라는 들고 있던 종이를 바라보며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시르의 부탁으로 기사단과 훈련을 하는 리카르도에게 지도를 전해 주러 가는 길이었다.
지도가 젖었으니, 다시 처음부터 그려야 한다. 다행히 이게 초본은 아니니, 서재에 돌아가 새로 그리면 될 것 같았다.
“나라면 지금이라도 발을 빼겠어.”
서재로 걸음을 재촉하던 아르밀라를 누군가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혈기가 왕성한 청년의 음성에 아르밀라는 멈칫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적갈색 머리를 짧게 자르고서 탄탄한 몸에 은색 갑주를 두른 미청년이 아르밀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아르밀라와 눈이 마주치자 호전적인 걸음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