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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3화 (14/120)
  • 13화

    두란테는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쳤다. 가죽 소파에 앉은 그의 앞에서는 벽난로의 장작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생명의 은인이라.”

    두란테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왕녀의 장례식이 끝나고서 비앙카에게 들은 정보들을 종합해 보던 그가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밤마다 대공이 침실을 찾는다는 여자.

    출신 성분도 불분명하고, 믿을 거라고는 낯짝뿐이라는 여자.

    “쓸데없는 게 끼어들었군.”

    두란테는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그는 지금 레나토 저택의 서관에 있는 손님방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왕녀의 장례식이 끝나고 대부분의 손님들이 돌아갔지만, 그만은 여기에 머물러 있었다.

    대공과 독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쯧.”

    두란테는 혀를 찼다. 그의 발을 황량한 레나토에 묶어 둔 당사자는 일주일이 다 되도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오늘도 아침부터 집사를 달달 볶았건만, 아직도 대공으로부터 기별이 없었다. 졸지에 두란테는 종일 목을 길게 빼고서 대공의 연락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설마 계집과 놀아나느라 바쁜 건 아니겠지?”

    두란테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만약 그런 거라면, 더더욱 빨리 대공을 만나야 한다.

    원대한 계획에 지장이 생겨서는 안 되니까.

    붉은 머리의 계집은 대공의 공공연한 정부라고 했다. 아직은 공표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계집에게 홀린 대공이 덜컥 혼인하겠다고 나서기라도 하면…….

    두란테는 입술을 짓씹었다. 설마, 그럴 리야 없을 거다. 자신의 상상을 지우던 두란테가 씁, 하고 숨을 들이켰다.

    정말로 그럴 리가 없을까?

    장례식 날 본 꼴을 생각하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매사에 무심한 대공이 사색이 되어서는 여자를 소중히 안고 가지 않았던가.

    마치 사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건 안 되지.”

    초조해진 두란테는 팔걸이를 부여잡고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에야말로 반드시 대공을 만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 * *

    “결혼?”

    날카로운 목소리가 서재에 울렸다. 리카르도는 서늘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따뜻한 실내에 있는데도 모피를 벗지 않는 허영을 부리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머쓱한 듯 눈웃음을 쳤다.

    “예, 왕녀님의 장례식도 치렀으니, 다음 혼처를 알아보셔야지요.”

    “내 대부는 성미가 급하군.”

    리카르도는 조소하며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었다.

    장례식을 치르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사이 리카르도는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왕녀의 사망을 공표하는 서류를 황제에게 보내고, 세골린데 측에도 왕녀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음을 알렸다.

    황제는 레나토의 보고를 무난하게 받아들였다. 문제는 세골린데였다.

    레나토에서 발견된 시신이 정녕 왕녀가 맞는지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래서 리카르도는 여자의 시신이 세골린데의 궁중 시녀복을 입고 있었으며, 금발이었고, 무엇보다도 백합이 새겨진 펜던트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답했다.

    왕족들이 긴 여행길에 안전을 위해 시종과 옷을 바꿔 입는 건 흔한 일이다.

    심지어 왕녀가 아끼는 꽃이 각인된 펜던트는 왕실 소속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직인이 찍혀 있었다. 그 펜던트를 세골린데에 보내고 나서야, 리카르도는 지난한 확인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오늘에서야 겨우 한숨 돌리고 쉬려 했건만.

    아직까지도 돌아가지 않고 있던 두란테가 나타나 신경을 긁는 말을 꺼낸 것이다.

    “긴히 할 말이라는 게 이거였나.”

    “중요한 문제이니까요.”

    한심하다는 듯한 물음에 두란테는 붉어진 얼굴로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그는 전혀 즐거워 보이지도 않는데 입으로만 소리 내 웃더니, 기가 막힌 소리를 꺼냈다.

    “마침 제 여식 줄리아가 내년 봄에 성인이 됩니다. 그 아이를 전하의 배필로 삼으심이…….”

    “대단하군.”

    “예?”

    “백작의 야망이 참 대단하다고.”

    집무실의 가죽 소파에 털썩 앉은 리카르도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아직 핏덩이에 불과한 딸을 내놓다니.”

    “핏덩이라니요? 열일곱이면 충분히 레나토의 안주인이 되고도 남을!”

    “나와 열 살 차이면 핏덩이지.”

    두란테의 반박을 단박에 잘라 낸 리카르도가 인상을 썼다. 그는 날카로운 비수 같은 눈빛으로 두란테를 쏘아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고작 이딴 얘기를 하려고 일주일씩이나 버텼나?”

    리카르도가 면박을 주자 두란테의 얼굴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헛기침을 연신 하다가 길게 숨을 쉬었다. 폭발하려는 울화를 가라앉히려는 모양이었다.

    리카르도는 서늘한 눈으로 두란테를 응시했다.

    자기 편할 대로 지껄이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목을 댕강 잘라 버리고 싶었다. 두란테가 귀족회의 원로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터다.

    열일곱이면 충분하다고?

    그런 개소리를 저 입이 지껄이다니.

    리카르도가 열일곱이었을 때의 두란테가 어떠했던가. 그는 어린 나이에 대공이 된 소년에게 레나토를 맡기기 불안하다고 황제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리카르도의 대부라는 위치를 이용해 레나토를 날름 먹으려 들었다.

    어렸던 리카르도는 두란테로부터 레나토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반드시 훌륭한 대공이 되겠다고, 황실과 멀리하며 이곳 레나토에서 뼈를 묻겠노라고.

    아버지에게 맹세했으니까.

    리카르도의 아버지 세르지오 비토레는 아내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들에게 자신의 성(姓)을 물려주고, 사생아가 아닌 적자의 삶을 살게 해 주었다.

    아내에게는 최악의 남편이었을지라도, 리카르도에게는 좋은 아버지였다.

    그의 어머니가 최악의 아내이자 최악의 어머니였던 것과는 달리.

    ‘엄마는 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 리카르도.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단다. 그 사람은…….’

    리카르도는 머리에 울리는 애절한 여인의 음성에 질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붉은 방에 붉은 천이 너울거리는 환영이 보였다. 그리고 허공에 매달려 힘없이 흔들리는 기다란 형체도.

    ‘젠장.’

    리카르도는 눈을 뜨며 혀를 찼다. 두란테 때문에 마음 깊숙이 박아 두었던 기억을 끄집어내 버렸다.

    어머니는 무슨. 억지로 한 결혼이라는 이유로 평생 불행을 끌어안다가 죽은 여자 따위.

    결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라고 리카르도의 몸에 더러운 피를 흐르게 만들었는지.

    리카르도는 결혼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런 것에 매달려 봤자 구질구질하게 살 뿐이니까.

    “……제 말 듣고 계십니까?”

    시선을 창밖으로 보내고 있던 리카르도의 귀에 중년 남성의 불평이 박혀 들어왔다. 리카르도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자신의 대부를 바라보았다.

    두란테 아달베르토 백작.

    선대 비토레 대공의 친우이자, 혹한으로 식량난에 허덕이는 레나토의 은인.

    아달베르토령에서 매년 보내 주는 곡식이 없으면 레나토에는 기아로 죽는 자가 속출할 것이다.

    레나토에서는 그 보은으로 기사들을 보내 자케트의 국경과 붙어 있는 아달베르토령을 지켜 주고 있었다.

    한마디로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될, 악어와 악어새 같은 관계다.

    이대로만 지속되면 골치 아플 일도 없는.

    그런데 두란테가 숨겨 놓았던 야심을 드러내었다. 그의 딸이 곧 성년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딸의 혼처를 알아보는 중에, 리카르도가 물망에 오른 것일 터. 제국에서 황태자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미혼 남성은 리카르도이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리카르도는 예리한 눈으로 두란테를 바라보았다.

    “백작. 알고 있나? 내가 백작 영애와 혼인하면, 영애는 대공비가 된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대공비, 까지만이야. 영애가 그보다 높은 지위를 얻을 일은 없다. 황태자비나 황후로 만들고 싶다면 황궁으로 보내.”

    리카르도가 경고하듯 목소리를 눌러 말하자 두란테의 얼굴이 이번에는 하얗게 질렸다. 그는 입꼬리를 움찔거리다가 힘겹게 끌어 올리며 말했다.

    “제게는 솔직하셔도 됩니다. 제가 대, 대공 전하의 대부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내 대부가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서.”

    두란테는 리카르도의 출신을 추측할 뿐, 확신하지는 못한다. 명확한 증거 따위는 없으니.

    굳이 증거라고 한다면 황제를 빼닮은 보랏빛 눈동자랄까.

    하지만 황제와 선대 대공이 형제라는 걸 감안하면,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인 전 황제가 보라색 눈을 가졌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두란테는 선대 대공 부처의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는 걸 근거로 헛다리를 짚고 있는 거다.

    황제와 선대 대공비의 불륜이라니, 그 씨앗이 리카르도라니 당치 않다. 따라서 리카르도가 황위를 이을 리는 절대 없다. 그러니 헛된 꿈에서 당장 벗어나라.

    리카르도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불순한 희망의 싹을 잘라 내기 위해 단언했다.

    “내가 백작 영애와 혼인할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백작이 내 혼인에 관심이 많은 듯하니 대공비의 조건을 알려 주지.”

    백작 영애만 아니면 돼.

    리카르도는 두란테를 약 올리듯이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가 웃음과 함께 곁들인 조건에 두란테가 얼굴을 추하게 일그러뜨렸다.

    “나중에 다시 얘기 나누지요.”

    리카르도는 허락의 의미로 고갯짓을 해 주었다. 대공의 행동에 두란테는 뻣뻣해진 몸을 틀었다. 아직은 이 집무실에서 나가는 것조차 대공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랬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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