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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2화 (13/120)

12화

왕녀의 장례식이 끝났을 때였다. 시신을 모신 관을 신전 밖으로 내어 가고, 내빈들이 리카르도에게 모여들어 안부 인사를 나누던 때.

제 차례를 맞이한 누군가가 인사 끝에 리카르도에게 아리송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저건 뭡니까?”

“저거라니?”

무심히 인사에 답하려던 리카르도는 눈썹을 추켜세우며 짜증스레 되물었다. 욕심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자들을 상대하는 것에 점차 신물이 나던 차였다. 대충 끝내고서 자리를 뜨려 했는데, 자꾸 발목이 잡히는 게 영 성가셨다.

질문의 주인공인 두란테 백작은 리카르도의 반문에 반질반질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곧,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서 짐짓 인자한 표정을 지어냈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두란테는 대공의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여태 자신을 본체만체하다가, 주의를 끌 질문을 하고 나서야 눈길을 주다니. 자신을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대하는 게 마뜩잖았다.

선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인연을 생각한다면, 더더군다나 그가 대공의 대부라는 걸 고려한다면 이런 푸대접은 말도 안 된다.

두란테의 성격대로라면 레나토에 공급하고 있는 곡식을 단번에 끊어 버리고도 남았을 일이다.

하지만 상대는 리카르도 비토레다.

변경의 치안을 담당하면서도 수도와 가장 밀접한 권력자.

그리고 두란테의 야망을 실현해 줄 자.

두란테가 이 빌어먹게 추운 레나토까지 찾아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대공의 관심을 끌어야 했다.

비록 자존심이 상할지라도.

두란테는 더러운 기분을 애써 감추고서는 빙긋 웃었다.

“저기, 저것 말입니다.”

화려한 레이스 소매를 따라 무심히 시선을 옮기던 리카르도가 미간을 구겼다. 그로서는 퍽 드문 표정 변화였다. 두란테는 자신이 가리킨 저것, 붉은 머리의 여자를 흥미로운 눈으로 보았다.

“저 여자는 뭐길래 저기에 누워 있…… 전하?”

두란테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카르도가 자리를 떴다. 그는 눈을 감고서 의자에 누워 있는 여자를 보자마자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누구를 시키지도 않고 직접 여자를 안아 들었다. 검 외에 다른 건 들지도 않을 것 같은 귀한 손으로.

“전하?”

두란테는 제 눈을 의심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빈들에 비해 사용인들은 덤덤했다.

두란테는 이 온도 차에 이질감을 느꼈다. 아무리 레나토의 인간들이 인간미가 없다지만, 대공이 여자를 안아 들었는데도 놀라는 이 하나 없다니.

그렇다면 이들이 익숙해질 정도로 평소에도 저 여자를 종종 품었다는 거 아닌가. 두란테는 눈에 불을 켜고서 날을 세웠다.

“누굽니까, 이 여자?”

“파올로!”

“예, 가주님.”

리카르도는 두란테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서는 집사를 불렀다. 재깍 등장한 집사는 리카르도의 품에 안겨 정신을 잃고 있는 여자를 보고서 얼굴을 굳혔다.

“의원을 불러라.”

“예.”

“자, 잠시만요. 전하!”

두란테는 분주히 달려가는 집사를 따라 긴 다리를 옮기려는 리카르도를 다급히 붙잡았다. 북부의 한파에도 끄떡없도록 껴입은 모피 때문인지, 이마에서 흥건히 땀이 흘렀다.

“전하와 긴히 나눌 얘기가 있는데…….”

“나중에.”

리카르도는 두란테를 단호하게 잘라 내고서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설명할 시간 따위 없다는 태도였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저 여인은 전하를 마수로부터 구해 준 은인입니다. 몸이 성치 않아 레나토에서 돌보고 있습니다.”

나시르가 나타나 동요하는 내빈들에게 말했다. 그는 살살거리는 눈웃음을 치며 덧붙였다.

“레나토의 주인은 은혜와 원수는 절대 잊지 않고 갚으시지요.”

그의 설명에 비로소 사람들이 납득하는 표정을 지었다.

리카르도 대공은 표현에 인색하지만 베푸는 데는 인색하지 않다. 그것이 보은이든, 복수든.

이를 모르는 자는 제국에 없다.

‘하지만, 저리 귀히 여긴다고? 고작 계집을?’

닭 쫓던 개 꼴이 된 두란테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은인이라고 해도, 저 결벽증 환자가 여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다니.

리카르도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켜본 바로는 그럴 성정이 아니다. 여인이 다가오는 것만 봐도 질색을 하고, 달콤한 속삭임도 내치던 작자가 아닌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왕녀와의 혼담이 정해졌을 때조차도 기뻐하는 내색 하나 없었는데.

저 여자가 뭔가 수작을 부려 대공을 홀렸을 게 뻔하다. 리카르도에게 완벽히 무시당한 두란테는 주먹을 세게 쥐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천한 년이 굴러와서는.”

“궁금하신가요?”

이를 갈던 두란테의 귀에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눈을 돌리자, 회색 머리를 한 하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란테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입을 열었다.

“넌 뭐지?”

“본관을 담당하고 있는 하녀 비앙카라고 합니다.”

비앙카는 나시르의 눈을 피해 두란테에게 속삭였다.

“저 여자가 누군지 더 알고 싶으시지요?”

두란테는 비앙카에게 손가락을 까닥해 보였다. 천한 하녀지만, 도움이 된다면 제 곁으로 다가오도록 허락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더 큰 도움이 된다면 친히 이용해 줄 수도 있고.

비앙카를 가까이 불러들인 두란테는 거만한 귀족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는 대로 말해 봐라, 전부.”

* * *

아르밀라는 눈을 찡그렸다. 머리가 아프다 싶더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고서 다시 눈을 떴는데, 어째서인지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왜 거기에 있었지?”

흐린 초점을 잡으려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던 아르밀라의 귀에 깊은 저음이 들려왔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목소리에 담긴 책망에 아르밀라는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서 작게 말했다.

“죄송해요.”

“그거 말고.”

아르밀라는 침을 삼켰다. 침대맡에 앉은 리카르도의 시선에 얼굴이 따가웠다.

리카르도는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차림새 그대로였다. 평소에는 활동성을 중시하여 가죽으로 된 보호대를 차고 있는 넓은 가슴에 황금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레나토의 상징인 늑대가 울부짖는 옆모습이 각인된 장식이었다.

“대답해.”

늑대의 주인답게 서늘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아르밀라를 올곧게 응시했다. 어설픈 변명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시선에 아르밀라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모두 참석하라고 하셨대서요.”

“너한테 내린 명은 아니었는데.”

냉랭한 대꾸에 아르밀라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신전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통증이 찾아왔다.

서러움과 야속함이 뒤섞여 아르밀라의 심장을 헤집었다. 이내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자, 아르밀라는 습윤한 눈동자로 리카르도를 응시했다.

“제가…….”

아르밀라는 입술을 달싹였다. 목까지 치달은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의 무심함을 원망하고 싶었다.

내가 그리 싫으면 싫다고, 귀찮으면 귀찮다고 하라고. 차라리 내쳐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될까.

아르밀라는 어설프게 투정을 부렸다가 정말로 리카르도가 그녀를 버릴까 봐서 겁이 덜컥 났다.

“네가, 뭐.”

“저만 가지 않으면 이상하잖아요.”

“이상해?”

아르밀라의 웅얼거림에 리카르도가 피식 웃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준수한 얼굴을 느릿하게 쓸었다. 이어 곧게 뻗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미간을 지그시 누른 리카르도가 조소했다.

“이상한 건 그런 게 아니다.”

“그럼요?”

“널 안고서 여기까지 내가 달려온 거. 그게 이상한 거지.”

고저 없는 음색이 침실에 퍼졌다. 리카르도의 나른한 말에 아르밀라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불 안에 감춰진 그녀의 손끝이 저려 왔다.

혹시, 기대해도 되는 걸까.

그에게도 조금은 마음이 있다고.

“전하…….”

“네가 아픈 게 거슬리고, 성가셔.”

그러나 곧 이어진 말에 아르밀라의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의 시선 속에서, 매정한 남자가 말을 이었다.

“네가 말한 대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어떻게요?”

“지도를 완성하고서 마탑으로 가겠다고 했지.”

리카르도는 확인하듯 물었다. 레나토를 떠나라는 얘기를 꺼내는 그의 태도는 무심하기만 했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꺼낸 얘기였으니까.

‘내 꾀에 내가 넘어갔구나.’

아르밀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와 사실 그건 허세를 부렸던 거라고, 당신이 날 붙잡았으면 해서 했던 말이라고 할 순 없었다.

진실을 삼킨 목이 뜨거웠다. 목울대가 콱 틀어막힌 것 같았다. 하지만 아르밀라는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럼, 생각해 봐 주세요.”

“뭘?”

“제가 전하께 해 드릴 수 있는 게 뭔지. 전하께서 제게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그게 거래라고 하셨잖아요.”

말을 마친 아르밀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많이 떨리지 않았기만을 바랐다.

말꼬리가 조금 기어들어 가기는 했지만, 평소에도 리카르도의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기에 크게 티는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역시나, 리카르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쩌면 그걸 알아차릴 만큼 아르밀라에게 관심이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리카르도는 제안을 담백하게 받아들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자신의 대답에 아르밀라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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