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1화 (12/120)
  • 11화

    “내가 왜 이 거래에 응해야 하지?”

    미소에 딸려 나온 차가운 말에 아르밀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건…….”

    “네가 내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지 않나.”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정곡을 찌르는 냉정한 지적이 이어졌다. 아르밀라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르밀라는 기억이 온전치 않으며, 가진 것 하나 없다.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레나토에서 내쳐지면 빈손으로 길거리를 헤매야 하는 신세다.

    한편 리카르도는 아르칸젤로 제국의 대공이며 레나토의 주인이자, 검은 늑대 기사단을 이끄는 어두운 밤과 차가운 검의 지배자다.

    그런 사내에게 아르밀라가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는가.

    “저는…….”

    아르밀라는 주제넘은 제안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떠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이유로 무리한 수를 던져 버렸다. 아르밀라가 여기에 머무는 걸 그가 원한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는데.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아르밀라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뭐, 뭐든…… 전하께서 원하시는 거라면.”

    “필요 없다면?”

    “네?”

    “내가 네게 원하는 게 없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만 네 소원을 들어주는 걸로 거래가 끝나는 건가.”

    그런 건 거래가 아니지.

    냉정히 덧붙여 말하는 리카르도의 시선이 레나토의 바람처럼 싸늘했다. 아르밀라는 말없이 무릎 위에 얹은 손을 옹송그렸다. 그녀를 지그시 보던 리카르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신의라니.”

    비웃음과 함께 퍼진 냉소적인 말에 아르밀라는 더없이 초라해짐을 느꼈다.

    알고 있다.

    그와 그녀는 신의라는 단어를 나눌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아르밀라는 우연히, 아주 우연히 그에게 신세를 지게 된 객에 불과하니까.

    “분명 원하는 게 있으니 거래를 제안한 거겠지. 네가 원하는 건…….”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침묵 위에 냉기가 묻어난 목소리를 얹었다.

    “여기를 떠나는 것이겠군.”

    말을 마친 리카르도가 손을 들었다. 얘기는 끝났다는 양, 자리를 뜨려는 것처럼 커다란 손이 무릎을 짚자 아르밀라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전하……!”

    아르밀라는 초조하게 리카르도를 불렀다. 금방이라도 그가 자리를 떠날까 봐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르밀라의 부름에 리카르도가 성가시다는 어투로 건조하게 말했다.

    “떠나고 싶다는 얘기라면 그만 됐다. 잘 알아들었으니.”

    몸을 세운 리카르도는 날카로운 눈으로 아르밀라를 주시하며 덧붙였다.

    “내가 네가 떠나길 바란다고 생각했다면 유감이야. 날 구해 준 이에게 야박하게 군 기억은 없는데.”

    “그게 아니에요. 저는…….”

    아르밀라의 의도를 곡해한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르밀라는 다급히 손을 뻗어 그의 재킷 끝자락을 붙잡았다.

    “저, 저는 그런 오해를 감히 하지도 않았어요. 전하께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어서 드린 말씀이었어요. 뭐라도, 해 드리고 싶어서.”

    “왜?”

    가차 없이 돌아온 메마른 질문에 아르밀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재킷을 쥔 손을 보며 말했다.

    “전하께선 제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셨지만, 산에서 절 데려와 주신 전하가 저의 은인이시니까요. 은혜를 갚을 기회를 얻고 싶었습니다.”

    리카르도는 자신의 재킷을 잡은 하얀 손을 커다란 손으로 가만히 감쌌다. 순간 아르밀라가 움찔했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녀린 손을 떼어 냈다.

    “필요 없다.”

    평이한 어조의 짤막한 말에 아르밀라는 손을 모아 쥐었다. 마치 그녀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 같았다. 심장에 서리가 낀 듯 속이 선득해졌다.

    아르밀라가 입을 다물자 리카르도가 몸을 틀었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아르밀라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리카르도가 망토를 챙겨 나가는 것을 아연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 * *

    왕녀의 장례식은 지체 없이 거행되었다. 레나토 저택의 사용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외부에서 오는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사용인들은 밖에서 참석하도록. 모든 예를 갖춰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왕녀님께 조의의 뜻을 표하라는 가주님의 명이시다.”

    장례식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카타리나 부인이 손뼉을 쳤다. 그녀의 근엄한 목소리에 사용인들은 하던 일들을 멈추고 일제히 저택 안에 세워진 작은 신전 앞에 모여들었다.

    아르밀라는 정해진 자리가 있는 양 재빠르게 줄을 서는 사용인들 사이에서 어깨를 옹송그리고 서 있었다.

    본관, 서관과 북관으로 각각 영역을 나누어 도열한 사용인들 사이 어디에도 그녀의 자리는 없었다.

    “좀 비켜.”

    언젠가 복도에서 마주쳤던 회색 머리의 하녀가 우물쭈물하는 아르밀라를 어깨로 거세게 밀쳤다.

    그 바람에, 아르밀라는 사용인들의 무리에서 툭 튕겨져 나왔다. 그녀가 바닥에 엎어지는데도 일으켜 주는 이 하나 없었다. 보고도 못 본 척, 평온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거기, 뭐지?”

    카타리나 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몸을 일으키려는 아르밀라를 향해 날아들었다. 부인은 허리를 세우는 아르밀라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아르밀라 님이 왜 여기에 있죠?”

    존댓말이지만 존경의 뜻은 하나도 담기지 않은 묘한 어투로 카타리나 부인이 질문을 던졌다.

    부인이 말을 걸자 모든 사용인들의 시선이 아르밀라의 얼굴로 꽂혔다. 아르밀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입을 작게 열었다.

    “모두 참석해야 한다고 하셔서요.”

    “그야 그렇지요. 다만 이곳은 사용인들의 자리입니다. 아르밀라 님은 사용인이 아니시고.”

    카타리나 부인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신전의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 저 안으로 들어가세요.”

    “저긴…….”

    아르밀라는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하녀장이 권하는 것이라 해도 선뜻 신전 안으로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저기에는 나시르와 에치오와 같이 직책이 있는 자들을 비롯해 내빈이 있었다. 출신 성분도 알 수 없는 자가 있을 자리는 아니었다.

    “아뇨, 전 여기에 있을…….”

    “어서요.”

    아르밀라가 부인과 실랑이를 벌이자, 사용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나로 뭉쳐 들리는 소리 사이사이에 ‘운도 좋은’, ‘주제 파악’ 같은 단어가 들려왔다.

    “다들 조용!”

    카타리나 부인은 짧게 소리를 높여 사용인들을 단속했다. 단숨에 사용인들을 조용히 시킨 그녀는 아르밀라에게 냉랭한 시선을 던지고서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더 이상의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아르밀라는 하는 수 없이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를 시작하는 신전의 묵직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밝은 빛이 쏟아지며 하얀 건물 안에서 검은 옷을 입고 서 있는 장대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장례식을 위해 제복을 입은 리카르도였다.

    근육질의 몸에 딱 맞게 재단된 검은 제복을 입은 그는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신전의 무수한 촛불 덕에 남성스러운 선을 그리는 완벽한 얼굴이 더욱 빛나 보였다.

    곁에 선 사제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덕에,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르밀라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결 좋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서 이마를 드러낸 리카르도의 가지런한 눈썹이 움찔했다. 뒤늦게 들어오는 아르밀라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심연처럼 깊은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아르밀라는 그 순간, 그의 시선 안에 가둬진 듯한 착각을 느꼈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와 눈이 마주치면 무기력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하잘것없는 존재가 된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시작해라.”

    아르밀라가 문가에 선 채로 굳어 있던 때, 적당히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깊은 울림이 나는 음성이 퍼져 나왔다. 리카르도의 목소리였다.

    홀린 듯 서 있던 아르밀라는 정신을 차리고서 신전 맨 뒷자리에 앉았다.

    가주의 명이 떨어지자, 사제가 정중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목을 가다듬었다.

    “미라벨 에티에네트 왕녀님의 장례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사제의 선언을 듣고 있던 아르밀라가 눈을 움찔했다.

    왕녀의 장례식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묘했다.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은 선명한 거부감이 아르밀라를 휩쌌다. 장례식을 치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줄곧 은은하게 느껴지던 감각이었다.

    처음에는 왕녀의 존재가 거북해서라고 여겼다. 그러나 막상 장례식장에 와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단순한 어색함과는 다르다. 보다 본질적인 거부감이었다. 마치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의 장례식에라도 와 있는 것 같은, 거부감.

    하지만 왕녀는 죽었다. 그녀의 시신까지 발견되지 않았던가. 이내 등까지 소름이 돋자, 아르밀라는 당혹스러워하며 턱을 악물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아르밀라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그때 리카르도를 보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기다란 하얀 관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관은 왕녀가 생전에 아꼈다는 하얀 백합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왕녀가 아꼈다는.

    지금은 죽은 왕녀가…….

    죽은 왕녀.

    “욱……!”

    아르밀라는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뒤틀리고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아르밀라는 몸을 숙이고서 헐떡였다.

    혼란스러웠다. 왕녀의 장례식이 뭐라고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그녀를 만나 본 적도, 말 한 번 섞어 본 적도 없을 텐데.

    하얀 손가락이 까드득, 하고 기다란 기도용 의자를 긁었다.

    ‘참아. 소란을 피워선 안 돼.’

    여기는 왕녀의 장례식장이다. 리카르도는 물론이고 까마득히 지위가 높은 귀족들이 여럿 참석해 있었다. 수선을 피워서는 절대 안 될 자리다.

    하지만.

    “흑, 하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온몸이 벌벌 떨릴 정도로 경련을 일으키게 되었다. 아르밀라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감을 온 힘을 다해 억눌렀다.

    뿌옇게 번지는 시야에 들어오는 리카르도를 바라보며, 아르밀라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