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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0화 (11/120)
  • 10화

    “……찾았다고?”

    아르밀라는 숨을 들이켜며 속삭였다. 그녀가 황망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는 사이, 나시르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거칠게 밀려나는 소리가 들리고 나시르가 서재 밖으로 나설 때까지도 아르밀라는 굳은 듯 앉아 있었다.

    왕녀를 찾았다.

    드디어.

    창밖을 내다보는 아르밀라의 시야에 황금 마차를 호위하고 오는 에치오와 기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오는 리카르도의 모습이 들어왔다.

    리카르도는 평소처럼 속내가 읽히지 않는 얼굴로 말을 몰고 있었다. 그를 내다보던 아르밀라는 몸의 피가 단번에 마르는 느낌을 받았다.

    ‘떠나야 해.’

    왕녀를 찾으면 마탑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있을 곳은 이제 없다. 다짐은 다짐이니, 떠나야 한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르밀라는 마른침을 삼키며 리카르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말에서 내려서 밖으로 나온 나시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시르가 손짓을 하며 뭔가 말을 하자, 리카르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던 리카르도와 아르밀라의 시선이 허공에서 겹쳐졌다.

    “헉.”

    아르밀라는 순간 놀라며 몸을 숨겼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도 해서는 안 되는 일처럼 여겨졌다.

    아르밀라가 몸을 작게 웅크리고서 서재의 창가에 기대어 앉는 동안, 저택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왕녀님을 찾았대!”

    “세상에! 이건 기적이야!”

    “어서, 어서 왕녀님을 모셔!”

    저택의 사용인들은 저마다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대며 기적을 찬양했다. 그들 중 몇몇은 아르밀라의 이름을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제 아르밀라는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떡하긴! 나가야지!”

    “나 같음 쫓겨나기 전에 내 발로 나가겠다.”

    아르밀라는 하녀들이 킥킥대는 소리를 들으며 입을 천천히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비명이라도 질러 버릴 것만 같았다.

    너희들이 그러지 않아도 나는 내 발로 나갈 거라고. 그러니 나를 내버려 두라고.

    * * *

    “어떻게, 아니 어디서 찾으신 겁니까?”

    나시르는 리카르도의 망토를 받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리카르도에게 질문을 던지는 그의 시선은 황금 마차로 향해 있었다.

    두 달 가까이 텅 빈 채로 돌아왔던 황제의 마차. 이 마차 안에 왕녀가 있다. 그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기적이라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눈이 녹으면서 드러났지.”

    잔뜩 흥분한 나시르와 사용인들과 달리 리카르도는 덤덤했다.

    리카르도의 설명을 듣던 나시르는 그의 말이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드러났다고요?”

    “그래.”

    리카르도는 무심하게 말하며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가 마차의 문을 열자, 왕녀를 맞이하기 위해 나왔던 사용인들이 저마다 비명을 질렀다.

    왕녀는, 아니 ‘왕녀였던’ 것은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세골린데 왕족 특유의 금발은 흙투성이였고, 분명 화사하고 아름다웠을 드레스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히익!”

    “세상에…….”

    “추위 덕에 시신이 부패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 나시르, 세골린데에 서신은 보냈나?”

    “아뇨. 아직입니다.”

    “잘됐군. 안 그랬다면 파발마를 보냈어야 했을 텐데.”

    왕녀의 시신을 보고 입을 떡 벌리고 있던 나시르는 리카르도의 냉정한 말에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아. 장례식 준비부터 해야겠군.”

    리카르도는 파올로와 카타리나 부인에게 왕녀의 장례식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왕녀의 시신을 보고서 경악했던 사람들은 주인의 침착한 명에 곧 평정심을 찾았다.

    비토레가는 늘 이런 식으로 돌아갔다. 리카르도가 중심을 잡고 있기에, 레나토 사람들은 혹한 속에서도 짐승처럼 돌변하지 않고 서로를 보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주군을 모두가 존경했다.

    나시르도 차분히 자신이 할 일을 찾아 정리했다. 세골린데와 황궁에 각각 서신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집사와 함께 왕녀의 지위에 걸맞은 장례를 준비해야 한다.

    왕녀를 찾는 데 공을 세운 기사단에도 적당한 치하를 해야 할 터.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시르가 갑주를 벗고서 기사들과 얘기를 나누는 에치오를 보았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아르밀라는?”

    “네?”

    에치오의 경박함에 작게 혀를 차던 나시르는 리카르도의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리카르도는 턱짓으로 서재를 가리키며 말했다.

    “서재에 있는 것 같던데. 오늘은 쉬라고 하지 않았나?”

    “네, 그러기는 했습니다만. 빨리 글을 익히고 싶다고 하셔서요.”

    리카르도는 나시르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가 급해서?”

    “하루빨리 떠나고 싶으시다고…… 가주님?”

    리카르도는 나시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그는 왕녀의 마차를 에워싸고 있는 사용인들을 스쳐서 서재가 있는 2층까지 단번에 올라갔다.

    * * *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가주님.”

    초라하게 서재에 쭈그려 앉아 있던 아르밀라는 냉랭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리카르도의 차가운 시선에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려요.”

    “뭐를.”

    “왕녀님을 찾으셨잖아요.”

    아르밀라의 축하에 리카르도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는 검은 망토를 풀어 책상 위에 던지고서 퉁명스레 말했다.

    “축하는 무슨.”

    아르밀라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왕녀님이 오셨으니 아르밀라를 제 방으로 데려오고 싶다고 풋맨들이 킬킬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밖을 내다보지 못했지만, 모르긴 몰라도 창밖은 축제 분위기일 터다. 아르밀라는 크게 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저는 이제, 마탑으로 갈까 해요.”

    “갑자기 왜?”

    리카르도는 저벅저벅 걸어 아르밀라에게로 다가왔다. 왕녀의 귀환으로 사용인들이 모두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기에, 서재와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창밖에서 사용인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가 한 뭉텅이로 뭉쳐서 들려왔다. 아르밀라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리카르도에게 물었다.

    “왜냐니요?”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랬지, 마탑으로 가라고 한 적은 없는데.”

    리카르도는 긴 다리를 접어 몸을 낮췄다. 그는 아르밀라와 시선을 맞추고서 그녀의 뺨을 닦아 주었다. 아르밀라는 그의 손가락에 묻어난 물방울을 보고서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울며 매달리지 않으려 했는데.’

    아르밀라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울면서 이별을 고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러면 정말 정부 같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기분 좋은 저음이 들려왔다.

    “여기 있어.”

    “하지만 왕녀님이 오셨잖아요. 저를 보면 불쾌해하실지도 몰라요. 저 같은 게 이 저택에 있다는 걸 아시기 전에 어서 나가야죠.”

    “왕녀가 불쾌해할 거라고?”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말이 우습다는 듯이 되뇌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뭐가 말이 안 되는 생각인데요?”

    “네가 그 작은 머리로 하는 생각들 전부 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아르밀라는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또다.

    또, 그와 단둘이 있을 때 겪는 그 숨 막히는 느낌이 찾아왔다. 이 세상에 그녀와 그 단둘만이 있는 것 같은 느낌.

    “왕녀는 죽었다.”

    “……네?”

    다시는 이 느낌을 느끼지 못하리라 여겼을 때, 그리고 그 생각에 씁쓸해하고 있을 때. 리카르도의 말이 아르밀라의 회한을 갈랐다.

    아르밀라는 순간 자신이 들은 말을 믿지 못하고서 리카르도에게 멍하니 되물었다.

    “죽다뇨?”

    리카르도는 그런 아르밀라가 재미있다는 것처럼 피식 웃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가 아니었나? 이 날씨에 두 달이나 버텼을 리가 없지. 왕녀는 진작 사망했다. 오늘 찾은 건 그 시신이야.”

    “그럼…….”

    “장례식을 치를 거다. 그러니 왕녀의 눈치를 본다는 이유로 여길 나갈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 그 눈치라는 걸 애초에 왜 보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목에 턱 걸린 말을 몇 번이고 주저하다가 힘겹게 꺼냈다.

    “그러면 전하께서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으시겠나요?”

    “그건 왜 묻지? 내가 시키는 거라면 뭐든 할 건가?”

    서늘한 질문에 아르밀라는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그녀는 볼 안쪽의 여린 살을 물며 머뭇거렸다.

    나시르는 리카르도가 아르밀라를 귀찮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곁에 더 있어도 되는 걸까. 리카르도는 아르밀라가 이곳 레나토에 머무르는 걸 바랄까.

    아르밀라는 생각에 잠겼다. 리카르도가 바라는 게 그녀가 이곳을 떠나는 거라면 바로 떠나 줄 의향은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말해서 그런 대답을 유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되도록 오래 그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적어도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만이라도.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면, 저도 전하께서 원하시는 걸 들어드릴게요.”

    “난데없는 거래로군.”

    리카르도의 한쪽 눈썹이 추켜세워졌다. 그가 툭 내뱉은 말에 아르밀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리카르도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결의를 내비치기는 해야 했다.

    “저는 신의를 지키고 싶어요. 지도를 제작해 드리겠다고 했으니, 약속했던 대로 지도를 완성한 다음에 떠나고 싶습니다.”

    “떠나겠다고?”

    “네. 그리고 저도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어요.”

    이번에는 리카르도의 차례였다. 그는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아르밀라를 바라보았다. 아르밀라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의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을 때, 리카르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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