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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9화 (10/120)

9화

“아르밀라 님, 푹 쉬시지 않고요!”

나시르는 서재에 온 아르밀라를 맞이하며 화들짝 놀랐다. 오늘 낮에 깨어났으니 당연히 침실 밖을 나서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르밀라는 늘 오던 시간에 서재를 찾아왔다. 세골린데에 보낼 서신을 준비하던 나시르는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국경 지도야 천천히 그리시면 돼요.”

“아뇨.”

아르밀라는 어딘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나시르가 쓰던 서신을 내려다보며 울적하게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지도를 완성하고 싶어요. 되도록 빨리 여길 떠날 수 있게요.”

“네? 떠나시다니요?”

“저는 여기에 계속 있으면 안 되잖아요.”

아르밀라는 씁쓸함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나시르의 편지에 머물러 있었다.

왕녀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 그녀가 돌아온다면, 아르밀라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왕녀가 살아 있을 확률은 극히 낮았지만 1퍼센트의 확률이라 해도 가능성은 가능성이다.

“전하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르밀라 님은 가주님의 은인이십니다. 레나토의, 비토레 가문의 귀한 손님이세요.”

“제가 귀한 손님이라고 말해 주는 분은 나시르 님뿐인걸요.”

“아르밀라 님…….”

나시르는 아르밀라의 대답에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리카르도를 보는 아르밀라의 눈빛에 은은한 열기가 담겼다는 걸 눈치챘다.

아르밀라가 리카르도를 마음에 품게 된 건 놀랄 일도 아니다. 리카르도를 본 여인들은 모두 그렇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아르밀라는 조금 달랐다. 뻔뻔하게 리카르도에게 자신을 들이미는 여인들과 달리,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나시르는 아르밀라가 신경이 쓰였다.

아르밀라는 기억을 잃은 게 커다란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죄인처럼 움츠러들어 있었다.

나시르가 아르밀라의 교육에 자진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를 제외한 레나토의 사람들은 아르밀라를 불편하게 여겼다.

리카르도에게 충심이 깊은 그들로서는 그럴 만도 하다.

가주의, 그것도 약혼녀를 잃은 젊은 가주의 곁에 젊고 예쁜 여자가 붙어 있는 게 못마땅할 테니까.

아르밀라가 흑심을 품고 언제 리카르도의 침실에 숨어들지 모르는 일이 아니던가. 그런 식으로 귀족의 정부가 되려는 여인들은 차고 넘쳤다.

게다가 리카르도는 귀족 중의 귀족. 황제의 총애를 받는 대공이다. 그의 고결한 핏줄을 지키는 게 사용인으로서의 의무다.

하지만 이건 다 아르밀라를 잘 몰라서 하는 오해였다.

아르밀라는 꿈에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리카르도를 홀린 듯 보다가도 흠칫하고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시선을 돌리는 여자가 어떻게 그러겠는가.

나시르가 보기에 아르밀라는 도리어 리카르도를 제 마음속에서 밀어 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것이 쉽지 않은 게 문제였을 따름이다.

“다들 말은 안 해도 아르밀라 님께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가주님을 구해 주셨으니까요.”

아르밀라는 친절한 나시르의 위로에 조용히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설령 제가 손님이라 해도 언제까지고 여기에 있을 순 없잖아요. 저도 제가 먹고살 길은 알아보고 싶어요. 지도를 만들고 나면 그것부터 찾아보려고요.”

나시르는 아르밀라를 측은한 눈으로 보았다.

리카르도와 아르밀라 사이에는 어떠한 감정의 교류도 없다. 하지만, 왕녀 입장에서는 그게 어디 탐탁하겠는가. 나시르는 한숨을 삼키고서 온화하게 말했다.

“아르밀라 님이라면 가정 교사도 잘 하실 겁니다. 제가 도와드리지요. 대신에 지도는 천천히 작성하세요. 급한 건 아니니까 무리하실 필욘 없습니다.”

“감사해요, 나시르 님.”

아르밀라는 여린 미소를 지으며 나시르에게 말했다. 나시르는 세골린데에 보낼 서신을 옆으로 치워 두고서 책장으로 향했다.

“그럼 우선은 어린이용 교재부터 살펴볼까요? 선대 공작님께서 쓰시던 게 있을 겁니다.”

아르밀라는 나시르가 꺼내 준 책을 열심히, 손끝으로 짚어 가며 읽었다.

어린이용 서적이라서 어려운 단어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르칸젤로어는 세골린데어와 어순이 정반대라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알파벳을 전부 다 익혔어도 문법은 또 별개의 문제라, 더듬더듬 읽어야만 했다.

아르밀라는 책상 앞에 앉아 착실히 공부하였다. 가끔가다 모르는 단어나 문법이 나오면 나시르에게 물어보았다.

나시르는 그럴 때마다 상냥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둘이서 공부하던 중, 나시르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잠시 쉬실까요.”

“좋아요.”

아르밀라도 나시르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안 그래도 날이 어둑해져서 눈이 침침해져 오던 참이었다.

“드세요. 졸음을 거둬 내 줄 겁니다.”

“감사해요.”

아르밀라는 나시르가 가져온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다행히 날이 맑았다. 물론 창문이 흔들리도록 거센 바람이 부는 혹한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레나토 날씨치고 이 정도면 무난한 편이었다.

“가주님은 늦으시려나 봅니다.”

“그러게요.”

아르밀라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나시르와 있을 때 서먹함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왠지 분위기가 묘했다. 나시르가 뭔가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아르밀라 님께서 원하신다면.”

한참 뜸을 들이던 나시르가 입을 열었다. 찻잔을 내려다보던 아르밀라가 고개를 들자, 나시르가 눈웃음을 지었다.

“가족을 찾아봐 드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일단은 단서가 있으니까요.”

나시르는 부드럽게 말하며 아르밀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갸우뚱하던 아르밀라는 곧, 그가 일컫는 단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서 작은 탄성을 뱉었다.

“팔찌…….”

“예. 아르칸젤로에는 흔하지 않은 스타일이니, 세골린데 쪽을 찾아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르밀라 님은 세골린데인이신 것 같으니까요.”

“그렇죠.”

아르밀라는 나시르의 추론에 동조했다. 그녀는 아르칸젤로어는 거의 알지도 못하며 세골린데어에만 익숙하다. 그리고 세골린데의 지리가 더욱 낯익은 걸로 보아서, 세골린데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인접국인 자케트인일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매우 희박했다. 아르밀라는 자케트인 특유의 은색 머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커녕, 아르밀라는 불타오르는 노을 같은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나시르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팔찌 하나로 가족을 찾으려면 사람을 제법 풀어야 하겠지만, 크게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가주님께서도 아르밀라 님께서 가족을 찾고 싶어 한다면 기뻐하실 테니까요.”

“그러실까요?”

“그럼요. 아르밀라 님의 기억을 찾아 주기 위해 매일 손수 마법 치료까지 하고 계시잖습니까.”

“제가 빨리 떠났으면 싶어서 그러시는 거겠죠.”

아르밀라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말하면서도 너무 주눅이 들어 있지 않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억지로 기분을 끌어 올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아르밀라가 의지할 사람이라곤 리카르도뿐이다. 알을 깨고 나와 처음 본 어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오리 새끼처럼, 그녀의 온 신경은 눈산에서 자신을 구출해 준 리카르도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그녀에게 마음 한 자락도 내어 주지 않았다.

아르밀라는 자신이 리카르도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에게 아르밀라는 골칫덩어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는 치료 중에 쓰러지며 폐를 끼쳤으니까.

“제가 떠나면 전하께서는 후련해하시겠죠.”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나시르는 풀이 죽은 아르밀라의 말에 기함했다. 후련해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르밀라가 쓰러졌을 때 리카르도는 그녀의 침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답지 않은 행동에 기사단장인 에치오는 아르밀라가 여우라며 반감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리카르도가 황명까지 뒷전으로 하고서 누군가의 간병을 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카르도는 자기 때문에 일어난 마력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정말 그럴까.

나시르는 대공이 아르밀라에게 평균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만 천성이 다감하고 섬세하지 않아서 티가 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런데 리카르도가 아르밀라를 골칫덩어리로 생각한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나시르는 기가 막혀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반박했다.

“가주님이 후련해하실 거라뇨? 말도 안 됩니다. 그러실 분이었으면 진작 아르밀라 님을 마탑으로 보내셨겠죠.”

“안 그래도, 왕녀님이 레나토로 오시면 마탑으로 갈까도 싶었어요.”

“그런…….”

아르밀라에게 말을 쏟아 내던 나시르의 말문이 막혔다.

“마탑이라니, 거긴 레나토와 반대쪽에 있지 않습니까. 아르밀라 님 혼자서 가시기는 무립니다. 아마 가주님도…….”

“찾았습니다!”

나시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택 밖에서 에치오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나시르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던 아르밀라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왕녀님을 찾았습니다!”

에치오의 외침이 매서운 바람을 가르고서, 저택에 울려 퍼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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