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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8화 (9/120)
  • 8화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턱을 잡고서 살짝 힘을 주었다. 그러자, 꾹 닫혀 있던 입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그는 그녀의 입 사이로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의 입이 완전히 겹쳐지자 뜨거운 숨이 아르밀라의 입 안으로 퍼진다.

    그리고 보랏빛 마력도 그와 함께 아르밀라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흠칫거리며 떨던 아르밀라의 저항이 점차 사그라들고, 그녀는 리카르도와의 키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리카르도는 가냘픈 몸을 더욱 바짝 끌어안으며 혀를 움직였다. 뻣뻣한 혀를 감싸 부드럽게 풀어 주듯이 문지르고, 가는 허리를 거머쥐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마력을 불어넣기 위해 시작되었던 키스가 어느새 둘 사이의 불을 지피고 있었다.

    “하아…….”

    적극적으로 아르밀라와 혀를 섞던 리카르도는 그녀의 숨소리가 잦아들자 천천히 입을 떼었다.

    리카르도의 시야 안에 있는 아르밀라는 눈 속에서 피어난 한 떨기 에델바이스처럼 가련해 보였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그녀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언제 뜨거운 키스를 나눴냐는 듯이, 냉정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정신이 드나?”

    평온한 어조의 질문에 굳게 다물려 있던 아르밀라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붉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그 안에 가둬 두었던 진녹색 눈동자를 드러냈다.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에 어울리게도, 눈동자의 불이 꺼져 있었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상태를 신중히 관찰하며 그녀를 불렀다.

    “아르밀라.”

    “흐읏.”

    리카르도의 부름에 아르밀라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목 아래에서부터 끌어 올린 듯한 소리를 내었다.

    “……려 ……세요.”

    “뭐라고?”

    리카르도가 귀를 기울이자, 아르밀라가 다시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내쉬는 숨과 함께 한마디의 말을 내뱉었다.

    “살려 주세요.”

    이 말과 함께, 아르밀라는 정신을 잃었다.

    * * *

    환한 빛이 눈앞에 번진다. 푹신한 침구가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르밀라는 이 포근함에 기시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아르밀라는 침실에 누워 있었다. 익숙한 캐노피와 천장에,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깨어났군.”

    눈을 멍하니 깜박이는 사이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밀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말끔하게 옷을 갖춰 입은 리카르도가 앉아 있었다. 아르밀라는 그의 옷차림이 바뀐 것을 보고서 그새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를 가늠하려 했다.

    “사흘.”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눈치를 기민하게 읽고서 대답해 주었다.

    “사흘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

    “……아.”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나? 평소에 기절을 자주 했다거나…….”

    아르밀라에게 질문을 던지던 리카르도는 입술을 짓씹고서 헛웃음을 지었다.

    “어리석은 질문을 했군. ‘예전’을 기억했으면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아르밀라는 말없이 리카르도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비틀거리자, 리카르도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에게 눈짓을 했다.

    아르밀라를 괴롭히는 데에 늘 앞장서는 회색 머리 하녀였다. 하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르밀라의 허리 뒤에 베개를 덧대어 주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가주의 앞에서만큼은 아르밀라에게 정중했다. 집사나 하녀장 정도만이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르밀라는 안심하고 하녀에게 몸을 맡겼다.

    하녀의 도움으로 침대 헤드에 기댄 아르밀라는 숨을 골랐다. 사흘이나 지났다니,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시간의 흐름이 놀라웠다.

    아르밀라는 멍하니 정면의 벽난로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평소에 기절을 자주 했는지, 예전에도 이랬는지는 몰라요. 기억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이 저택에 오고 나서부터는 기절은 하지 않았어요. 전하께 치료를 받을 때 종종 정신을 잃곤 했지만, 아시다시피 금세 깨어났고요.”

    “그럼 혹시, 레나토를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나? 기억을 찾는 게 두렵다거나.”

    “글쎄요.”

    아르밀라는 의원처럼 차근차근 질문을 던지는 리카르도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의 질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녀의 가슴 한구석이 따끔했다.

    리카르도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르밀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지어냈다.

    “감기 기운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열이 좀 있었거든요.”

    “감기라고?”

    아르밀라의 말에 리카르도의 손이 그녀의 이마로 올라왔다. 차가운 손이 닿자 아르밀라는 당황하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열이 없다는 걸 바로 들켜 버려서 민망했다.

    “열은 없는데.”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진단에 변명했다.

    “그새 열이 다 내렸나 봐요. 푹 쉬었잖아요.”

    “그럼 이젠 괜찮은 건가.”

    “네, 멀쩡해요.”

    “확신해?”

    재깍 고개를 끄덕이려던 아르밀라는 괜스레 제 팔을 주물렀다.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리카르도에게 해맑게 웃어 보였다.

    “네, 확신해요.”

    “……그래.”

    리카르도는 다소 못 미덥다는 표정을 짓고서 깍지를 꼈다. 그는 아르밀라를 주시하다가 협탁에 올려져 있는 종을 들어 짤막하게 흔들었다. 작은 종이 울리자마자,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나시르가 등장했다. 그의 뒤에는 파올로와, 그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따랐다.

    “진찰해.”

    “예, 가주님.”

    사내는 들고 온 가죽 가방을 꼭 쥐고서 침대로 다가왔다. 의원인 듯했다.

    아르밀라는 의원에게 손목을 내어 주고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었지만, 아르밀라만은 알 수 있었다.

    “어떤가.”

    “기력이 쇠해져 있기는 하지만 보양식을 잘 챙겨 드시면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거부 반응은 어떻게 된 거지?”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다시 그럴 일은 없습니다만 염려되신다면 마력 순환을 돕는 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의원은 리카르도의 명에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서 하녀와 함께 침실을 떴다.

    이제 침실에는 나시르와 파올로, 그리고 리카르도와 아르밀라가 남았다. 리카르도가 관자놀이를 문지르자, 파올로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가주님, 오늘도 수색에서 빠지실 것인지 에치오 단장이 여쭈었습니다.”

    “전하께서 수색을 거르셨나요?”

    아르밀라는 파올로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파올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가 쓰러진 동안 가주님께서 내내 간병을 해 주셨네. 왕녀님의 수색에도 빠지시면서까지 말이야. 감사한 줄 알게.”

    파올로의 퉁명스러운 말에 아르밀라가 숨을 들이켰다. 그의 말투 때문이 아니라, 그가 전한 사실 때문이었다.

    리카르도는 여태 단 한 번도 왕녀의 수색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기사단장인 에치오가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고 세골린데와 황실에는 대충 보고를 하자고 했을 때도, 그리고 폭설이 무시무시하게 내리던 날도 수색했는데.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몰랐어요.”

    “몰랐겠지. 그걸 다 알고서도 누워 있을 만큼 뻔뻔했다면…….”

    “말이 길군.”

    아르밀라에게 집사의 질책이 쏟아지려 하자, 리카르도가 손을 들며 잘라 내었다. 파올로는 주인의 명에 공손히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그간 가주님께서 고생하신 것에 속이 상해서 그만.”

    “알겠으니까 나가 봐라.”

    리카르도는 파올로를 내보낸 후에 나시르를 바라보았다. 나시르는 리카르도와 아르밀라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의 그 편지가 또 와서요. 어찌할까요?”

    “올 때가 되기는 했지.”

    “지난번처럼 답신을 드리면 될까요?”

    “하던 대로 해. 나도 하던 대로 할 테니.”

    리카르도는 짤막하게 대답하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밝은 햇살이 퍼진 창밖을 내다보며 무심히 말했다.

    “오늘은 수색하기 편하겠군.”

    “가시는 건가요?”

    침실을 떠나려는 리카르도를 보는 아르밀라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리카르도는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사흘이면 충분히 쉬었으니까. 마력 문제도 해결했고.”

    아르밀라의 곁을 지켰던 건 그녀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책임감 때문이라는 어투였다. 아르밀라는 파올로의 이야기에 조금이나마 가슴 떨려 했던 게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르밀라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는 걸 알 리 없는 리카르도가 나시르에게 눈짓을 했다. 나시르는 아르밀라를 흘끗거리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에치오에게 말해 검은 늑대 기사단을 준비시키겠습니다.”

    “그건 파올로가 할 테니, 자네는 편지를 맡아. 저녁에는 성벽 보수 공사 진척 상황도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나시르에게 지시를 내리던 리카르도가 문득 아르밀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이불을 말아 쥐었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곁에 있어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아르밀라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국경 지도를 완성해 은혜를 갚고 나면, 기억을 찾기 위해 마탑으로 갈 작정이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기억을 기다리며 리카르도의 곁에 눌러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비록 눈과 마음이 리카르도에게 향할지라도, 그를 탐내는 건 안 된다. 그의 곁에는 기억도 온전치 않은 비천한 여자보다 고귀한 왕녀가 어울린다.

    “잘 다녀오세요, 전하.”

    아르밀라는 자신의 처지를 되새기며 인사했다. 그녀의 배웅을 들은 리카르도의 손이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팔찌를 스치듯이 만지고서 나직이 말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곧 올 테니.”

    아르밀라는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원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를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는데도, 그를 기다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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