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리카르도 비토레는 완벽주의자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남자였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왕녀 수색을 할 만큼, 그리고 새벽에 수색을 마친 오늘조차도 아르밀라의 치료를 하러 와 줄 만큼.
“오셨어요.”
아르밀라는 어색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리카르도를 맞이했다.
처음에 그녀는 침실이 아닌 응접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몇 번인가 치료 도중 고통을 호소하며 정신을 잃자, 아예 처음부터 침대에서 치료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르밀라는 건조한 표정으로 방을 가로지르는 리카르도를 보며 숄을 추슬렀다.
오늘은 폭설이 내려, 리카르도의 머리와 어깨에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을 맞는 것이야 일상이니 색다를 것도 없다. 다만, 눈이 그새 녹아 그의 머리카락과 옷을 적셨다는 게 문제였다.
아르밀라는 맑은 물방울이 아롱진 새카만 머리카락을 보며 눈썹을 모았다.
“몸을 데우신 다음에 오셔도 되었는데요.”
“됐어.”
리카르도는 무심히 눈을 털어 내며 대답했다. 그러곤 담비 털이 장식된 망토를 의자에 던져 놓으며 벽난로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벽난로의 불꽃 상태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장작 몇 개를 더 넣었다. 텅 빈 장작 바구니를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빨리 끝내는 편이 나아.”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은 건조한 말투. 아르밀라는 그의 음성에 자신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감히 자신의 이름에 리카르도의 성을 이어 붙인 낙서를 태워 없앤 벽난로 앞에서, 리카르도는 그녀와의 일을 단순한 업무 취급 하고 있었다.
폭설 속에서 산을 헤매야 하는 수색을 할 때는 귀찮은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으면서, 정작 따뜻한 침실에서 5분 남짓이면 해결되는 마법 치료는 빨리 끝내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군다.
이러한 태도 차이가 아르밀라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르밀라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울적하게 말했다.
“그렇담 빨리 시작해야겠네요. 그래야 빨리 끝나니까요.”
아르밀라는 순간 놀라서 제 입을 한 손으로 막으며 리카르도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보다 불퉁하게 말이 나갔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그 자세 그대로 앉아서 불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침실에는 한동안 장작이 튀는 소리만이 작게 퍼졌다.
‘화나신 걸까?’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의 긴 적막이 찾아오자, 아르밀라는 초조하게 리카르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
자신을 책망하던 아르밀라는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눈을 깜박였다. 리카르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아르밀라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기다란 손가락이 황금색 단추를 하나씩 푸는 것을 바라보았다.
젖은 재킷이 소파 위로 무겁게 털썩, 하고 떨어졌다. 오늘 눈을 지독하게 맞았는지, 재킷 안에 받쳐 입은 하얀색 셔츠도 흠뻑 젖어 있었다.
“빨리 시작해야지.”
리카르도가 낮게 되뇌며 몸을 돌렸다. 그를 본 아르밀라의 볼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눈에 젖은 셔츠가 단단한 상체에 찰싹 달라붙어, 근육이 잘 짜인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판판하고 넓은 가슴과 그 아래로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이 리카르도가 숨을 쉴 때마다 천천히 이완했다.
“시작할까.”
리카르도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나직이 말했다. 별것 아닌 말인데도, 아르밀라의 배 안쪽에서 뜨거운 불길이 확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아르밀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조용한 대답에 리카르도가 침대로 서서히 다가왔다. 젖은 구둣발이 융단에 하나씩 발자국을 만들고, 탄탄한 허벅지가 서로 스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니, 사실은 작게 울렸다. 아르밀라의 심장이 뛰는 소리에 비하면 턱없이 작게.
“전하…….”
“어때.”
“……네?”
어느새 리카르도의 손이 다가와 아르밀라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르밀라는 흘러내린 숄을 추스르는 것도 잊고서 리카르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는.”
“아…… 괜찮아요.”
아르밀라는 뒤늦게 리카르도의 질문을 파악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떨구자, 드레스의 보디스 위로 드러난 윗가슴이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유난히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에, 아르밀라는 황급히 숄을 끌어 올렸다.
‘보셨을까?’
밖이 추울수록 저택은 더욱 따뜻하게 땔감을 땐다. 폭설이 내린 오늘은 저택이 따뜻하다 못해 더울 지경이었다.
아르밀라는 장작을 아껴서 조금씩 태우고 싶었지만, 하녀들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새벽에 장작이 다 닳아 없어지건 말건 무조건 세게 불을 땠다.
그래서 오늘 아르밀라는 보디스 라인이 깊게 내려간, 어찌 보면 다소 과감한 디자인의 봄 드레스를 입었다.
이 드레스를 입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이런 봄옷이 아니면 겨울옷뿐인데, 벨벳 소재의 두꺼운 솜옷을 입기에는 저택이 찌듯이 더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리카르도를 맞이할 시간이 되자, 아르밀라는 자신이 입은 드레스가 노출이 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타리나 부인이나 파올로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그런 디자인의 드레스는 아르밀라에게 주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르밀라 혼자서 괜히,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일부러 드레스와 어울리지도 않는 숄까지 찾아서 둘렀던 것인데. 리카르도를 넋 놓고 보는 바람에 잘 챙기질 못했다.
“준비는 끝난 건가?”
“네, 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가 허겁지겁 숄을 목까지 끌어 올리는 것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 아르밀라는 또다시 홀린 표정으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이 아니라 비를 맞고서 온 것처럼 젖은 남자가,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서 아르밀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는 순간적으로 머물렀다가 사라졌지만 아르밀라의 머릿속에는 진하게 남았다.
“그럼…….”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머리에 손을 얹고서 눈을 감았다. 촘촘하고 가지런한 속눈썹을 바라보던 아르밀라는 그의 손에서 보라색 빛이 은은하게 나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을 감자, 시야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한편에서 보라색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아른거렸다.
‘……라벨 ……께서요?’
‘네. 저는 ……녀니까요.’
머릿속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빙빙 돌았다. 아르밀라는 인상을 썼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녀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 잠깐만요…….”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붙잡으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짤막하게 끊겨서 들리는 이야기에 주의를 집중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들으려 하면 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고통이 커져 갔다.
머리를 울리며 지끈거리게 하던 고통은 이내 그녀의 온몸으로 퍼져 갔다.
아르밀라는 숨을 헐떡이며 리카르도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아…… 흐읏……!”
“아르밀라?”
리카르도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고, 그의 따스한 체온이 아르밀라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대공의 품에 안기다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당장에 일어나야 마땅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제가 대공과…….’
‘그럼 미라…… 녀님을…….’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그럼에도 고통은 점점 지독해져 갔다. 아르밀라는 통증에 허덕이며 몸을 뒤틀었다.
“하으, 읏…….”
선명했던 목소리가 이내 희미해져 가자, 아르밀라는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하아…….”
리카르도가 아르밀라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아르밀라는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워서, 리카르도의 몸 아래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르밀라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그녀는 안개를 헤치려는 사람처럼 손을 허우적댔다.
리카르도는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몸을 뒤트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머리의 부상은 다른 부위의 부상보다도 더 심각하다. 기억력과 지능에 문제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밀라는 평범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에는 구멍이 송송 나 있었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 전부가 소멸되어 있었다. 마치 일부러 도려낸 것처럼.
“흐으, 흐으, 으…….”
고통을 호소하는 아르밀라를 내려다보며, 리카르도는 냉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거부 반응이다. 무엇이 변수가 된 걸까.
황족은 마력을 지니고 태어난다. 황제에게 가까운 핏줄일수록 강한 마력을 가진다. 리카르도도 강력한 마력을 타고났다. 그리고 그 마력에 걸맞은 교육을 받았다.
인간의 정신과 기억을 지배하는 마법은 리카르도의 특기였다.
기억을 잃은 아르밀라를 마탑에 보내지 않고 레나토에 머무르게 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녀를 치료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예상을 넘어선 반응을 보였다. 기억을 되찾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리카르도는 발버둥 치는 아르밀라를 허벅지로 세게 누르며 차분히 분석했다.
기억을 찾고 싶지 않은 이유나 레나토를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생겼나.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아, 하읏, 아……!”
비명을 지르던 아르밀라의 입술이 점차 파랗게 질려 갔다. 체온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었다.
아르밀라를 관찰하던 리카르도가 망설임 없이 그녀를 껴안았다. 젖은 셔츠와 드레스가 빈틈없이 맞붙었다.
“안 되겠군.”
아르밀라가 파들파들 떨자, 리카르도는 체온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셔츠를 벗었다.
맨몸으로 껴안자, 오슬오슬 떨던 아르밀라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이제 그녀는 입술만을 달달 떨며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뜨거운 체온과 상반되는 차가운 눈으로 아르밀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마력을 불어넣어 주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생각하지도 못한 난관이다. 리카르도는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황이 못마땅했다.
“아르밀라, 눈을 떠.”
“…….”
“눈을 떠라.”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재촉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극렬한 거부에 리카르도는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마력을 주입할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