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아르밀라는 흠칫하며 문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고서 우물쭈물하자 리카르도가 다시금 차갑게 물었다.
“누구냐.”
아르밀라는 그간 좀처럼 듣지 못했던 차가운 음성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리카르도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담뿍 담겨 있었다. 아르밀라를 대할 때도 그리 정겨운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훈풍이 분다고 해도 될 지경이었다.
벌컥.
아르밀라가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때, 그녀의 앞에서 휙 하는 바람이 불며 문이 열렸다.
“누구냐고 했…… 아르밀라?”
불청객을 날카롭게 추궁하던 리카르도가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을 보고서 미간을 좁혔다. 왜 그녀가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르밀라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두고 온 것이 있어서요.”
“들어와.”
리카르도는 아르밀라가 들어올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 주었다. 아르밀라는 그의 곁을 스쳐서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촛불 하나만이 넓은 서재를 밝히고 있었다. 곧 꺼질 것처럼 촛불의 불꽃이 길게 늘어나 있었다.
아르밀라는 어둑한 서재를 천천히 걸어가 책상 앞에 섰다. 연습지로 손을 뻗으려던 그녀는 그 위에 놓인 편지지를 보고서 멈칫했다.
한편 문가에 기대어 서 있던 리카르도는 아르밀라가 세골린데의 편지를 보자 몸을 움직였다. 그는 빠르게 걸어가 편지를 집어 들고서 짤막하게 말했다.
“보았나?”
“아, 아뇨. 보지 못했습니다.”
보았다. 하지만 본 것이라고는 세골린데의 인장뿐이었다. 어째서 자신이 그 인장이 세골린데 국왕의 인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 순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가슴이 철렁였다.
리카르도는 세골린데와 연락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미라벨 왕녀를 찾느라 매일같이 노력하는 것도 모자라서.
“뭐. 보았어도 상관없다.”
리카르도는 냉정히 말하며 편지지를 접었다. 그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골린데에서 매주 오는 연락이니까. 새로울 것도 없지.”
“어서 왕녀님을 찾아 달라는…… 그 얘기요?”
리카르도는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골린데에서 왕녀에 대한 책임을 아르칸젤로에 묻는다는 얘기는, 그리고 리카르도에게 그 짐이 고스란히 떠넘겨졌다는 얘기는 이미 성내에서 유명했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가 편지지 아래에 놓여 있던 연습지를 챙기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까 살펴보기는 했지만 별것 없는 연습지였다. 글씨체가 과하게 유려하다는 것을 빼면.
리카르도는 아까 아르밀라의 연습지를 살펴보며 의문에 빠졌었다.
물 흐르는 것처럼 우아한 필체가 연습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 필체는 하루 이틀 연습한다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니다. 아르밀라는 분명, 원래 글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르밀라의 정체는 무엇일까.
리카르도는 남은 술을 들이켜며 그녀를 관찰했다. 어둑한 방 안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검은빛으로 보였다.
그 와중에도 몇 가닥이 금빛으로 빛났다. 평범한 진저가 아니라, 오묘한 빛깔의 붉은 머리였다.
아르밀라의 진녹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이채를 띠었다. 살결은 티 없이 맑았고, 손도 고생한 흔적 없이 부드러웠다.
외모를 떠나 이런 점만 보아도 적어도 평민은 아니다. 평민이라면 머리카락부터 버석버석했을 테니까.
게다가 아르밀라에게는 뭐랄까. 고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녀가 평민이었다면 평범한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눈에 띄는 미인의 삶은 본인의 의지를 벗어나는 법이니까.
그러나 아르밀라는 순수하고 꼬인 구석이 없었다. 다른 사람을 섣불리 경계하지를 않았다.
아르밀라에게는 보호받으며 자란 사람 특유의 맑음이 있었다. 무지와는 다르다. 현명하고 명석하되, 음습한 면이 없다. 그렇다면 역시, 귀족일까.
리카르도는 붉은 머리의 세골린데 가문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들 중에 아르밀라의 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전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혼자만의 세계에 빠졌던 리카르도가 맑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매를 좁히고서 입을 열었다.
“뭘?”
“왕녀님이요. 걱정되시나요?”
“갑자기 그런 건 왜 묻지?”
“전하께서 혼인하실 분이잖아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궁금할 것도 많군.”
아르밀라는 연습지를 돌돌 말아 쥐며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따라 말이 많았다. 꼬박꼬박 묻는 말에 대답까지 해 주었다.
평소에는 말을 걸기도 쉽지 않은 걸 생각하면 지금이 그와 대화할 절호의 기회처럼 여겨졌다. 아르밀라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매일같이 찾으러 나가시는 걸 보면,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아요.”
“걱정이 되기는 하지.”
리카르도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자수정과 같은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이며 빛났다.
“나보다도 네가 더 왕녀를 신경 쓰는 것 같군.”
나직한 리카르도의 목소리에 아르밀라는 갈증을 느꼈다. 낮은 음성과 곧은 시선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아르밀라는 마음을 졸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주제넘었나 봐요. 죄송해요.”
“내 약혼자를 걱정한 걸 사과하는 건가.”
리카르도가 쓰게 웃으며 말하자, 아르밀라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방 안이 어둡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단번에 안색을 들켰을 것 같았다. 아르밀라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죄, 죄송…….”
“됐다. 사과는 그쯤 해.”
리카르도는 술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왠지 그를 지겹게 괴롭히던 불면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앉아.”
리카르도는 건조한 음성으로 아르밀라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르밀라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두루마리처럼 말린 연습지가 소중히 쥐어져 있었다.
아르밀라를 살피던 리카르도의 시선이 연습지에 닿았다. 그는 미간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다시 가지러 올 만큼 비싼 종이는 아닌데.”
“종이가 아니라 내용이…….”
“내용이?”
리카르도의 질문에 선선히 대답하던 아르밀라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글씨가 엉망이라서요. 그래서 가지러 온 거예요.”
“엉망이랑은 거리가 멀던데.”
리카르도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렸다. 아르밀라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리카르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웃는 모습은 귀하다. 특히나 단둘이 있을 때는.
‘오늘은 운이 좋네.’
아르밀라의 심장이 서서히 옥죄어져 왔다. 리카르도와 둘이 있을 때면 느끼던, 공기가 무거워지고 호흡이 버거운 듯한 느낌이 다시금 들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유 모를 고양감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마주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자, 리카르도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었다. 그의 표정을 읽은 아르밀라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조금…….”
리카르도는 헛기침을 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원래 얘기로 돌아오자면. 정략혼이 무사히 맺어졌다면 좋았겠지만, 그게 힘들어졌으니 왕녀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해. 못 찾을까 봐 조금 걱정이 되는 것도 같군.”
“전하께 왕녀님은 정말 중요한 분이신가 봐요.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아낀다고 해야 하나, 그걸.”
리카르도는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뭔가를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더 이상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가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
“전하, 왜…….”
“밤이 깊었군.”
“아, 죄송합니다.”
한참의 침묵 후에야 내뱉어진 리카르도의 말에 아르밀라는 화급히 자리를 떴다. 그가 축객령을 내려 줘서 천만다행이었다. 계속 서재에 있었다면 무슨 말실수를 할지 몰랐으니까.
‘쓸데없는 말이었을까?’
아르밀라는 초조한 마음으로 자신이 한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다행히, 크게 어색하거나 이상한 얘기는 없는 것 같았다. 주제 파악을 잘 하려고 노력한 덕이었다.
침실을 향해 가던 아르밀라는 손에 쥐고 있던 연습지 뒷면에 작게 써 놓은 낙서를 내려다보았다.
실은 아까부터, 리카르도가 이걸 보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래서 괜히 왕녀나 편지에 대한 쓸데없는 질문만 던져 댔다. 하지만 괜한 짓이었다. 괜히, 그의 기분만 언짢게 만들어 버렸으니.
‘들키지 않았겠지.’
아르밀라는 손끝으로 낙서를 지우려는 것처럼 문질렀다. 하지만 이미 잉크가 마른 낙서는 지워지지도, 번지지도 않았다.
아르밀라는 한숨을 쉬며 낙서를 꾸욱 눌렀다. 그러자, 낙서가 쓰인 부분이 구겨졌다.
침실에 들어온 아르밀라는 벽난로를 향해 연습지를 던졌다. 그러자 연습지의 테두리서부터 말려 들어가며 까맣게 타들어 갔다.
아르밀라의 낙서 또한, 검게 사라져 갔다. 아르밀라는 시린 눈으로 낙서를 바라보았다.
아르밀라 비토레.
그야말로 분에 넘치는, 주제를 모르는 낙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