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아르밀라의 깃펜을 거머쥐었다. 리카르도의 아름다운 옆얼굴이 아르밀라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촛불의 주홍빛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일렁였다.
“이름은 제법 능숙해졌군.”
“……네.”
리카르도를 멍하니 보던 아르밀라는 흠칫하며 시선을 거뒀다.
얼굴이 뜨거웠다. 혹여나 지금 느낀 이 열기를 리카르도나 나시르가 눈치챘을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두 남자 모두 아르밀라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시르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리카르도를 맞이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달리 용건이 있나?”
“예. 실은…….”
리카르도에게 대답을 하던 나시르가 우물쭈물하며 아르밀라를 바라보았다. 뺨의 열기를 식히던 아르밀라는 그의 시선에 눈을 깜박였다.
“자리를 피해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아르밀라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서는 리카르도에게 몸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아르밀라가 써 놓은 이름을 바라보는 채였다. 죄다 똑같은 이름들인데도, 그는 글씨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마치 그 글들이, 그녀의 목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럼, 전하.”
“…….”
아르밀라가 인사를 할 때도 리카르도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서야, 잠에서 깬 듯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리카르도가 아르밀라가 서 있던 자리를 응시하는 사이 나시르가 그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소매 안에서 밀랍으로 봉해져 있는 편지를 꺼내어 주인에게 내밀었다.
“세골린데에서 보내온 서신입니다.”
리카르도는 말없이 나시르가 건넨 편지를 건네받았다. 페이퍼 나이프로 봉인을 무심히 풀고서 촛불에 내용을 비춰 보던 그의 반듯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또 같은 내용이로군.”
리카르도는 덤덤히 말하고서는 편지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는 아르밀라가 앉았던 의자에 앉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시르는 주인의 심기가 불편해지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편지의 내용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왕녀가 행방불명된 지 한 달째, 세골린데에서는 매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녀의 조속한 신병 확보를 요청하고 있었다. 정략혼을 제안한 아르칸젤로 제국 측에 책임을 묻는 것은 덤이었다.
매번, 토씨 하나 바뀌지 않은 같은 내용이다.
리카르도로서는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말이 제국의 책임이지, 실상은 리카르도의 책임이라고 그를 탓하고 있는 셈이다.
하다못해 왕녀의 시신이라도 찾아 장례를 치르는 성의라도 보여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리카르도는 황제와 세골린데 양측의 책임 추궁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리카르도는 매일 직접 추적을 해야만 한다. 보여 주기식일지라도,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세골린데 측의 추적대를 받아들일 걸 그랬을까요?”
“참도 도움이 됐겠군.”
리카르도는 나시르의 질문에 냉소를 흘렸다. 왕녀 일행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세골린데에서는 추적대를 보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정중히 거절했다.
세골린데의 추적대는 레나토의 맹추위에서는 활약을 하지 못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세골린데 측에서도 리카르도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대신에, 이렇게 매주 독촉장 같은 서신을 보냈다.
미라벨 왕녀가 왕이 가장 아끼는 딸이라더니. 헛소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리카르도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사실 리카르도는 왕녀에 대한 소문들을 믿지 않았다. 혼인 시장에서 딸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갑자기 애정을 쏟고 꾸며 주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일반 귀족가에서도 그럴진대, 황실과의 혼사를 논하는 일국의 왕가는 오죽했겠는가.
왕녀가 세골린데의 꽃이라고 할 만큼 굉장한 미인이라는 것도 거짓말일 거라고 여겼다. 애초에 그런 귀한 왕녀를 황태자도 아닌 대공에게 보낸다는 것부터가 석연찮았기 때문이다.
얼굴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결혼은 리카르도에게 중요하지 않다.
결혼은 누구와 해도 상관없다. 누가 대공비가 되든, 남처럼 지낼 생각이었으니.
그렇기에 리카르도는 혼인 전에 의례적으로 주고받는 초상화도 받지 않았다.
“……초상화를 받아 봤어야 했을까.”
편지지를 응시하던 리카르도가 후회의 말을 내뱉었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찾아 매일같이 산을 헤매다니. 이 무슨 바보 같은 일인가.
“지금이라도 요청하시면 보내 줄 겁니다. 왕족들의 초상화야 매년 그리니까요. 작년이나 올해에 그려 둔 것이 있겠죠.”
나시르는 편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리카르도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어떻게, 요청을 해 볼까요?”
“아니.”
리카르도는 편지지에서 고개를 돌리고서 짤막하게 말했다. 그는 앞머리를 건성으로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알아 봤자 찝찝하기만 할 뿐이지.”
“왕녀님이 이미 돌아가셨다고 보시는군요.”
“이 추위에는 한 시간만 밖에 서 있어도 동상에 걸린다. 그런데 한 달이라면.”
리카르도는 말을 자르고서 잠시 머뭇거렸다.
“적어도 왕녀는 초상화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겠지.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나시르는 주인의 말에 침묵으로 동의했다.
초반에는 왕녀를 한시라도 빨리 구하기 위해 나섰다면, 지금은 시신을 찾기 위해서 수색하는 중이었다.
왕녀의 장례를 무사히 치러 주는 것.
그것이 왕녀의 전 약혼자인 리카르도에게 남은 책무였다. 그리고 그 책무를 마무리하기 전에는 그는 황명을 완수하지 못한 죄인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죄라고까지 이르지 않을 일이다. 좀 더 나아가서는 아랫사람을 부려도 무난할 일이었다. 다른 업무를 제치고서 얼굴도 모르는 약혼자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리카르도에게 황제의 말 한마디는 유독 무거웠다. 바로 그가 품고 있는 하나의 비밀 때문이었다. 그것은…….
“쉬고 싶군.”
“목욕물을 준비하라 전할까요.”
리카르도는 대답 대신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걸음은 서재의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위스키 바로 향하고 있었다. 나시르는 주인의 뒷모습을 보고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러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서재의 문이 조용히 닫혔다. 리카르도는 피곤한 얼굴로 호박색 액체를 크리스털 잔에 따랐다.
추위가 매서운 시기에는 도수가 높은 술로 체온을 높인다. 뜨거운 물로 목욕하는 방법도 있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나시르에게는 아직 일러 주지 않았지만 사실 오늘 황실에서도 편지가 도착했다.
은밀히 전달된 황제의 친서에는 리카르도의 머리를 어지럽힐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소파에 앉은 리카르도는 손목을 틀어 투명한 잔의 액체를 굴렸다. 그는 찰랑이는 술을 바라보다가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리카르도는 소파 깊숙이 몸을 묻으며 독한 술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며 체온이 오르는 느낌을 만끽했다. 술을 마시니 산을 뒤지고 다니며 쌓인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리카르도는 술을 홀짝이며 황제가 보낸 친서를 천천히 떠올렸다.
친서의 내용들은 하나같이 쓰레기 같았지만, 가장 쓰레기 같았던 것은 첫 문장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에게.
황제가 당당히 세상 밖에 내놓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누구보다도 아낀다고 말하는 아들. 황제의 사생아.
그것이 리카르도의 비밀이었다.
리카르도는 황제와 전 비토레 공작 부인 사이의 불륜으로 태어난, 누구보다도 고귀하되 누구보다도 더러운 피였다. 이는 리카르도가 평생을 벗어나려 했으나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자 운명이기도 했다.
* * *
아르밀라는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서재를 나와 침실로 돌아가는 사이, 연습지를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평범하게 이름만 연습한 것이라면 두고 나왔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그 연습지 뒷면에 끄적여 놓은 낙서가 문제였다.
당장에 가지고 나오려 하였지만 나시르와 리카르도가 무언가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는 것 같아 그럴 수 없었다.
나시르가 서재에서 나오자, 아르밀라는 재빨리 복도 모서리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리카르도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서재의 문은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비켜.”
목을 빼서 서재를 바라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회색 머리 하녀가 아르밀라를 툭 쳤다. 식당으로 향하는 모양인지, 은색 쟁반을 들고 있었다. 하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스레 말했다.
“뭘 봐?”
아르밀라는 그제야 자신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쟁반 위의 음식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르밀라의 방에 들어오는 것들은 죄다 차가웠다. 차가운 햄이 들어 있는 얄팍한 통밀 샌드위치에, 다 식어 빠진 수프가 주된 메뉴였다.
그러니 보기만 해도 추위가 녹을 것 같은 따끈한 스튜에 눈이 간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르밀라는 입술을 축이며 변명했다.
“아니, 그냥. 맛있어 보여서.”
“아아, 맛있어 보이셨어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녀는 아르밀라의 억양을 흉내 내며 이죽거렸다. 아르밀라는 작게 ‘미안.’이라고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취급은 익숙했다. 하녀와 하인들은 이런 식으로 아르밀라에게 유치한 농지거리를 했다.
아르밀라의 생활은 겉으로만 화려했다. 목욕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벽난로의 장작은 새벽까지 버틸 수 없을 만큼 적었으며, 옷시중은 아예 기대할 수도 없었다.
지금처럼 사용인들이 시비를 걸거나 실수인 척 발을 거는 건 예사다. 그들에게 아르밀라는 가주에게 들러붙은 기생충이었으니까.
“미안한 줄 알면 저리 꺼져.”
하녀는 팔꿈치로 아르밀라의 허리를 콱 찌른 후 도도히 복도를 걸어갔다.
아르밀라는 허리를 문지르며 하녀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딱히 화도 나지 않았다.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하녀가 완전히 멀어지자, 아르밀라는 서재 입구 가까이로 살며시 다가갔다. 그녀는 황금색 손잡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하지?’
아르밀라는 머뭇거렸다. 리카르도 혼자 있는 방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그와 단둘이 있으면 공기가 더 무겁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고, 숨 쉬기가 버거웠다.
‘어쨌든 연습지는 꼭 가져와야 해.’
아르밀라는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리카르도가 연습지 뒷면을 살펴보기라도 한다면 서먹한 정도가 아니라 그를 피해 다녀야 할 것이다.
아르밀라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또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가 문을 두드리려 하였을 때.
“누구지?”
서재 안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