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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4화 (5/120)
  • 4화

    “할 수 있어요. 아니, 하게 해 주세요.”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붙잡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을 눈산에서 구해 준 리카르도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네가 어떻게?”

    “그건…….”

    리카르도의 짤막한 질문에 아르밀라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입술을 말아 물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리카르도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말하지 않았나. 못 들은 걸로 하라고. 기억도 없으면서 무슨 지도를 그리겠다고.”

    “물론 저에 대한 기억은 없어요. 하지만 국경 지역을 헤맸던 기억만은 생생해요. 이상하리만치요.”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반신반의하는 시선을 읽고서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책상에 펼쳐져 있는 지도의 한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뿌옇게 칠해진 여기에는 바위 벽이 있어요.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요.”

    “……정말인가?”

    “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안개 지역이에요. 항상 비구름이 있는 것처럼 추웠어요. 한참을 걸어도 비가 그치지 않아서 힘들었던 걸 기억해요.”

    “…….”

    “그리고 여기는, 아, 여기가 제가 전하를 발견한 곳이에요. 여기도 바위가 많았는데…….”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분주히 말하던 아르밀라는 문득 리카르도가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말을 멈췄다. 그는 진지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밀라는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리카르도의 시선에 볼을 붉히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그렇게까지 고생을 해서.”

    리카르도는 천천히 읊조리며 아르밀라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기다란 손가락이 갸름한 턱을 거머쥐었다. 아르밀라를 바라보는 자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왜 여기까지 온 거지? 무슨 목적으로?”

    “그건…….”

    말문이 막힌 아르밀라가 침을 삼켰다.

    리카르도는 국경의 수비를 맡고 있다. 그런 자에게 그녀는 죽을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다고 자백한 셈이었다.

    “그건, 저도 몰라요. 기억이…….”

    “이럴 때만 유리하게 기억이 없군.”

    리카르도는 냉소를 던지며 아르밀라의 턱을 놓았다. 그를 도우려던 마음이 짓밟힌 아르밀라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저는 도와드리고 싶을 뿐이에요.”

    아르밀라는 리카르도가 물러난 만큼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기억을 잃었다는 게 얼마나 갑갑하고 속상한 일인지 아세요? 제 본명도, 신분도, 직업도 몰라요.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요. 제가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전하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었던 건데…….”

    아르밀라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녀는 매일 밤과 매일 아침이 두려웠다.

    잠들기 전에는 혹여나 오늘의 기억이 깡그리 사라질까 봐 공포에 떨었고, 눈을 뜨고서는 오늘은 어디까지 기억이 나는지를 헤아려야 했다.

    어서 기억을 찾고 싶은데, 그 일은 요원하기만 했다.

    그 와중에 그녀가 의지하는 유일한 사람은 매일 새벽같이 자신의 약혼녀를 찾으러 떠났다. 그러고서는 오늘도 찾지 못했다며 유감스럽다는 얼굴로 돌아왔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는 사용인들이 아르밀라를 두고 수군거렸다.

    뭔가 작게 역할을 갖게 되면 덜 괴로워질 줄 알았다. 그렇게 되면 리카르도도 조금은 따뜻하게 바라봐 줄 줄 알았다.

    그래서 머리를 쥐어짜 국경을 기억해 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이라고는 차가운 의심이었다. 그 사실이 아르밀라를 서운하게 했고, 서럽게 했다.

    “의심하려면 하세요. 내치셔도 되어요.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에게 말하며 눈가를 닦았다.

    이성적으로 말하려고 했는데, 야속하게도 눈가가 뜨겁게 달구어졌다. 아무래도 그녀는 리카르도만큼 상대방의 앞에서 차가워지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어쩌면, 단지 리카르도의 앞이라서 뜨거워지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르밀라에게 있어서 이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 고리이니까. 그녀에게는 그밖에 없으니까.

    “내 말이 과했다. 사과하지.”

    리카르도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려는 아르밀라를 붙잡았다. 그는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지도 제작을 부탁하지. 구체적인 방법은 보좌관에게 들으면 될 거다. 미리 일러 놓을 테니, 내일부터 서재로 가서…….”

    “하지만 절 여전히 의심하시는 거죠?”

    “그건…….”

    리카르도는 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대답에 숨겨진 본심을 읽은 아르밀라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녀는 거칠게 눈가를 닦아 내고서 말했다.

    “괜찮아요. 그러셔도.”

    아르밀라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을 하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저라도 제가 수상할 거예요. 이해해요.”

    아르밀라의 처연한 얼굴을 보던 리카르도의 잇새에서 긴 한숨이 새었다. 그는 그녀를 놓아주고서 혀를 작게 찼다.

    “이거 안 되겠군.”

    “네?”

    “나는 스파이로 의심하는 사람을 곁에 둘 만큼 무방비하지 않다. 방금은, 조금 당황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을 뿐이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차분한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어깨가 힘없이 늘어진 것을 보던 리카르도가 허리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생명의 은인에게 배은망덕한 놈이 된 기분이군.”

    리카르도의 말에 아르밀라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그녀와 그의 눈이 마주치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게 부탁을 해 봐. 너에게 실수를 했으니 청을 하나 들어주지.”

    뜻밖의 제안에 아르밀라의 입술이 달싹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였다. 머릿속의 생각이 순식간에 복잡하게 얽혔다. 그에게 바라는 것은 많았다.

    더 이상은 의심하지 말아 달라고, 조금은 관심을 가져 달라고, 가끔은 대화를 나눠 달라고…….

    하지만 아르밀라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바람들을 꾹 눌렀다.

    그동안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에게 제법 관대하게 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이 그의 말 한마디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기실, 아르밀라에게 관대하게 굴었다는 것도 그 ‘친절’의 농도가 옅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따스하지 않은 사내였다.

    그러니 그가 허락했다 해도, 아무 소망이나 내뱉어서는 안 된다.

    “말해 봐, 뭐든.”

    리카르도의 재촉에 아르밀라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작게 뭉쳐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제게 아르칸젤로어를 가르쳐 주세요. 전하께서 직접요.”

    리카르도는 말없이 아르밀라를 바라보았다. 아르밀라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마음을 졸였다.

    너무 과한 청일까.

    대공은 일이 많다. 시간도 없다. 그의 귀한 시간을 내어 달라고 해도 되는 걸까. 응석을 부리는 게 아닐까.

    “아르칸젤로어를 알려 달라고?”

    아르밀라의 요구에 리카르도가 작게 중얼거렸다. 짙은 시선이 맑은 얼굴에 와 닿았다.

    “그래, 그걸로 되겠나?”

    “네, 충분…… 아!”

    리카르도에게 대답하던 아르밀라는 순간 다리에 힘을 잃었다. 너무 긴장을 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휘청이자, 그가 손을 뻗어 잘록한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단단한 힘이 아르밀라를 받쳐 넓은 품으로 끌어당겼다.

    리카르도의 품에 안기게 된 아르밀라는 그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공작의 얼굴에 희미하게 혼란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혼란의 빛이, 아르밀라에게는 희망으로 다가왔다.

    아르밀라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자를, 이곳의 주인이 예를 갖춰 대해 주고 있었다. 포근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치료를 해 주고, 응석을 받아 주며.

    * * *

    그날 이후, 아르밀라의 단조로운 일과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저녁에 그와 집무실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아르밀라는 서재의 책상에 앉아 연습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리카르도의 단정한 글씨로 ‘아르밀라’와 ‘리카르도 비토레’가 써진 연습지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리카르도는 원래 아르밀라의 이름만을 연습지에 적어 주었다.

    그러나 아르밀라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리카르도에게 부탁해서 그의 이름을 적는 법을 배웠다.

    “리카르도…… 비토레.”

    짙은 분홍색 입술 사이로 달콤하고 부드럽게 리카르도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르밀라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려 보고는 발그레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고서는 집중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꽤나 열심이시군요.”

    몇 장의 연습지를 채웠을까 싶을 때. 서재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리며 등장했다. 아르밀라는 문을 열고서 나타난 자를 보며 환하게 얼굴을 밝혔다.

    “나시르.”

    나시르라고 불린 자는 문가에 서서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는 아르밀라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제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이것 보세요. 제법 많이 늘지 않았나요?”

    아르밀라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나시르에게 손짓을 했다. 나시르는 그제야 발길을 움직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외알 안경을 신중하게 손끝으로 들어 올리며 필체를 확인했다.

    “그렇군요. 글씨체가 안정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연습을 열심히 하시는군요.”

    “고마워요.”

    아르밀라는 칭찬에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나시르는 리카르도의 보좌관으로, 주인의 명에 따라 짬짬이 아르밀라의 진도를 살펴 주고 있었다.

    그는 리카르도와 아르밀라의 사이를 의심하는 다른 사용인들과는 달랐다. 그는 둘 사이를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여 아르밀라에게도 전혀 편견 없이 다가와 주었다.

    언젠가, 아르밀라가 나시르에게 소문을 신경 쓰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특유의 의뭉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정부를 두기에 전하는 너무도 목석같으신 분이라서요.’

    그 말에 아르밀라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헛소문에 휘둘리지 않고 그녀를 못마땅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아, 여기 이 획은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꺾어야 합니다. 바깥으로 삐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넣어야 해요.”

    아르밀라가 쓴 연습지를 살펴보던 나시르가 세심한 지적을 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똑같아 보이기만 했다.

    “어떻게요?”

    “그러니까…….”

    “이렇게.”

    나시르가 아르밀라에게 글을 써 보여 주려 했을 때였다. 냉기가 훅 끼쳐 온다 싶더니,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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