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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3화 (4/120)

3화

여인은 머리를 감싸며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그리고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마치 미라벨 왕녀의 이름이 통증의 기폭제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으, 읏…….”

고통에 신음하던 여인이 이내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리카르도를 올려다보았다. 진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투명하게 반짝였다.

“아파…… 아파요.”

“그래.”

리카르도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녀가 아픈 이유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온 것이니까.

여인을 응시하던 리카르도의 보라색 눈동자가 이채를 띠고, 그의 손에서 짙은 보라색의 빛이 퍼져 나왔다.

리카르도는 낮게 주문을 외우며 여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붉은 정수리를 보라색 빛이 휘감자, 그녀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거칠었던 호흡이 차츰 잦아들고 침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리카르도는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보며 침대에 눕혀 주었다.

“마수에게 공격을 당했으니 기억을 잃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이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리카르도는 나직이 설명했다. 여인을 산에서 만났을 때,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마수들이 눈더미 속에서 뛰쳐나와 공격한 것이다.

마수를 늘 상대하는 리카르도의 기사들은 능숙하게 대처하였다. 그리고 리카르도도 역시 그들을 지휘하며 상황을 유리하게 몰아갔다.

그러나 등 뒤에서 튀어나온 마수 하나는 미처 살피지 못했다. 검은 그림자가 그를 덮치려 한 그 순간, 이 여인이 리카르도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인 덕에 리카르도는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미처 마수를 피하지 못한 여인은 머리를 크게 다쳤다.

마법으로 응급 처치를 하기는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리카르도는 생명의 은인인 여인을 데려왔다.

비토레가의 주치의는 여인이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눈을 뜨고 멀쩡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저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죠?”

“어디까지 기억이 나지?”

“……추웠어요.”

여인은 아스라이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전 추위 속에서 헤매고 있었어요. 그러다 마수들이 떼로 나타났어요. 그래서 숨었는데. 당신이…….”

더듬더듬 기억을 되짚던 여인이 미간을 찡그리다가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봤어요.”

“……리카르도.”

“네?”

“내 이름은 리카르도다. 이곳 레나토의 주인, 리카르도 비토레 대공이지.”

“대공 전하시군요.”

여인은 리카르도의 소개를 듣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옷차림과 어투에서 신분을 어림짐작했는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대공 전하께서, 위험했어요. 그래서 뛰쳐나갔고. 눈을 뜨니 여기였어요.”

여인은 리카르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다른 건 기억이 나질 않아요. 이름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이름이라는 건 큰 의미가 없다. 남이 불러 주면 그게 이름이 되는 거지.”

“그러면 전하께서는 저를 어떻게 불러 주실 건가요?”

“어떻게 불리고 싶지?”

“글쎄요. 저는…….”

막막해하는 여인에게, 리카르도가 무심히 말했다.

“네 일은 네가 결정해야 한다. 대신 해 줄 사람은 없어. 이름 정도는 네가 지어.”

“그럼……. 아르밀라로 할게요.”

여인은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리카르도는 여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아르밀라.”

아르밀라. 세골린데어로, ‘팔찌’라는 뜻이었다.

* * *

아르밀라는 복도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녀는 창살 사이로 햇빛이 들이치는 것을 바라보며 연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저택에 왔던 첫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첫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레나토에 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 갔다. 그동안 그녀는 매일같이 리카르도에게 마법 치료를 받았다.

리카르도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외출을 했고, 그 후에는 반드시 아르밀라를 찾았다.

처음에는 그가 영지를 둘러보러 나가는 것인가 했다. 하지만 곧 그가 눈산으로 수색을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수색의 대상이 그의 약혼녀라는 사실도.

처음, 그가 약혼을 했다는 얘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그러나 아르밀라는 그런 내색을 할 주제가 안 되었다.

이 저택의 손님이자 군식구이니까.

리카르도의 목숨을 살렸다는 이유로 저택에 머물고 있지만, 사용인들은 그녀를 불편해했다.

아르밀라는 하대하기에는 귀하고, 그렇다고 떠받들기에는 꺼림칙한 사람이었다.

애매한 대접에 가장 난감한 것은 당사자인 아르밀라였다.

리카르도는 그녀를 ‘생명의 은인’으로 취급했다. 가장 좋은 손님용 방을 내어 주고, 따뜻한 드레스를 잔뜩 준비해 주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지도, 존대를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르밀라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리카르도에게 더한 것을 바라는 건 욕심이다. 욕심은,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자에게는 사치였다.

* * *

“아니 그래서, 아르밀라는 대체 뭐야?”

서재를 나온 아드밀라는 복도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하녀의 목소리에 흠칫했다. 그녀는 황급히 옆에 보이는 문 뒤로 들어가 숨었다.

“뭐긴 뭐겠어. 본관의 비앙카 얘기 못 들었어? 밤마다 가주님이 아르밀라의 침실로 가신다잖아. 그거면 얘기 끝난 거지.”

“그럼 그건가? 정부?”

“좋겠다. 나도 가주님한테 한 번만 안겨 봤으면.”

“그래 봤자 미라벨 왕녀님이 오시면 찬밥 신세야. 부러워할 거 없어.”

“하긴!”

캄캄한 방 안으로 들어온 아르밀라는 문에 기대어 하녀들의 말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책을 꽉 틀어쥐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사용인들은 저마다 아르밀라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아르밀라 앞에서는 쉬쉬하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그녀의 귀에 적나라한 소문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살려 주세요.’

리카르도 대신 마수에게 공격당했을 때. 아르밀라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구하려 했던 자에게 도리어 목숨을 애원하며 흐느꼈다.

하지만 그건 살고 싶다는 본능적인 애원이었지, 그에게 달라붙으려는 계산속에서 나온 건 아니었다.

애초에, 리카르도를 외면했어야 했을까.

그를 못 본 척하고, 계속 바위 뒤에 숨어 있어야 했을까.

“또 두통이 왔나?”

책을 움켜쥐던 아르밀라가 인상을 쓰자, 어둑한 방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카르도였다. 아르밀라는 화들짝 놀라 책을 놓쳤다.

“이런.”

어둠 속에서 나타난 리카르도는 그녀가 떨군 책을 가볍게 낚아채었다.

“이런 걸 읽는다고 기억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은데.”

리카르도는 세골린데어로 쓰인 책을 휘리릭 넘기고서 무심히 말했다. 아르밀라는 몸에 딱 맞는 정복을 갖춰 입은 그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넓게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근육질의 몸에 잘 어울리는 남색 정복에 은색 단추가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거기다 크라바트까지 완벽히 맨 모습이 어딘지 금욕적으로 보였다. 짙은 라일락빛 눈동자는 또 어떤지. 보고 있으면 빠져들 것만 같았다.

하녀의 말마따나, 리카르도는 여자라면 안겨 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남자였다.

‘정신 차려.’

아르밀라는 치맛자락을 거머쥐었다. 리카르도는 자신을 보살펴 주는 은인이다. 은인에게 안기고 싶다니, 게다가 그에게는 약혼자도 있지 않은가.

“오늘도 왕녀님을 찾으러 다녀오셨나요?”

“그래. 오늘도 헛걸음이기는 했지만.”

아르밀라는 그의 대답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의무 때문이라지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는 걸 보면 미라벨 왕녀와 그 사이에 뭔가가 있을 것이다.

연정 같은. 그런 달콤한 것이.

줄곧 피해 왔던 생각을 마주하게 되자, 아르밀라는 이 자리를 뜨고 싶어졌다. 더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에게 짤막하게 고개를 숙이고서 몸을 틀었다.

‘아직 밖에 하녀들이 있을까?’

문고리를 잡고 나가려던 아르밀라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가 가만히 서 있자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지?”

“……못 나가겠어요. 지금 여기서 나가면 또 소문이 날까 봐서요.”

“무슨 소문.”

“제가 대공 전하의 정…… 정부라는.”

정부, 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아르밀라의 볼이 뜨거워졌다. 그녀가 입술을 꾹 깨물자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혀가 그딴 소리를 나불거리지? 잘라 내야겠군.”

“아뇨, 그러지 마세요.”

아르밀라는 황급히 말했다. 리카르도는 매서운 겨울을 닮아 자비가 없고 잔인했다. 경솔히 입을 놀리는 자의 혀를 자르는 것쯤이야 하고도 남았다. 아르밀라는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게 싫었다.

“빌미를 제공한 제 잘못이에요. 제가 하는 일이 없어서 그런 소문이 도는 것 같거든요. 제게 일거리를 주시면 소문도 잦아들지 않을까요?”

“일꾼은 넘쳐 나. 환자까지 일할 필욘 없다. 넌 회복하는 것에만 신경 써.”

“하지만.”

“정 그렇다면.”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세골린데의 국경 지도를 그려 주든가.”

“그건…….”

아르밀라는 뜻밖의 제안에 입을 벙긋거렸다.

대륙 전체의 지도가 있지만, 각 나라의 국경 지역만큼은 대략적으로 그려져 있다. 보안상의 이유에서다.

특히나 세골린데의 정보는 극비였다. 세골린데는 날이 좋고 토양이 비옥하여, 모든 나라가 탐을 내기 때문이다.

아르칸젤로는 세골린데의 험준한 국경 지역을 파악하지 못해 정복을 포기하게 되었다.

황제는 그 대신에 세골린데와의 평화 협정을 제안했다. 세골린데에서 나는 축산물을 파격적인 가격으로 수입하는 대신에 정복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언뜻 보기에 세골린데가 아르칸젤로에 공물을 바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세골린데와 협정을 원하는 나라는 무수히 많다. 아르칸젤로는 그들 중에서 간택된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황제는 그 협정을 견고히 할 명목으로 리카르도와 왕녀의 혼인을 추진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혼인이 유명무실해진 탓에 양 국가 간의 평화 협정도 위태로워졌다.

하여 지금 아르칸젤로의 국경 지역인 레나토를 맡은 리카르도는 골치가 아팠다. 하루빨리 왕녀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할 텐데 그조차도 쉽지 않아서다.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군.”

리카르도는 실소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그렇지.

지형이야 어설프게 그린다 쳐도, 그뿐. 그녀가 그린 지도가 실효성이 있을지조차 불확실하다.

“못 들은 걸로 해라.”

아르밀라는 등을 보이는 리카르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치마를 움켜쥐고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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