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69화 (69/70)

특별 외전 5화

왠지 불안한 마음이 됐다. 저번에도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니 누리가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누리가 저 길을 걸어오는 모습을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누리가 일하는 중국집으로 향했다. 문을 닫은 중국집의 유리문에는 ‘휴가’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갑자기 이 세상에서 내가 알고 있던 존재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옷깃에 스미는 바람은 선선한데, 속은 계속 뜨거웠다. 김누리 왜 안 와. 그런 말을 되뇌다가 새벽 4시가 되어갈 즈음 집으로 갔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이 방에 다녀간 누리가 자꾸 생각났다. 문 너머에도 온통 누리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부엌 식탁에 앉아 밥을 먹던 김누리, 거실 탁자 위에 엎드려 자던 김누리.

핸드폰을 들어 통화 목록을 열었다. 누리의 이름이 제일 윗부분에 남아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다시 통화를 연결했다.

―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오며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불규칙적으로 진동했다.

내일이면 올까.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할머니한테 걸렸다고, 망했다고, 그런 말을 하면서 툴툴거릴까. 아니면 눈물을 글썽이려나. 뭐라도 좋으니 네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김누리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담임은 홍차연이 전학을 갔다고 했고, 김누리가 머물던 집은 아무도 오가지 않은 듯 모든 물건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거기에서 사라진 거라고는, 김누리뿐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났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무런 언질도 없이 가버린 김누리의 속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왜 매번 나만 너한테 이렇게 마음을 쏟고 전전긍긍해야 하는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김누리가 좋아하는 반찬 하나에 온갖 기억이 줄줄 엮여 나온다.

어묵볶음이 나오는 날이면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김누리. 급식실 구석에 박혀서 열심히 밥을 먹던 모습과 내 옆에 앉아 투덜거리며 숟가락 위에 반찬을 올려주던 모습, 입술에 잔뜩 설탕을 묻히고 있던 모습까지.

“전학을 갈 거면 간다고 말이라도 좀 해주지. 진짜 서운하다. 안 그러냐? 그래도 나름 친하게 지냈는데. 나름이 뭐야, 존나 친하게 지냈지.”

남윤수가 조잘거렸다.

“며칠 못 봤다고 은근 보고 싶네.”

“그만 말해.”

눈을 내리깐 채 말하자 목소리가 잘 안 들렸는지 남윤수가 “뭐?” 하고 물었다.

“걔 이야기 그만하라고.”

앞에서 남윤수가 김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목이 꽉 막혔다. 여러 날의 김누리가 스쳐 지나갔다. 염병할, 어묵볶음을 보는데 코끝이 찡해지는 건 뭐냐고.

“야, 너 울어?”

남윤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김찬영이 말없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안, 운다고.”

말이 토막토막 잘려 나갔다.

“우는데?”

김찬영이 남윤수에게 눈치 챙기라고 작게 내뱉는 말소리가 들렸다. 보진 않았어도 분명 남윤수는 소리를 죽여 헐, 미쳤다, 울어, 하며 나를 놀리고 있겠지. 개새끼….

아, 대체 왜 우냐. 쪽팔리게. 그렇게 생각하며 눈물을 삼키는데도 눈가가 자꾸 홧홧하고 코끝이 매웠다. 시발, 그러니까 김누리가 너무 보고 싶은 거다.

그대로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급식실에서 이러고 있느니 차라리 어디 처박혀서 혼자 대성통곡하는 게 낫다.

“야! 임석영!”

뒤에서 남윤수가 빽 소리를 지르며 나를 불렀다. 코를 찡그리며 급식실을 나섰다. 김누리가 버스에서 왜 그렇게나 코를 먹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

김누리가 사라지고, 그러니까 홍차연이 전학을 가고 많은 일이 있었다.

강은호가 강제 전학을 갔다. 그 과정에서 동급생을 대상으로 진행된 설문조사와 상담이 있었는데 김찬영이 제가 겪은 많은 사건들을 진술했다.

남윤수는 열을 올리며 강은호를 욕하는 동시에 김찬영에게 그걸 왜 이제 말하느냐고 했지만 김찬영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남윤수의 울분에 못 이겨 미안하다고 입을 연 김찬영은 몇 마디를 더 이었다.

“너희한테 피해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나 때문에 생기부 엉망 되면 그 책임 다 어떻게 지라고.”

“미친! 그게 뭐 대수라고. 어이가 없네.”

차마 더 심한 욕은 못 하고 아, 강은호, 죽여 진짜, 하고 이를 가는 남윤수를 보며 김찬영이 말했다.

“버틸 만했어. 졸업하면 끝이니까 그때까지만 잘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최근에 알게 됐어. 누군가 오래 숨기고 있던 불행을 뒤늦게 알게 되는 기분이 얼마나 별로인지. 그 시간 내내 목격자였는데도 목격한 모든 부분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게….”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을 잇던 김찬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봤다. 그때 마주친 김찬영의 눈빛이 묘했다. 너도 그렇잖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남윤수를 먼저 보내고 김찬영과 둘이 걸었다. 김찬영은 남윤수가 홍차연의 정체를 알게 되면 배신감에 눈이 뒤집힐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고 있었는데도 함구한 우리 둘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런데 그건 김누리의 비밀이었고, 비밀을 공개할 권한은 오직 김누리에게만 있었다. 김찬영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남윤수에게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걸 우연이라고 해야 하는지, 인연이라고 해야 하는지. 강은호가 전학을 간 학교에 홍차연이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시비를 거는 강은호에게 홍차연이 “너 집에 돈 많아?”라고 했단다.

“가진 거 개뿔도 없어 보이는데 주먹 아껴라.”

“이 새끼가 돌았나.”

그렇게 강은호의 손이 먼저 날아가고, 뺨 한 대를 맞은 홍차연은 입술이 터졌단다. 그 뒷이야기는 아직 소문이 안 돌아서 듣지 못했다.

처절하게도 싸웠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된 나와 김찬영은 동시에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니, 하며 혀를 찼고, 남윤수는 열을 내며 홍차연의 학교에 찾아가자고 했다.

김찬영과 내가 싫다고 하자 의리 없는 새끼들! 하고 홱 걸음을 돌렸다. 불안한 마음에 며칠간 남윤수가 집에 제대로 들어가는지 감시했으나, 이 새끼가 혼자 몰래 홍차연 학교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남윤수가 김찬영과 나에게 번갈아가며 전화를 했다. 욕을 퍼부었다. 홍차연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자기가 친하게 지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틀림없었다.

결국 밤 11시, 남윤수의 성화에 못 이겨 편의점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먼저 온 김찬영이 피곤한 얼굴로 딸기 우유를 쪽 빨아 마시고 있었고, 남윤수는 나를 보자마자 배신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새끼가 멀대같이 큰 새끼도 찾아온 적 있다던데. 그거 너지?”

남윤수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김누리가 있는 곳을 알까 싶어 찾아간 적이 있었다. 묘하게 닮은 얼굴에 순간 말을 잃었으나, 교문 앞에 세워진 차에 올라타려는 통에 후다닥 달려 녀석을 붙잡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홍차연의 눈은, 뭐랄까. 생기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 김누리 어디 있는지 알아?”

조금 치켜뜬 눈으로 나를 보던 녀석이 무표정하게 시선을 돌리며 뒷좌석 안으로 가방을 던져 넣었다.

“돈도 안 받고 도망간 애를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탁, 문이 닫혔다. 뭐라고 더 쓴소리를 뱉고 싶었는데 김누리와 닮은 얼굴에 말이 잘 안 나왔다. 남윤수는 벌레 보듯 자신을 흘겨보고 차를 타고 떠난 홍차연을 황망하게 바라봤다고 했다.

“시발, 그러니까, 너희 둘은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와아! 나는 너희한테 뭐야? 어? 걔는 어떻게 나한테만 말을 안 할 수가 있어?”

“누나 미용실에 와서 알게 된 거라니까.”

“등에 업었는데 중요한 그게 없어서 알게 된 거라고.”

“억울해!”

그날 남윤수에게 초코 우유, 라면, 샌드위치, 삼각 김밥과 각종 과자를 사다 바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편의점을 나와 걷는 길, 남윤수가 물었다.

“그래서 걔 진짜 이름은 뭔데?”

남윤수와 나 사이에서 걷고 있던 김찬영이 시선을 올렸다. 두 사람을 쳐다보는데 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약하게 머리칼이 나부끼는데, 기억이 스치는 것처럼 또다시 여러 순간의 김누리가 주르륵 지나갔다.

두꺼운 교복을 껴입고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굴리던 김누리. 달릴 때마다 머리카락이 붕 솟았다가 가라앉는 모양새가 이상하게 사람 눈길을 끌었다. 머리도, 얼굴도, 눈도 동그란 게, 동그란 공을 굴리고 있으니 눈이 간 건가.

가끔 그 동그란 눈에서 동글동글한 눈물이 뚝뚝 떨어지던 모습. 내가 싫다는 말을 뱉었던 입술과 또 그 반대로 내가 좋다는 말을 뱉었던 입술. 늘 그 입술에 내 입술을 맞대고 싶었다.

김누리와 남윤수, 김찬영과 함께 포장마차 앞에 서서 어묵을 먹고 떡볶이를 먹었던 날들.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버스를 기다리던 시간과 취향을 파악할 수 없는 김누리의 엠피스리 노래 목록.

김누리의 부재를 느끼는 지금, 가장 그리운 건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떨렸던 순간이 아니라 그냥 내 시야에 김누리가 들어찼던 평범한 하루다.

체육 대회 날, 개수대에서 등목을 하고 일어났을 때 바로 계단에 앉아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는 김누리를 발견했을 때처럼.

“아무도 모르는 거야? 걔 이름?”

남윤수가 말했다.

늦은 시간,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길목에 서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리.”

그 말소리가 꼭 ‘우리’처럼 들렸다. 너와 나를 포함하는, 그 모든 말.

*

“이제 그만 연락하면 안 돼요?”

남자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누리 어디 있는지 알고 있잖아요. 그날 같이 간 거 다 봤는데.”

김누리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중국집에 찾아갔다가 연락처 하나를 받았다. 사장님은 누리의 소식에 대해서는 모르고 같이 일하다가 그만둔 사람에게 전해 들은 게 다라고 했다. 그 사람의 연락처였다. 전화를 하니 받았다가 누군지 밝히자 바쁘다며 끊어버렸다.

모르는 사람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며칠을 잘 참았는데, 잠을 못 이루고 컴컴한 천장만 보고 있으면 온갖 생각이 다 들어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늦은 시간에 참지 못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부탁이에요 누리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끈질긴 구애 끝에 드디어 그 사람이 나를 만나준 거였다. 약속 장소에 나오고 보니 김누리가 친하다고 했던 그 오빠였다. 재민이라는.

“아,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그래요.”

남자가 눈썹 끝을 매만졌다.

“저 요즘 잠도 잘 못 자요. 걔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잘 지내는지도 모르고. 이게 얼마나 숨 막히는 일인 줄 아세요?”

“아….”

“빨리 알려줘요.”

남자가 입꼬리를 길게 당기고 꽉 물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기도 주소는 모르고 그날 배를 타고 들어간 섬 이름만 안다고 했다. 그 섬에 김누리가 없을 수도 있는데, 뭔가 한 걸음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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