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68화 (68/70)

특별 외전 4화

이래저래 수행 평가다 뭐다 신경 쓸 일이 많았고, 김윤환을 비롯한 아이들이 누군가 입에 홍차연 이름만 올렸다 하면 열을 내주는 바람에 학교에 돌던 소문은 점점 사그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누리와 나의 사이는 서먹하기만 했다.

“야, 차연이랑 아직도 사이가 그래?”

남윤수의 물음에 “몰라.” 하고 퉁명스레 답했다.

“차연이 그렇게 안 봤는데 존나 칼 같네. 네가 자기 좋아하는 게 어지간히 싫은가 보다.”

“야,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차연이 스타일이 아닌가 봐. 어쩌겠냐. 힘내라, 새끼야….”

위로랍시고 남윤수가 내 등을 툭 친다. 그 타격감에 허, 하는 웃음만 터졌다. 내가 김누리 스타일이 아니라고? 허, 허허, 어이없는 웃음만 난다.

학교에 다다랐을 때 교문 앞에 서 있는 김누리를 발견했다. 가슴팍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었다. 명찰이 없는 모양이지. 걸음을 멈추고 서자 남윤수가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님을 바라보고 계시는군요….”

내 눈길이 향한 곳을 확인한 남윤수가 눈을 휘어 내리고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교문에서 학주에게 걸리면 벌점도 벌점인데 교문 앞에다가 세워두고 벌을 받게 했다. 안 그래도 요즘 애들 이목이 쏠려서 힘들어하던 김누리인데, 저기 서 있다가는 땅 밑 깊은 곳으로 꺼져 버릴지도 모른다.

“야, 너 오늘 그거 가지고 왔어?”

“뭐?”

“너 개멋 부린다고 항상 들고 다니는 거 있잖아.”

뭐지? 하는 얼굴로 눈을 끔벅이던 남윤수가 아! 하며 손뼉을 짝 쳤다.

“있지!”

그러곤 멋 부리고 올 때마다 외면받던 제 모습을 이제야 누군가 알아봐 준다는 기쁨에 냅다 가방을 열어 헤어 왁스를 꺼냈다.

“줘봐.”

멀뚱히 있던 남윤수가 어, 잠깐, 하며 머리를 뒤로 뺐다. 그러나 멀리 가지 못하고 내 손에 머리가 잡혔다.

“야! 뭔데, 잠깐만! 아, 야! 그렇게 떡칠하면 안 된다고!”

남윤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힐끔거리며 갔으나 개의치 않았다.

정성껏 남윤수의 머리를 기름지게 반으로 갈랐다. 학주가 봤을 때 눈이 뒤집힐 정도로.

“야.”

남윤수가 눈을 부라리며 나를 봤다.

“봐주라. 명찰 없는 거 같은데 한번 살려주자, 좀.”

“네가 살리면 되잖아.”

“홍차 쟤가 요즘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내가 끼어들면 눈동자 데굴데굴 굴리면서 불편한 티 팍팍 낼걸. 점수 까이게 그런 짓을 왜 해? 오죽하면 너한테 이러겠냐.”

“나 진짜 어이가 없네….”

남윤수가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내 친구 윤수, 진짜 고마워.”

“존나 없어….”

마음의 준비를 끝낸 듯 고개를 내린 남윤수가 나를 한번 노려보고는 걸음을 뗐다. 저벅저벅,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에 픽 웃다가, 금세 웃음을 지웠다. 어쩐지 지금의 이런 상황이 못내 괴롭다.

*

무너진 선이 복구된 건 수학여행에서였다.

이대로 계속 김누리가 땅을 파고 들어가 동굴 속에 숨어버리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마음을 열어줬다. 열린 문을 향해 냅다 달려가 임석영 거, 임석영 자리, 임석영, 하고 김누리 안에 이름을 여기저기 붙였다.

“나도 너를 지키고 싶어서 그랬어. 너만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분명 그렇게 말했다. 나를 좋아하는 누리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다.

학교가 끝나고 넷이서 칼국수를 먹으러 갔다. 누리의 숟가락 위에 깍두기를 올려줬다가 남윤수에게 욕을 얻어먹었다. 누리에게 눈 흘김을 받기도 했다. 김찬영만 조용히 칼국수를 먹었다.

칼국수를 먹는 내내 김누리가 흘긋 눈을 올려 김찬영 쪽을 봤다. 뭔데. 뭔데 자꾸 찬영이 보냐고….

칼국수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신경이 온통 김누리한테 쏠렸다.

계산을 하기 위해 먼저 일어났다. 남윤수가 배를 두드리며 가게를 나갔고, 김찬영이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영수증을 받고 돌아보았을 때 뭉그적거리며 가방을 챙기는 김누리가 보였다.

“나 화장실 좀 들렀다가 나갈게.”

김누리가 가방 지퍼를 연 채 나를 봤다. 행동이 조금 굼떴다. 먼저 나가 있으란 뜻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문밖에 섰다가, 뭔가 이상해서 빼꼼 안을 들여다봤다.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던 김누리가 가게 벽 앞에 서 있었다. 김찬영이 앉아 있던 쪽의 벽이었다.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을 뜯어내고 있었다.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곤 꾸벅 고개를 숙여 가게 사장에게 감사 인사까지 했다. 뭔데 저래. 김누리가 조심스레 교과서 사이에 사진을 넣었다. 흔들리는 머리가 기분이 최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폴짝거리며 김누리가 밖으로 나왔다.

“가자.”

남윤수가 말했고,

“야, 잠깐만. 나 뭐 두고 왔다. 가고 있어.”

몇 걸음 못 가서 내가 후다닥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곤 바로 사장님을 찾았다.

“사장님, 아까 쟤가 벽에서 뜯어 간 사진 뭐예요?”

“어? 아아, 그거 옛날에 내가 잡지에서 오려놓은 디카프리오 사진.”

“….”

“학생도 팬이야? 저쪽 벽에 한 장 더 있는데, 가져가려거든 가져가.”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가게를 나왔다.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제일 뒤에서 느리게 걸음을 옮기던 김누리가 흘긋 뒤를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자 손을 파닥거리며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이 지구상에서 김누리가 제일 예쁜데. 김누리는 아니란 말인가.

성큼성큼 걸어가 김누리의 옆에 섰다. 걸음의 보폭을 맞추며 느리게 걸었다. 눈동자를 내려 작게 흔들리는 머리를 봤다. 여전히 콩알 같은 머리를.

“홍만두.”

“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정면을 보던 김누리가 고개를 올려다 나를 봤다.

“나 잘생겼지.”

빤히 나를 보던 김누리가 한 박자 늦게 미간을 찌푸렸다.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내가 제일 잘생겼지? 어?”

“왜 이래. 칼국수 잘못 먹었냐?”

고개를 돌리는 김누리의 시선을 계속 끌고자 어어! 소리를 내며 어깨를 잡아 돌렸다.

“아니야?”

“뭐가.”

“너한테 제일 잘생긴 사람, 나 아니냐고.”

김누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봤다. 큰 눈이 깜박깜박 움직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머리를 굴리는 사이 김누리의 입이 열렸다.

“알면서 왜 물어?”

홱, 몸을 돌린 김누리가 걸음을 빨리했다. 달아나듯 멀어지는 김누리의 뒤를 빠르게 뒤쫓았다. 그러곤 김누리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제대로 못 들었어. 다시 말해주면 안 돼?”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는 내가 귀찮다는 듯 김누리가 몸을 밀어냈다. 그럴수록 더 가깝게 붙어 몸을 치대며 속닥거렸다.

“좀 말해주라. 어? 네 입으로 제대로 듣고 싶단 말이야.”

“아아, 진짜 왜 이래.”

김누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내 몸을 막아냈다. 난감한 얼굴을 하고서 앞서가는 남윤수와 김찬영의 뒷모습을 보더니 시선을 돌려 나를 본다.

“진짜 너….”

“그게 그렇게 어려워?”

“아….”

“응?”

입술을 꾹 물고 눈가를 찡그린 김누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잘생긴 건 너무 당연한 거고.”

김누리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여 내렸는데, 이미 두 뺨이 붉어진 후였다.

“나한테 있어서 네가 제일 잘생긴 사람이 맞긴 한데….”

김누리가 뒷말을 늘였다. 내가 말해달래서 입을 연 건데, 예상되지 않는 뒷말에 가슴이 조금 뛰었다.

“그것 때문에 너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김누리의 고개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갔다. 푹 수그린 머리에 정수리만 보였다. 천천히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가슴이 조금 더 크게 뛰었다.

김누리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부스스해지는 머리에 김누리가 고개를 들고 나를 봤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았는데, 그 말이 너무 커서 차마 뱉지 못했다. 김누리는 너무 귀엽고, 이 세상에서는 귀여운 게 모든 걸 이겨먹는다.

*

“야, 진짜 말도 없이 가버렸다고? 전학을? 홍차연 이 새끼, 존나 의리 없는데?”

남윤수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열고는 어묵을 욱여넣었다. 김찬영이 숟가락을 든 채 나를 봤다.

“연락도 안 돼?”

김찬영의 질문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좋은 일 생긴 건가?”

그 물음에는 딱히 내놓을 답이 없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연락도 안 되는 마당에 그날 대체 김누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남윤수는 자꾸 홍차연을 배신자라고 부르며 식판을 비웠고, 김찬영은 다소 느린 수저질을 했다. 나는 식판 한 칸을 채운 어묵만 뚫어져라 봤다. 김누리가 좋아하는 어묵볶음.

셋이서 먹는 급식이 왜 이렇게 헛헛한 건지. 한 사람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잔뜩 당황한 얼굴로 할머니와 함께 가더니, 그 이후로 증발해버린 것처럼 사라졌다.

그날 교문 앞에서 김누리가 할머니와 그렇게 가버린 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누리의 연락을 기다렸다. 마음이 초조했다.

[어떻게 됐어?]

[김눌? 많이 혼났어?]

[상황이 심각한가]

[누리야]

[김누리]

지문이 닳는 줄 알았다. 대화창을 계속 열었다 닫는 일을 반복했다. 밤이 될 때까지 메시지 옆에 붙은 1이 안 사라졌다. 핸드폰을 확인할 수 없는 건지, 일부러 내 메시지만 읽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김누리의 집으로 향했다. 아무리 초인종을 누르고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어, 바퀴벌레를 잡았을 때 알게 된 비밀번호를 눌렀다. 설마 했는데 문이 열렸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이 캄캄했다. 불을 켤 생각도 못 하고 방문을 다 열어봤으나 다녀간 흔적이 없었다. 교복도 없고, 가방도 없었으니까.

아파트 앞에서 김누리를 기다렸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 때마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음성이 넘어왔다.

아, 설마.

낮에 화장실에서 물에 빠져 급하게 전원을 끈 누리의 핸드폰이 떠올랐다. 설마 고장 난 건가. 갑자기 연락이 닿을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초조하게 입술을 씹다가 꺼져 있을 걸 알면서도 계속 전화를 걸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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