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67화 (67/70)
  • 특별 외전 3화

    교실을 나서자마자 보건실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열심히 움직이던 다리가 보건실 앞에서 멈춰 섰다.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커피를 내리고 있는 보건 선생이 나를 돌아봤다.

    “어? 무슨 일이니?”

    “아, 선생님, 저 머리가 좀 아파서요.”

    보건 선생이 다가와 체온을 재고 고개를 갸웃하며 “열은 없는데….” 한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는 통에 시름시름 앓는 척을 했다.

    “조금만 누워 있다가 갈게요…. 선생님한테 허락도 맡고 나왔어요….”

    피식 웃어버린 선생이 종 치면 가라는 말을 남기고 보건실을 나갔다. 닫힌 문을 확인하고 걸음을 뗐다. 몇 발자국 만에 김누리가 누워 있는 침대에 다다랐다.

    커튼을 걷어내자 누워 있는 김누리가 보였다. 잠든 듯 보였는데,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찡그린 얼굴이 평온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았다. 매트리스 위에 팔 하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김누리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마에 손을 올려 열감이 있는지 확인했으나, 딱히 체온이 높은 것 같지는 않았다.

    “많이 아픈가.”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말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정자세로 누워 있던 김누리의 머리가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

    당황했다.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내려 귓바퀴까지 흘러간 눈물을 닦아주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엄지로 누리의 눈꼬리를 쓱 문질렀다. 손가락에 뜨거운 눈물이 묻었다.

    “누리야.”

    손길을 느꼈는지 내내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내 감춰져 있던 눈동자가 드러나고, 누리의 시선이 내 두 눈에 담겼다.

    “꿈꿨어?”

    눈가를 매만진 김누리가 주위를 둘러봤다.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 안 계셔. 아무도 없는데. 이것도 불편해?”

    도르륵, 보건실 내부를 훑으며 굴러다니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가만 눈을 마주 보던 누리가 고개를 저었다. 손을 올려 누리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려져 있던 이마가 드러나며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울어서 놀랐어. 나쁜 꿈이라도 꿨어?”

    어딘지 모르게 김누리의 분위기가 조금 음울했다. 반응이 반 박자씩 느리게 왔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꽉 다물고만 있었다. 그 우울한 눈빛에 왠지 모르게 속이 긁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나쁘기보다는… 무서운 꿈이었어.”

    앞머리를 계속 쓸어올리던 손이 멈칫했다. 손가락 사이에 물려 있던 머리카락이 힘없이 가닥가닥 김누리의 이마를 향해 내려갔다.

    누리가 누리로 살 수 없음에 공포를 견디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석영아, 아까 교실에서… 미안해.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서 그랬나 봐.”

    하얗고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어딘가를 향해 뛰어갔다.

    “석영아, 나를 좋아해주는 건 고마운데….”

    김누리가 잠시 침묵했다. 적당한 말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마음을 거절하기 위해서, 최대한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지금의 나는 네 마음을 받아줄 수도, 네게 마음을 줄 수도 없어.”

    물끄러미 김누리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이마 위에 올리고 있던 손을 거두고 시선을 돌렸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것 같아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가를 매만지며 다시 생각했다. 우리의 적정선은 어디인가.

    김누리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누리와 나 사이에 그 어떤 선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누리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를 좋아해주면 좋겠다. 사람들 앞에서 김누리의 손을 잡고, 몸을 꼭 껴안고, 반듯하고 예쁜 이마에 입 맞추고 싶다.

    “네 마음을 달라는 거 아니야. 그냥 내 감정을 따라간 거지.”

    그렇게 말하는데, 이상하게 우울한 마음이 됐다. 기분이 낮게 꺼지고 파도쳤다. 슬픔이 일렁이며 몸 여기저기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부서지는 것 같았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 그것마저 불편한 거야?”

    팔 하나를 매트리스 위에 올려 턱을 괬다. 상체를 낮게 숙이자 마주 보는 얼굴의 간격이 전보다 좁아졌다.

    다른 한 손으로 김누리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머리카락이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을 간질였다.

    “지금이 아니면 뭐가 좀 달라져?”

    “어?”

    “지금의 너는 내 마음을 못 받아준다며. 지금이 아닌 다른 날에는 뭐가 조금 달라지냐고.”

    김누리의 입술이 조금 열렸다가, 다물어진다. 몇 번 더 달싹이며 말을 머금는 게 보였는데 끝내 뱉지 않았다.

    “대답 안 하네.”

    괜한 심술에 김누리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러다 미끄러지듯 손을 내려 김누리의 눈을 덮었다. 얼굴이 얼마나 작은지, 손바닥 안에 얼굴의 반이 가려졌다.

    “네가 뭘 두려워하는 줄 알아. 어렵겠지만, 네 선 안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내가 노력할게. 네가 꿈에서라도 안 울었으면 좋겠어.”

    김누리의 맑은 두 눈동자를 가린 내 손등을 봤다.

    “너 울리는 새끼는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만약 그게 나면, 네가 나 가만두지 마.”

    시선이 손등에서, 더 아래로 내려갔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잘할 거니까.”

    맞물려 있는 김누리의 입술이 보였다.

    “이제 이 손 좀 치우지.”

    그 입술이 퉁명스러운 말을 뱉고는, 다시 다물어졌다.

    김누리를 생각하면 매번 마음이 조급해졌다. 기다려 달라고 하지 않으면 말도 없이 가버릴 것 같아서, 옆에 있는데도 자꾸 불안했다.

    홍차연의 탈을 쓰고 굴러온 김누리에게는, 이해하고 싶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해 이해할 수 없는 선들이 존재했다. 그 선을 함부로 넘어서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나를 영영 봐주지 않을 것만 같아 벌써 슬픈 마음이 되어버리곤 했다.

    고개를 낮게 숙였다. 그러곤 김누리의 눈을 가린 내 손등 위에 지그시 입술을 댔다. 내게 늘 퉁명스러우면서도 다정한 김누리를 생각하며, 내내 눈길이 가던 김누리의 입술을 떠올리며, 언젠가 누리가 누리로 살아갈 때 맞닿을 수 있는 우리를 상상하며.

    내가 아직은 넘을 수 없는 선 위에, 입을 맞추었다.

    *

    선이 완전히 무너졌다. 김누리를 뒤에서 안고 개소리를 지껄이는 강은호 때문에 눈이 뒤집힌 게 화근이었다.

    학교에 홍차연과 나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제가 대신하고 있는 아이의 안 좋은 소문 때문인지 김누리는 잔뜩 기가 죽은 모습으로 나를 멀리했다.

    화가 나는데, 정확한 대상을 짚어내지 못하는 화였다. 계속 안에서 뭔가가 끓었다.

    학교가 끝나고 강은호를 기다렸다. 마침 교문을 나서는 녀석이 보여 다가갔다.

    요즘 강은호는 붙어 다니던 몇몇 친구들마저 잃은 상태였다. 최근 들어 뭐에 돌아버린 사람처럼 여기저기 시비를 걸고 다닌 덕에 선생 눈 밖에 났고, 주먹질을 잘못한 바람에 강제 전학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시발, 설마 때리려고 기다렸냐?”

    강은호가 나를 보자마자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내가 너냐?”

    강은호를 데리고 학교 옆에 있는 골목으로 갔다. 아무래도 남 신경 더럽게 쓰는 강은호 성격에 애들이 지나다니는 앞에서는 대화가 제대로 안 이루어질 것 같아 그랬다.

    모나게 눈을 뜨는 강은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야, 은호야. 네가 우리 반 전학생을 괴롭혔잖아.”

    “아, 씹…. 또 홍차연 그 새끼 이야기네.”

    “그래, 씹. 그 이야기니까 귀 열고 제대로 들어. 괴롭힘당하고도 아무 말 못 하는 게 좀 짠해서 도와주다 보니까 눈길이 자연스레 갔고, 그러다 보니까 내가 좋아하게 됐어. 그건 네 말이 맞아. 내가 좋아해. 그게 네 말처럼 게이라면 뭐 그런 거고, 뭐라고 생각하든 솔직히 상관없어. 네가 내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고해성사하냐?”

    “자, 그리고 이제 네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 반 전학생 가방 신발 뺏었고, 억지로 입에 담배 물렸잖아. 저번에 김윤환 것도 뭐 훔쳤다던데. 그리고 작년에 수련회에서 김찬영한테 담배 심부름 시켰고, 그거 선생한테 걸렸다고 뒈지게 팼지? 그 일로 윤수가 너 박살 냈다가 교내 봉사만 두 달 했어.”

    “아, 뭐 어쩌라고, 진짜!”

    “찬영이는 우리한테 피해 주고 싶지 않아서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나는 분명 네가 요즘에도 찬영이한테 좆같이 굴었을 것 같아.”

    “아는 것만 말한다며. 봤냐? 네가 봤어?”

    “아니. 못 봤지. 네가 구석진 곳에서만 그 지랄을 하는데. 그래서 학교에서 내리는 처벌이 존나 마음에 안 들어. 눈에 보이는 게 다잖아. 증거 없으면 꽝이고.”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지금 까놓은 것만 봐도 잘못은 네가 한 것 같은데. 왜 전학생이 죄를 지은 사람처럼 다녀야 돼? 네가 진짜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새끼라면 지금 그렇게 두 눈 빳빳하게 뜨고 나를 보면 안 되지.”

    “미친. 네 애인이 시키던? 가서 나 좀 뒈지게 까고 오라고? 그래서 이러냐?”

    헛숨이 터졌다. 앞머리를 쓸어 넘겨 흐트러트리다가 강은호의 멱살을 쥐고 벽에 몸을 밀어붙였다. 등을 부닥친 강은호가 악! 소리를 내지르며 얼굴을 찌푸린다.

    “시발, 너 때문에 애인도 뭣도 안 되게 생겼거든? 마음 같아서는 진짜 뒈지게 패주고 싶은데 누가 주먹질은 하지 말라고 해서 참는 거니까, 네가 가방이고 신발이고 다 뺏어 간 애한테 미안하다고 고개 숙여 인사나 해.”

    “컥, 씹, 놔!”

    멱살을 더 꽉 쥐어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강은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너보다 약한 애들 밟고 올라서서 우두머리 될 생각 말고 진정한 친구를 사귀어, 은호야. 네가 형한테 이유 없이 맞을 때, 같이 분노해주고 위로해주는 친구를 사귀라고.”

    갑자기 강은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드러냄에 변하는 낯빛이 사납다.

    강은호에게는 형이 한 명 있는데, 생모가 다르다고 했다. 그 소문이 퍼진 건 중학교 때였다. 같은 학교에 다녔던 형이 강은호를 마주칠 때마다 불러다가 때렸다고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강은호가 삐뚤어지기 시작한 것이.

    강은호의 눈가가 달아올랐다.

    “너도 들키기 싫은 이야기를 누가 이렇게 꺼내니까 기분 좆 같지? 왜 하나는 알고 둘은 몰라.”

    “닥쳐, 새끼야!”

    “만약 전학 가게 되면 그 학교에서는 좀 예전의 너처럼 지내라. 일부러 이러지 말고.”

    쥐고 있던 멱살을 놨다. 막혔던 숨이 트이는지 강은호가 연신 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다 눈가를 쓱 쓴다. 새끼, 은근 눈물이 많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