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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외전 2화
[나 오늘 빨리 일어나서 먼저 학교 간다]
씻고 방에 들어왔을 때 누리에게 메시지가 왔다. 엇, 미친.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내팽개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교복을 입고 가방을 챙겨 든 뒤 후다닥 집을 뛰쳐나갔다.
구겨 신은 운동화를 엘리베이터에서 정리한 뒤 정류장을 향해 달렸다. 다행히 아직 버스에 오르지 않은 김누리가 서 있었다.
“오? 너 왜 이렇게 빨리 나왔어?”
몇 분 더 빨리 나왔을 뿐인데 새벽 공기가 찼다. 조금 벅찬 호흡을 꾹꾹 누르며 엷게 웃었다.
“준비 다 했으니까 나오지.”
아아, 하며 김누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빨리 나온 시간이 무색하게도 버스가 늦게 왔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원래 가던 시간과 얼추 비슷했다.
휘적휘적 팔을 흔들며 교문을 지나가는데 학주에게 붙잡혔다. 정신없이 나오는 바람에 타이를 놓고 나왔다.
가만 서서 나를 보던 김누리는 기다려줄 생각이 없는 듯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진짜, 완전 매정해. 귀가 잡혀 올라가는데도 두 눈은 김누리의 뒷모습을 좇았다.
“아! 선생님! 아픕니다!”
엄살을 피우며 용서를 구하는데 김누리가 걸어가던 풍경에 김찬영이 등장했다. 아, 젠장?
거리가 가까워지더니, 둘이 마주 보고, 인사?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저 둘 사이로 달려가야 한다.
“선생님, 제가 진짜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타이를 오다가 흘린 거 같은데, 진짜, 저의 부주의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학주를 보던 눈이 힐끔 뒤로 넘어갔다. 김찬영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김누리의 신발 끈을 묶어주고 있었다. 아, 저건 도저히.
“내일 세 배로 맞을게요. 네 배로 때리셔도 됩니다. 선생님, 진짜 죄송해요!”
몸을 뒤로 틀어 학주의 손에서 벗어나 달렸다. 하마터면 학주 앞에서 욕을 할 뻔했다. 뒤에서 학주가 내일 다섯 배로 갚아준다고 소리를 질렀다.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건, 김찬영이 김누리의 신발 끈을 묶어주고 있다는 거니까.
“김찬영, 옐로카드 한 장.”
둘 사이에 끼어들어 말했다. 그러자 김찬영이 웃는다. 어쭈? 나 지금 완전 진심인데?
“야, 웃지 마. 한 경기에서 옐로카드 두 장이면 퇴장이거든?”
“아, 그래?”
“응. 그래.”
둘 사이에 딱 끼어서 계단을 올랐다. 왼쪽에 김찬영을, 오른쪽에 김누리를 두고. 마음 같아서는 한 팔을 김누리의 어깨 위에 올려 꽉 감싸 안고 가고 싶었지만, 김누리가 얼마나 오만상을 쓰고 죽일 듯이 노려볼지 알기에 참았다.
진짜, 이 수많은 남자들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귀여운 너를 지켜만 봐야 하는 내 마음을 네가 아느냐고….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다.
“나 너한테 화단 같은, 그런 거 되고 싶어.”
네가 내 안에 뿌리내리고 그게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영영 떠나지 않으면 좋겠다.
귀가 터지는 줄 알았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름 진지하게 뱉은 고백이었는데, 김누리 입에서는 장난하지 말라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야기가 오희진으로 샌다.
“오희진?”
“아, 그래. 너 걔랑 뭐 있는 거 아니었어?”
김누리가 오희진을 어떻게 알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르륵 굴러가는 김누리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얼굴을 보는데 묘한 웃음이 걸렸다.
“…뭐, 왜.”
“나 오희진 안 좋아하는데.”
누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좋아하잖아? 그럼 그 사람이 엄청 궁금하다고. 막 알고 싶고.”
과외 하며 배운 것 중 가장 좋은 배움이라는 것을 지금 이 순간 깨닫는다.
“나 너 좋아해.”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나는 이제 정말이지, 너에 대한 마음을 조금도 숨길 수가 없다.
그리고 역시나 그 마음이 숨겨지지 않았나 보다.
“네가 차연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윤수가 그러더라.”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김찬영이 말했다. 흘긋, 뒤를 돌아보자 김누리에게 뭐라고 속닥거리고 있는 남윤수가 보였다. 김누리의 얼굴이 영 별로인 게, 헛소리를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 김찬영을 봤다.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는데?”
“아무 말 안 했어. 눈치 없는 남윤수가 저럴 정도인데 너도 좀 정도껏 티 내.”
걱정하는 투였으나 전적이 있는지라 그 말이 곱게 안 들렸다. 대답 없이 보고만 있자 김찬영이 눈을 맞추다가 찌푸렸다.
“아, 왜 그렇게 봐?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기는. 상황이 이런데, 너 같으면 티를 안 내게 생겼냐. 내가 진짜 말은 안 해도 마음이 존나 조급하다고.”
“얼굴에 다 써져 있어. 조급하다고.”
“진짜?”
김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김누리 좋아하는 게 티가 나나. 괜히 손을 올려 뺨을 쓸었다.
*
두 팔을 벌린 나를 보고 김누리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숙제를 뒤로한 채 노트북을 들고 침대에 앉았다. 인터넷을 열고 영화 이름을 검색했다. 타이타닉.
핸드폰으로 영화를 결제하고 베개 하나를 등 뒤에 놨다. 자세를 잡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다리 위에 노트북을 올리고 앉아서 보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노트북을 침대 위에 올려두고 누워서 봤다. 조금 슬프긴 했으나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김누리는 대체 이렇게 오래전에 나온 영화를 어떻게 알고 본 거야.”
영상을 끄고 관람객 평점을 건성으로 내리읽었다. 별 다섯 개의 평점이 줄줄이 이어지는 가운데, 손가락이 마우스 패드 위에서 멈칫했다.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 10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ㅠㅠ 인생 영화 디카프리오 존잘 rlas****]
뒷부분이 가려지긴 했으나 ‘김ㄴ’으로 끝난 아이디가 아무리 봐도 김누리 같았다. 벌게진 눈을 하고서 돌돌 만 휴지를 손에 쥐고 코를 풀며 영화를 보는 김누리를 상상했다.
“우는 거 보고 싶다.”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누리가 슬픈 건 싫은데, 울 때 찡그리는 미간이 귀여워서.
인생 영화라니 한 번 더 봐볼까. 손가락을 까닥였다.
영화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5분도 지나지 않아 영상을 끄고 구글에 들어가 디카프리오를 검색했다. 이미지 카테고리로 넘어갔다.
주르륵, 스크롤을 내리며 김누리가 존잘이라던 디카프리오의 사진을 봤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그가 뒤죽박죽 이미지 창을 채웠다.
그러다 로미오 역할의 디카프리오 사진을 보게 됐다. 순간 얼굴이 굳고, 묘한 감정이 일어났다.
“짜증 나게 잘생겼네….”
왠지 모르게 심기가 뒤틀려 인터넷 창을 모조리 닫고 노트북을 껐다. 디카프리오 존잘, 하는 김누리의 음성이 귓가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죽기 전까지 실제로 만나보지도 못할 사람을 질투하게 될 줄이야. 어이가 없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며칠 뒤, 나름 평온하게 흘러가던 일상에 균열이 생겼다. 누군가 김누리를 찾아왔다.
“저 사람 꼴을 봐.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 내가 너를 그냥 보내줄 것 같냐.”
“홍차연 집에 가는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홍차연?”
홍차연, 홍차연, 이름만 들었는데 막상 그 집에서 보낸 차와 기사를 보자니 속이 조금 뒤집혔다.
“같이 갈까?”
“미쳤냐.”
마음 같아서는 얼마나 나약한 새끼가 이런 식으로 학업을 유지하는지 그 면상을 뚫어져라 보고 싶었는데, 그게 또 김누리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을까 싶어 관뒀다. 뭐, 관두지 않았다고 해도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그렇게 누리를 보내고 집으로 혼자 돌아오는데 마음이 심란했다. 걸음이 김누리가 사는 아파트 동으로 향했다. 앞을 서성이다가 캐노피 아래의 계단에 앉아 누리를 기다렸다.
해가 넘어가는데도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 창만 열었다가 닫고, 통화 목록을 열었다가 닫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초조했다.
어둠이 내리며 불안이 극도로 커질 때였다. 저 멀리서 김누리가 돌멩이 하나를 툭툭 발로 굴리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안도감이 밀려드는 동시에 작게 불만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전화한다더니.
콩알 같은 머리가 길을 걷는 내내 바닥을 바라봤다. 돌멩이를 따라 움직이는 걸음이 좌로 우로 방향을 여러 번 틀어가며 직진하는 일을 계속했다.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열이 오르는데, 김누리가 내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
“친구끼리 뭐 어때. 먹다 뭐 묻으면 닦아줄 수도 있지. 그게 이상해?”
“그게, 나는 좀 불편해. 그러니까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마.”
김누리의 입에 묻은 햄버거 소스를 닦아주다가 분위기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튀었다.
누리가 발을 굴려 의자의 거리를 벌려 제자리로 가버렸다. 떨어진 분단의 간격만큼 김누리와 거리가 멀어졌다.
이상하게 표정 관리가 안 됐다. 누리의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닌데, 이렇게 선 긋기를 당할 때면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네가 불편하다고 하니까 안 하겠는데.”
어깨동무를 하거나 눈을 마주 보는 일, 함께 있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굴 때가 있는가 하면, 지금처럼 작은 행동 하나에 질색하며 예민하게 굴 때가 있었다. 그런 김누리의 표정을 마주하게 될 때면, 그게 거짓일지라도 상처가 되곤 했다.
“애매한 거 알지? 네가 말한 거.”
선이 없었으면 좋겠는 나와, 선이 필요한 김누리. 대체 우리의 적정선은 어디일까.
쉬는 시간, 김누리가 이어폰을 손가락에 돌돌 말고 손을 따려고 하고 있었다.
“너 뭐 해?”
“아, 체증이 있어서.”
“그럼 보건실을 가야지, 왜 그러고 있어?”
얼굴이 창백하진 않은데, 아까 먹은 햄버거가 얹힌 모양이다.
“보건실 갔다 와.”
꾸물꾸물 이어폰과 함께 책상 아래로 떨어지는 김누리의 손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생각해보면 무슨 일이든 혼자 끙끙 앓으며 돌파구를 찾는 게 김누리다. 돌파구를 찾거나 숨거나, 혼자 삭히거나.
“너 얼굴 안 좋아. 선생님한테는 내가 말할게.”
의자 아래에서 덜렁거리는 이어폰을 보고 있자니 내가 누리에게 너무 욕심을 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 말은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걸. 뒤늦은 후회를 했다.
수업 시간에도 비어 있는 옆자리를 멍하니 봤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책상에 김누리의 흔적이 여기저기 묻었다. 항상 옆에서 상모를 돌리며 자던 녀석이 없자 마음이 허했다.
손을 뻗어 책상 위에 있는 교과서를 가져왔다. 교과서 겉면에 누리의 이름이 아닌 홍차연의 이름이 써져 있었다. 그 이름을 보는데 긴 한숨이 샜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매만졌다. 누리가 누리로 살 수 없음에 겪게 되는 일들을 차마 상상할 수 없어서, 보건실에 혼자 있을 누리가 미친 듯이 보고 싶어서, 번쩍 손을 들었다.
“선생님, 저 배가 너무 아픈데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