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65화 (특별 외전) (65/70)
  • 특별 외전 1화

    책상에 앉아 숙어를 달달 외우는데 눈꺼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느리고 더뎠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연필을 놓고 그대로 엎드렸다. 그렇게 잠들었다가 눈을 뜨자 목이 고장이 난 것처럼 뻐근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구석에 놓은 탁상시계에 시선을 돌렸다. 새벽 1시. 피곤해서 잠깐 눈만 붙인다는 게 이렇게나 오래 퍼질러 잘 줄은 몰랐다.

    “아, 그냥 때려치우고 침대에 누워 잘걸.”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났다. 더럽게 피곤해도 안 씻고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에 취해 곧 쓰러질 사람처럼 욕실로 들어갔는데, 샤워를 하고 나오니 죽어도 안 물러날 것 같던 잠이 깼는지 정신이 맑기까지 했다.

    대충 로션을 바르고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을 챙겨 침대에 누웠다. 스탠드 조명이 은은하게 방을 밝혔다.

    한쪽 얼굴을 베개에 묻고 습관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열었다. 몇 시간 사이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가 수두룩하게 쌓였다. 평소보다 많은 개수에 무슨 이슈가 있나 했는데, 남윤수의 헛소리뿐이었다.

    “아니, 이럴 거면 그냥 찬영이랑 갠톡 하면 안 돼?”

    처음에는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읽어보다가 나중에는 엄지를 쑥쑥 움직여 대화창을 흘려 넘겼다.

    게임 이야기가 반이었고 중간중간 남윤수의 야식 메뉴 고르기, 사고 싶은 옷의 색상 정하기, 보이스 피싱을 당할 뻔한 이야기 등이 있었다.

    전혀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내용들. 김찬영은 진짜 재미있어서 들어주는 건가. 대답은 또 꼬박꼬박 잘 해준다. 영혼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들어온 메시지를 모두 읽음 처리 하고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남윤수가 ‘나 너희랑 찍은 사진 인스타에 올렸는데 봤음?’ 하고 보낸 카톡이 생각나서였다.

    들어가자 앱 하단부에 있는 하트에 두 자리 이상의 숫자가 떴다. 새로 올린 게시물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다.

    “뭐지?”

    손가락을 움직여 활동 탭으로 들어갔다.

    [rlasnfl1004 님이 회원님의 사진을 좋아합니다. 3시간]

    [rlasnfl1004 님이 회원님의 사진을 좋아합니다. 3시간]

    [rlasnfl1004 님이 회원님의 사진을 좋아합니다. 3시간]

    누구인지는 몰라도 ‘rlasnfl1004’가 찍은 하트만 열일곱 개였다. 인스타에 업로드 한 게시물이 열일곱 개이니 모든 사진에 ‘좋아요’를 누른 거였다.

    “뭐야, 이 프사도 없는 놈은.”

    종종 외국인이 나이스 하다거나 큐트 보이 같은 댓글을 이모티콘과 함께 남기고는 했다. 이런 계정주는 대부분 팔로잉만 200명이 넘고 팔로워와 게시물이 하나도 없었다.

    툭, 화면을 두드려 계정을 이동하니 역시나 예상 그대로였다.

    게시물 0, 팔로워 0, 팔로잉 0.

    “아무것도 없네.”

    금세 싱거운 마음이 들어 계정을 나왔다. 피드를 훑으며 남윤수가 올린 사진을 찾는데 활동 탭에 하트가 하나 떴다. 눈동자가 자연스레 하트에 박혔다.

    이 시간에 누가?

    활동 탭에 들어가자 얼굴이 조금 찌푸려진다.

    [rlasnfl1004 님이 회원님의 사진을 좋아합니다. 1분]

    “…뭐 하는 새끼야, 대체?”

    세 시간 전에 ‘좋아요’를 누른 사진에 또 ‘좋아요’를 눌렀다. 대체 그 사진이 뭔가 하고 확인해봤다.

    며칠 전에 건물을 나오다가 올려다본 하늘이 비현실적으로 청명했다. 쨍하게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있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파랑에 바로 누리가 생각났다.

    좋은 것을 인식하는 감정이 요즘 계속 누리에 의해 움직였기 때문일까. 콩알 같은 김누리가 구름 위에서 낚싯대를 들고 앉아 두둥실 흘러가고 있을 것만 같았다.

    김누리가 나를 낚았으면. 누리가 구름 위에서 내린 미끼를 입을 벌려 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낚싯대에 이끌려 따라가고, 어? 뭔가 걸렸다! 하며 김누리가 줄을 감아올리면 기다렸다는 듯 다가가는 거다. 안녕, 누리야. 네가 나를 잡았어.

    아, 진짜 미쳤냐고. 그렇게 툴툴대면서도 기분이 왠지 모르게 들떠 누리처럼 맑은 하늘을 사진 찍었다. 그리고 인스타에 올렸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 네 생각이 났어]

    느끼하고 오글거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냥 이런 데서라도 티를 내고 싶었다. 어차피 김누리는 이런 거 하지도 않으니.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곧바로 메모장을 열고 영문을 한글로 입력해봤다. r, l, a, s, n, f, l. 입력한 영문은 이것이었고, 그 결과 만들어진 한글은.

    “…김누리?”

    두 눈이 동그래졌다. 뭔가 잘못 입력했나 싶어 몇 번을 더 확인하고 다시 입력해봤다. 누리, 김누리다. 김누리 천사.

    “하….”

    한숨 같은 웃음이 샜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아무것도 없는 누리의 계정을 보다가 내 계정의 활동 탭으로 넘어왔다.

    [김누리 님이 회원님을 좋아합니다.]

    모르겠다. 누리가 사진에 하트를 때려 박으며 뜬 알림이 그렇게 보였다. 참는데도 피식피식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하, 하고 웃다가 괜히 표정을 갈무리하고 알림을 뚫어져라 봤다.

    뭐야? 그러니까 김누리가 내 인스타 계정을 검색해서 온 거야? 심지어 열일곱 개 게시물을 전부 확인했다는 증거가 확연하고.

    내가 아는 김누리라면 분명 이 하트가 뭘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가장 기분이 좋은 건, 김누리가 하트를 박은 게시물에 다시 하트를 박았다는 거였다. 이 시간에 잠도 안 자고 또 들어온 거 봐.

    “미치겠네.”

    머리를 쓸어 올렸다가 뺨을 감쌌다. 얼굴이 뭔가 후끈한 것 같기도 하고.

    혹시나 나중에 남윤수의 댓글 테러로 김누리의 아이디가 저 멀리 사라져 버릴까 싶어 해당 화면을 캡처했다. 화면 가득 누리의 흔적이 남았다.

    “김누리 뭐냐고.”

    툭, 다시 웃음이 터졌다.

    “내 아이디 찾아서 들어온 거 보라고.”

    핸드폰을 한 손에 꼭 쥔 채 얼굴을 돌려 베개에 파묻었다. 나도 모르게 두 발로 물장구를 치듯 매트리스를 팡팡 쳤다.

    “존나 귀여워.”

    베개에 얼굴을 묻은 탓에 목소리가 뭉개졌다. 조금 숨이 차는 느낌에 고개를 돌려 한쪽 얼굴을 드러냈다. 스탠드 조명에 물든 벽이 은은한 빛으로 눈에 담겼다.

    “씨….”

    그러나 얼마 못 참고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두 손으로 베개를 터트릴 듯 꽉 쥐었다. 자꾸만 몸이 꼬이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이 됐다.

    “진짜 존나 말도 못 하게 귀엽다고….”

    듣는 사람도 없는데.

    “김누리….”

    자꾸만 나는 혼잣말을 하게 되고.

    “얘는 왜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그렇게 속절없이 밤이 깊어갔다.

    다음 날, 학교에서 누리를 보자마자 웃음이 났다. 기분이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노골적으로 쳐다보자 그 시선이 못마땅한지 누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흘겼다.

    나를 째려보는 저 얼굴마저 귀여워서 깨물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것도 병이다 싶다.

    “야, 너 뭔데 자꾸 나 보면서 실실 쪼개냐?”

    김누리가 불퉁하게 입을 열었다.

    “응?”

    “아니, 왜 자꾸 웃냐고.”

    내가 너무 웃었나. 입가를 매만지며 턱을 괬다. 학교에 와서 김누리를 보기 전만 해도 내가 네 아이디를 알았다는 것을 모른 척해주려고 했다.

    염탐하다 걸리는 건 진짜 수치스러운 일 중 하나라는 걸 알았다. 또 모른 척 사진을 몇 장 더 올려 김누리의 하트를 받아볼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찌푸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힘이 더 실렸다.

    “콩알아.”

    “왜.”

    “어제 새벽에 잠도 안 자고 뭐 했어?”

    김누리가 눈을 꾹꾹 누르며 피곤한 얼굴을 했다.

    “나, 나 어제, 일찍 잤는데?”

    픽, 웃음이 났다. 말꼬리를 늘리며 어제 뭐 했는지, 몇 시에 잤는지 묻다가 어제 있었던 일을 툭 던졌다. 그러자 김누리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저 스스로는 나름 표정을 숨긴다고 노력하는 것 같았는데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가 김누리의 당황을 그대로 내비쳤다.

    “친구 추가 하려다가 괜히 네 아이디 애들한테 뜰까 봐 안 했어.”

    김누리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지간히 창피한 모양이다. 입술을 꾹 물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책상에 퍽 소리를 내며 엎드려 얼굴을 숨겼다. 둥그렇게 말아버린 팔에 가려 안 보였지만, 분명 울상을 짓고 있을 게 빤했다.

    책상 아래에서 김누리가 두 발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쿵쿵 바닥을 내리찍었다. 어젯밤 비밀스럽게 내 사진 염탐에 성공한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김누리의 모습이 생각보다 더 귀여웠다. 참기 힘들어 소리 내어 웃었다.

    *

    과외 선생님, 그러니까 찬영이 누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들켰다.

    수업 진도 나가다가 잠깐 쉴 때였다. 김누리가 계정을 삭제한 사실을 알게 됐다.

    “아, 뭐야.”

    아쉬운 얼굴로 핸드폰을 보는데 누나가 탕수육을 먹자고 했다. 누나는 냉장고에 붙어 있는 쿠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저번에 저 중국집에 주문을 했더니 김누리가 철가방을 들고 왔다.

    “안 먹어.”

    내 말에 누나가 홱 고개를 돌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군만두 좋다며.”

    “안 좋아. 안 먹어.”

    “그럼 너 혼자 먹지 말든가.”

    “쌤! 먹으러 왔어요? 나 공부하러 왔거든요? 과외 끊는다?”

    되지도 않는 협박에 누나의 얼굴이 확 굳었다. 막 화장실에서 나온 김찬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누나를 번갈아 봤다.

    누나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상황을 파악한 김찬영은 편의점에 다녀온다며 나가버렸다. 황당한 얼굴로 열렸다가 닫히는 현관문을 보고 있는데 누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멱살이 잡히고, 별 욕을 다 들었다. 몰랐는데 누나는 며칠 전에 옆 동네 중학생 과외 하나를 잘린 상태였다. 예민한 부분을 건든 것이다.

    “아니, 누나, 그게….”

    다른 뜻은 없고 정말 탕수육이 먹고 싶지 않았다고. 사실, 그 중국집에서 배달이 오는 게 싫었다고. 아니, 그러니까, 그게, 사실 좋아하는 애가 거기서 알바를 한다고. 오토바이 위험하지 않냐고. 멱살을 쥐고 눈을 부라리는 누나 때문에 결국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갔다.

    “찬영이한테 말하면 진짜 과외 관둔다.”

    그 말을 했다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았다. 아무튼 그 이후로 누나는 남녀 연애가 시험에 나오는 것도 아닌데 성심성의껏 가르쳐 주겠다며 자꾸 메시지를 보내왔다.

    오늘은 신체검사가 있는 날이었다. 김누리의 키가 김윤환과 엇비슷해서 170cm는 안 되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오늘 정확한 키를 알게 되는 것이다.

    “넌 나한테 궁금한 거 없냐.”

    내 물음에 김누리가 뚱한 얼굴로 눈만 끔벅였다. 진짜 아무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섭섭해지려고 그러네. 아니, 왜 궁금한 게 없어? 왜?”

    “좋아하잖아? 그럼 그 사람이 엄청 궁금하다고. 막 알고 싶고.”

    누나는 그렇게 말했는데. 순 틀려먹은 거 아니야? 생각하는데 핸드폰이 진동한다. 양반은 못 되는 사람이다.

    [찬영이한테 말하고 싶어 죽겠네 진짜]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메시지였다. 과외 그만둬도 되나요? 하고 메시지를 입력하는데 말풍선이 하나 더 올라왔다.

    [사귀게 되면 꼭 알려줘 소문내게]

    순간 덜컥, 가슴이 떨렸다. 사귀게 되면, 그 문장을 보는데 하지도 않은 고백을 한 것만 같고, 별안간 누리를 꼭 껴안고 다닐 미래의 일이 줄줄이 머리를 관통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아 미친]

    [상상했잖아]

    그렇게 답장을 보내자 키읔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누나가 연달아 말풍선을 올리며 웃었다. 이런 내가 웃긴 모양이었다. 그렇게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강당으로 이동하라는 담임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차.”

    누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불퉁한 얼굴로 나를 올려 보더니 어깨를 홱 틀어 내 손을 떨어트리고는 혼자서 성큼성큼 교실을 나가버렸다.

    뭐지. 왜 또 화가 난 얼굴이지. 방금까지 했던 상상이 저 멀리 도망가 버리는 순간이다. 쉬운 게 하나도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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