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64화 (외전 완결) (64/70)
  • 외전 6화

    핸드폰에 석영이의 이름이 뜬 건 우리가 연락을 하지 않은 지 정확히 일주일 뒤였다.

    [누리야 전화 좀 받아]

    무슨 오기였는지, 답장도 하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석영이가 학교로 찾아왔다.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서우영에게 메시지가 왔다.

    [교문 앞에 누나 남친 있다 거울 확인 요망]

    덕분에 대충 올려 묶은 머리를 풀고 상태를 확인한 뒤 석영이를 마주할 수 있었다.

    “누리야.”

    “…….”

    “내가 잘못했어.”

    무시하고 지나가는 나를 붙잡으며 석영이가 말했다. 두 손을 교복 주머니에 넣고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석영이의 오른쪽 팔을 불퉁한 얼굴로 보고 있자, 녀석이 조심스레 내 팔을 잡는다.

    “내가 실수했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말이 그렇게 나갔어. 그냥 옷이라고 한 거 미안해….”

    “…….”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내 행동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던 거였어. 의미가 없었대도 내가 그렇게 행동한 건 정말 잘못됐어.”

    치켜뜬 눈으로 보자, 석영이가 입술을 말아 물며 눈을 깜박인다.

    “용서해줘….”

    “네가 준 우산, 비 오면 나도 우영이 빌려줄 거야.”

    조금 처연한 얼굴로 나를 보던 석영이가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네가 보내준 기프티콘도 우영이 줘야겠다. 요 며칠 내 기분 별로라고 위로 많이 해줬는데.”

    “…어?”

    “왜. 너도 네 친구한테 내가 준 선물 아무렇지 않게 주는데, 나도 그럴 수 있잖아.”

    석영이의 눈빛에 묘한 당혹감이 서렸다.

    “우영이랑 둘이 영화도 보러 가야지.”

    “내가 걔랑 둘이 영화 봤어?”

    “뭐가. 그냥 옷이고 그냥 영화인데.”

    잡은 팔을 놓지 않더니, 제 쪽으로 당기며 두 손으로 내 팔을 잡는다.

    “그건 바람이지.”

    어쭈. 한껏 힘없는 얼굴로 서 있더니 그건 또 용납이 안 되는지 표정이 싹 변한다.

    “…….”

    “…….”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하고, 상대의 생각을 읽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뚫어져라 석영이의 얼굴을 보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날 내가 그런 기분이었어. 네가 나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기분이었다고.”

    “…누리야.”

    입을 다문 채 한숨을 내쉰 석영이가 머리를 숙여 콩, 하고 내 머리를 한 대 박는다.

    “내가 그간 너한테 못 해준 게 많은가 보다. 이 지구상에 사랑한다는 말을 할 사람이 너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뻔뻔하게, 뚫린 입이라고 낯간지러운 말은 잘도 뱉는다. 괜히 입꼬리가 씰룩 올라가는 것 같아 표정을 갈무리하며 새초롬하게 눈을 떴다.

    “내가 어떻게 알아. 나 없는 곳에서 다른 사람한테도 그런 소리를 할지.”

    흥,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어어, 김누리.”

    그러자 석영이가 어린아이를 혼내듯 내 입술을 잡는다. 단번에 입술이 다물렸다.

    “이렇게 예쁜 입술을 가지고 왜 자꾸 못난 말을 해.”

    “으, 느, 스그흐르그.”

    야, 너 사과하러 온 거 아니냐. 그런 말을 하려는데 석영이가 입술을 꽉 잡은 통에 발음이 샜다. 미간을 찌푸리자 그 얼굴이 웃긴지 녀석이 피식 웃는다. 기분 나쁘게….

    석영이가 허리를 숙여 쪽 입을 맞췄다. 그러곤 그대로 나와 눈을 마주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새까만 눈동자가 맑게 보인다.

    “사과하러 온 주제에 큰소리친다고 뭐라 하려고 했지?”

    귀신이다.

    “그러지 마.”

    “뭐. 뭘 그러지 마.”

    말로는 석영이를 이겨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괜히 심통이 나 톡톡거렸다.

    “내가 너에게 준 거 다른 사람 주지 마.”

    시선을 떨어트리고 내 손을 만지작거리던 석영이가 한 걸음 다가와 내 어깨에 이마를 묻는다.

    “그런 게 아니었어. 내가 미처 몰랐어. 네가 나에게 주는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던 건 아닌데.”

    “아는 놈이….”

    구시렁거리자 진지하게 말을 뱉던 석영이가 작게 웃는다.

    “다른 사람한테 절대 안 줄게. 다신 안 그럴게. 잘못했어…. 용서해주라….”

    덩치 큰 녀석이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파묻는 모습이 영 어울리지 않았다.

    “정말 미안해.”

    이렇게 빨리 마음을 풀 생각은 없었는데, 손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온기 때문인지, 앓는 소리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연거푸 뱉는 음성 때문인지 석영이가 밉지 않았다.

    사실 석영이가 교문 앞에 찾아온 순간부터 마음이 조금 풀렸던 것 같다. 석영이도 그걸 알았겠지. 내 표정을 귀신같이 파악하는 놈이니.

    “앞으로 잘해라.”

    그 말에 석영이가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누리야.”

    그렇게 다시 만나 화해를 한 날에도 석영이는 눈물 한 방울 안 흘렸는데. 남윤수를 붙잡고 울었다니.

    “그때 울었어?”

    내가 묻자 석영이가 아니? 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 말에 남윤수와 김찬영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린다.

    “술 먹고 울고불고, 그런 진상도 없었는데.”

    김찬영이 작게 목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젓는다.

    “떡볶이나 먹어.”

    석영이가 이를 꾹 악문 채 뱉은 말에 애들이 어이없다는 듯 시선을 돌린다. 실소를 짓던 남윤수가 이내 화제를 돌렸다.

    “나 오늘 왠지 새벽 2시 구남친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헐, 설마… 자니?”

    남윤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나랑 새벽까지….”

    “나 내일 1교시야.”

    남윤수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김찬영이 답한다.

    “1교시? 그게 중요해? 어?”

    “중요하지.”

    “나보다 더?”

    “…….”

    분명 김찬영의 답은 그렇지, 일 텐데. 남윤수가 젖은 눈망울을 하고 눈을 깜박이자 입을 다문다.

    *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가 들린다. 남윤수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그래, 우리가 함께 있어줄게, 하고 답한 게 화근이었다. 새벽까지 술이나 마셔주라, 놀아주라, 그런 말인 줄 알았는데. 밤바다를 보자는 말이었을 줄이야.

    해변 데크에 나란히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동해안의 맑고 푸른 바다가 넓게 펼쳐졌다. 바다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이 스멀스멀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바다 보고 있으니까 우리 수학여행 갔던 거 생각난다.”

    김찬영의 말에 소소한 웃음이 터졌다.

    “맞아. 그때 재밌었는데.”

    “찬영이 이 새끼, 그때 모래성 깃발 뺏기 졌는데 아이스크림 안 쐈어.”

    몇 년 전 이야기를 지금에 와서 하는지, 나와 석영이가 야유를 보내며 남윤수를 봤다.

    “오늘 살게.”

    조용히 웃던 김찬영이 말했다. 순순히 사겠다는 답에 남윤수가 오예, 하며 주먹을 흔든다.

    “가자.”

    해변 데크에서 일어난 남윤수가 김찬영의 어깨를 툭 친다.

    “어디를?”

    “아이스크림 사러.”

    “지금?”

    “말 나온 김에 가야지! 얼른!”

    남윤수의 성화에 못 이긴 김찬영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두 발을 교차하며 흔들고 있는데 석영이가 일어났다.

    “좀 걸을까?”

    데크에 앉은 채 나를 향해 뻗은 석영이의 손을 보았다. 히죽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모래알이 운동화 안으로 다 들어와 결국 신발을 벗고 걸었다. 한 손에 운동화를 들고, 다른 손으로 석영이의 손을 잡았다. 모래알이 발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푹푹 빠지는 발 모양을 따라 발자국이 남는다.

    파도가 쓸려 올라왔다가 내려간 곳에 손가락으로 석영이의 이름을 적었다. 쪼그려 앉아 이름 뒤에 하트를 그려 넣는데 파도가 밀려왔다.

    “어어!”

    부리나케 무릎을 펴고 일어나 뒤로 물러나자 파도가 석영이의 이름을 훔쳐 달아난다.

    “지워졌어.”

    흔적 없이 사라진 이름에 울상을 하자 석영이가 웃었다.

    파도가 닿지 않는 곳에 석영이와 나란히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말없이 파도 소리를 듣는데, 기분이 꽤 좋았다.

    “너 근데 진짜 울었어?”

    조개 하나를 주워 모래를 파내던 석영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언제?”

    “그때, 우리 싸워서 연락 안 했을 때.”

    부스스, 조개에 올라가 있던 모래가 바람에 날아간다. 조개를 바닥에 놓은 석영이가 그 위에 모래를 덮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뭔가 상상이 안 가네. 어떻게 울었을지. 입에 주먹 물었어?”

    “장난하냐.”

    석영이가 얼굴을 굳히며 내 발등 위에 모래를 올린다.

    “주먹은 안 물었는데, 술만 마시면 울었어. 너무 사소한 일로 우리가 그렇게 틀어진다는 게, 헤어질 수도 있다는 게 너무 황당하고 안 믿겨서.”

    “안 사소했어.”

    “알아. 나중에 반대로 생각해 보니까 이해됐어. 전혀 안 사소해. 나였으면 눈 뒤집혀서 당장 벗으라고 깽판 쳤을 거야.”

    석영이가 자꾸 발등 위로 모래를 올려 무덤처럼 모래가 쌓였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무리 네가 나를 전부라고 말해줘도, 나는 네 전부가 될 수 없다는.”

    모래 위에 손을 얹은 석영이가 나를 본다. 햇빛이 그의 머리에 걸렸다.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마음이라는 게 퍼즐 같은 것이지 않을까, 생각했어. 한 조각이 있어서 그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결코 그게 전부가 아닌 거지.”

    “음….”

    대체 뭔 소리인지.

    이해가 쉽게 안 돼 미간을 좁히자 석영이가 아까 조개를 묻었던 모래를 손바닥으로 쓸어낸다. 그러자 모래알 사이로 조개껍데기가 드러난다.

    “이렇게 숨어 있는 마음을 계속 발견하는 과정 같다는 말이야.”

    곧은 손가락이 모래알이 붙은 조개껍데기를 쥐어 손바닥 위에 올린다.

    “어려워….”

    작게 내뱉은 말에 녀석이 웃는다.

    “그래서, 그때 울면서 뭘 발견했다는 거야?”

    “응.”

    “그게 뭐였는데?”

    “그때 나는….”

    석영이가 잠시 침묵한다. 그 틈을 비집고 파도 소리가 밀려든다. 물끄러미 나를 보는 석영이의 시선도 그렇게 밀려드는 것 같았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어.”

    “…….”

    “그리고 언제든 네가 나를 떠날 수 있다는 것도.”

    뚫어져라 석영이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되게 당연한 걸 깨달았네?”

    빈정대듯 뱉은 말에 석영이가 그러게, 하며 순순히 인정한다.

    마음이 어쩌고, 조개가 어쩌고 하는 건 이해하지 못했지만 석영이의 뒷말만은 알아들었다. 아마, 더 큰 감정을 깨달았다는 뜻이지 않을까, 하고 짐작했다.

    바다가 우리를 마주 보고 섰다. 이쪽을 향해 파도가 밀려들다가 물러난다.

    “사탕 먹을래?”

    무릎을 모으고 앉아 수평선을 보다가 석영이에게 물었다. 아까 휴게소에서 입이 심심해 산 사탕이었다. 주머니에서 네모난 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석영이의 손바닥 위에 사탕 한 알을 툭 털어냈다.

    석영이가 어? 하며 손바닥을 내 앞으로 내민다.

    “사탕이 하트야.”

    통에서 튀어나온 사탕이 하트 모양이었다. 어, 하트구나, 하며 시선을 돌리는데 석영이가 말한다.

    “네 마음이야? 나한테 주는 거야?”

    내 손바닥 위에 사탕을 털어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는 석영이와 눈이 마주쳤다. 언젠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으며 눈을 깜박이는데, 석영이가 제 입 안으로 사탕을 넣는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내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혀가 얽히는가 싶더니, 내 입 안으로 사탕 한 알이 넘어온다.

    얼굴을 붙든 채 석영이가 입술을 뗀다.

    “내 모든 마음은 네 거야. 다 너 가져.”

    사탕을 입에 물고 빤히 바라보자 석영이가 웃는다.

    “석영아.”

    “응?”

    상체를 당겨 석영이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저만치에서 남윤수가 야아! 내가 분위기 깽판 치러 간다아! 하며 소리치는 게 들렸다. 돌아보자 김찬영이 달려가려는 남윤수의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야아아! 염장은 사절이다아아!”

    그 우렁찬 목소리에 픽 웃음이 터졌다.

    석영이가 따라 웃는다. 말갛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내 마음도 네 거야.”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 그 위로 광활한 하늘이 노을에 물들어가며 점점 짙어져갔다.

    “모든 날이 그럴 거야.”

    어느 순간부터, 저녁때의 햇빛을 볼 때마다 석영이를 생각하게 됐다. 석양, 이라는 글자에 자꾸만 석영이가 담겨서.

    석영이의 손바닥 위에 있는 조개를 훔쳐 가듯 내 손안에 숨겼다.

    네 덕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된다.

    내 모든 날의, 석영.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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