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63화 (63/70)
  • 외전 5화

    “수연이… 남친 생겼더라고.”

    작게 입이 벌어진다. 아, 하는 탄식이 나올 뻔해서 급하게 다물었다.

    “인스타에는 티를 하나도 안 내서 몰랐는데, 카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더라.”

    “그건 또 언제 봤대?”

    “아까 찬영이 핸드폰으로 몰래 봤어….”

    젖은 휴지를 구기며 말하는 남윤수를 김찬영이 조용히 흘겨봤다.

    “야, 괜찮아. 다 사귀었다가 헤어지고 하는 거지.”

    석영의 말에 휴지를 만지작거리던 남윤수가 눈시울을 붉힌 채 고개를 든다.

    “그러는 새끼가, 누리랑 헤어질 뻔했을 때 나 붙잡고 그렇게 울었냐….”

    응? 그건 대체 무슨 이야기지.

    모르는 이야기에 눈을 돌리자 석영이가 눈을 부릅뜨며 남윤수의 발을 툭 친다. 얼마나 과격했는지, 테이블이 흔들릴 정도였다.

    “언제?”

    내가 묻자 석영이가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하며 남윤수의 대답을 가로채 간다. 턱을 괴고 구경만 하던 김찬영과 눈이 마주쳤다.

    “석영이 옷 입고 있는 여자애 때문에 너희 둘 대판 싸웠을 때.”

    무심하게 흘러나온 김찬영의 말에 석영이가 얼굴을 굳힌다.

    “아, 진짜….”

    아아, 그때라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지자는 말만 안 나왔지, 조금만 더 갔으면 헤어졌을지도 모를 사건이었다.

    바야흐로 임석영이 대학에 입학하고 망나니처럼 술을 마시고 다니던 새내기 시절.

    석영이는 학과에서 인기가 많다 못해 사회과학대학에서도 잘생긴 애 들어왔더라, 하는 소문을 몰고 다녔다. 그만큼 화제의 중심에 선 새내기였으니 여기저기 술자리에 불려 다녔고 각 행사에 끌려 다녔다.

    2년 전, 봄.

    “오늘 야자 빼먹는 놈들 죽을 줄 알아라.”

    담임이 칠판에 큼지막하게 경고성 문구까지 작성해놓고 교실을 나갔다.

    “아….”

    오늘 석영이 만나기로 했는데. 도망갈까, 생각을 하던 중 나갔던 담임이 돌아왔다.

    “김누리!”

    “예?”

    머리를 굴리다가 퍼뜩 고개를 들고 보자 담임이 나를 콕 찍어 가리켰다.

    “도망갈 생각 하지 마라.”

    야자 빼먹고 도망간 전적이 많았다. 오늘 야자 감독은 담임과 친분이 있는 5반 담임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지.

    [석영아 오늘 못 나갈 거 같아 ㅠㅠ]

    석영이를 못 본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에 갇혀 있었고,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탓에 밤이 되면 녹초가 되어 집에 가자마자 뻗어 자는 일상이 반복됐다. 석영이도 이것저것 잡다한 학교 행사로 바빠 보였다.

    그래도 주말에는 시간을 내서 얼굴을 봤는데, 저번 주말에 석영이가 학과 야유회를 가는 바람에 못 만났다.

    야, 원래 이렇게 대학생은 바쁜 것이냐.

    언젠가 남윤수에게 그렇게 물었더니, 석영이 그 새끼가 유독 잘 불려 다니더라, 하는 답이 돌아왔다. 불려 다니는 이유가 잘생겨서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왠지 모르게 심술이 나고는 했다.

    핸드폰이 징 울며 메시지가 들어왔다.

    [그럼 너 야자 끝날 시간에 내가 갈게]

    울상을 하고 있던 얼굴에 픽 웃음이 났다.

    마지막 야간자율학습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가방을 챙겨 들고 교실을 튀어나갔다. 후다닥 달려 교문으로 가자 건너편에 서 있는 석영이가 보였다.

    “임쏙용!”

    팔을 벌리고 다가가자 석영이가 웃으며 나를 안는다.

    “야, 종 친 지 몇 분 안 된 것 같은데. 어떻게 일등으로 나오냐.”

    “이런 거라도 일등 해야지.”

    석영이와 함께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아, 맞다. 할머니가 곧 감자 수확한다고, 한 박스 너희 집으로 보낸다는데. 그래도 돼?”

    “한 박스나?”

    “응. 전에 네가 감자전 해먹은 거랑 감자튀김 해먹은 거 사진 찍어서 할머니한테 보냈잖아. 그거 때문에 그런 거 같아…. 네가 감자 귀신인 줄 알고….”

    석영이가 소리 내 웃는다.

    “아니, 그런데 할머니 감자 진짜 맛있어. 그냥 받기 죄송하니까, 이번에도 가서 도와드릴까?”

    작년 여름, 석영이와 함께 할머니 집에 갔다. 나름 우리끼리는 몰래 온 손님이라고 연락도 없이 방문한 거였는데, 눈물을 흘릴 줄 알았던 할머니는 빗자루를 들었다. 할머니가 보기에 나는 수험생을 데리고 섬에 들어온 배려심 없는 애였던 것이다.

    그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할머니 집 출입금지를 당했다.

    “아니. 할머니가 수능 보기 전에는 섬 근처에도 오지 말래.”

    “단호하시군.”

    석영이의 팔이 내 어깨로 올라온다.

    “너 수능 보는 날 할머니랑 학교 대문에 엿 붙여놓고 기도하고 있을게. 그날까지 파이팅.”

    석영이가 나를 보며 주먹을 쥔다. 힘내라, 하는 의미겠지만 이상하게 그 주먹을 보고 있자니 수능 박살이 떠올랐다. 석영이는 나와 캠퍼스 커플을 꿈꿨다. 교양 강의를 같이 듣고 나와 학식을 먹는, 뭐 그런 걸 꿈꾸는 듯 보였는데, 내 성적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열심히 해볼게….”

    목소리가 어쩐지 작게 흘러나갔다.

    며칠 뒤 남윤수에게 연락이 왔다.

    ― 누리야, 너 오늘 야자 빠질 수 있어?

    “왜?”

    ― 오늘 석영이네 학교 축제래. 같이 놀러 가자.

    가방을 품에 안고 학교를 몰래 벗어났다. 버스를 타고 석영이가 다니는 학교 앞에서 내렸는데, 나도 모르게 조금 위축됐다. 축제라더니,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아, 조금 그런가.

    교복을 입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려 횡단보도 앞에 가만히 서 있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남윤수가 어깨를 툭 치며 달려! 하고 소리쳤다. 깜빡이는 신호등에 부리나케 발을 굴려 횡단보도를 건넜다.

    “야, 나 교복인데. 이러고 가도 돼?”

    남윤수가 나를 훑어 내리더니 그게 왜, 하며 걸음을 옮긴다.

    “너 민증 깔 수 있잖아! 뭐가 문제야!”

    사복을 입은 사람들 틈을 남윤수와 함께 파고들었다. 석영이한테 연락을 하고 오려고 했는데 남윤수가 말렸다. 몰래 온 손님으로 깜짝 방문을 해야 한다나.

    “임석영 서빙은 죽어도 싫다고 바락바락 우겨서 결국 전 부친대. 생각만 해도 웃겨.”

    대체 그게 뭐가 웃긴지, 남윤수가 혼자 낄낄거리며 석영이네 과 부스를 찾아 나섰다.

    주위를 구경하며 남윤수를 따라갔다. 과 티셔츠를 맞춰 입은 사람들이 부스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열기에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나도 저런 열기에 휩싸여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 탓이다.

    “어! 저기다!”

    저쪽을 손가락질하는 남윤수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저 새끼 전 부친다더니 놀고 있잖아. 시시하게.”

    손님을 맞이하려고 만들어놓은 듯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 석영이가 있었다.

    왼쪽엔 남자가, 오른쪽엔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여자애가 입고 있는 옷이 좀 익숙했다. 작년 생일날, 석영이가 좋아하는 스포츠 브랜드의 후드 집업 재킷을 선물했는데, 그게 저거잖아.

    석영이가 티셔츠만 입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추위를 잘 타서 늘 외투를 들고 다니는 놈이 저렇게 입고 왔을 리가 없다. 순간 허, 하고 헛숨이 샜다.

    지금 내가 선물한 옷을 벗어준 거야?

    급속도로 짜증이 밀려왔다. 이건 마치 저 먼바다에서 해변을 향해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지퍼를 끝까지 올려 채운 모양새가, 누가 봐도 잠깐 걸친 게 아니고 챙겨 입은 거였다.

    “석영아, 이거 진짜 네가 부쳤어?”

    “응.”

    “대박. 너 전 집 해도 되겠다. 명절날 우리 집 와서 전 부쳐라.”

    여자애가 한껏 올라간 목소리로 웃으며 석영이의 등을 파닥파닥 때렸다.

    “싫은데?”

    그렇게 말하며 석영이가 웃는다. 술 마시면 뺨이 붉어지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얼굴에 띤 홍조를 보자 심기가 완전히 뒤틀렸다.

    “야아, 누리야, 아프다.”

    남윤수가 내 팔을 툭툭 때렸다. 나도 모르게 남윤수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 뭐라도 부러트리고 싶었던 건가.

    “쟤 그냥 석영이네 과 친구야. 오해 안 해도 돼.”

    “야, 그냥 과 친구가 입고 있는 옷, 저거 내가 전국을 뒤져서 구매한 거야.”

    남윤수가 내 눈치를 봤다. 눈치가 없는 남윤수가 내 분노를 감지했을 정도면, 이건 싸움 각이 서는 일인 것이다.

    석영이가 문득 이쪽을 돌아봤고, 눈이 마주쳤다. 남윤수가 손으로 목 부근을 긋는 게 보였다. 너는 뒈졌음, 이라고 한 것 같다.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이쪽을 향해 온다. 마음 같아서는 따져 묻고 싶었으나, 다가오는 모습조차 꼴 보기가 싫어 걸음을 돌렸다.

    “아, 잠깐만, 누리야.”

    인사도 없이 돌아서 가버리는 나를 석영이가 쫓아와 붙잡았다. 앞을 가로막고 서는 바람에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섰다.

    “뭐.”

    “너 뭔가 오해하는 거 같아.”

    말없이 노려보자 석영이가 말을 덧붙인다.

    “그냥 친구야. 블라우스에 술을 쏟았고, 냄새 때문에 입고 있기가 힘들다고 해서. 마침 내가 외투를 벗어뒀는데 안 입고 있을 거면 빌려달라고 하길래 잠깐 빌려준 거야.”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말할 때마다 풍기는 술 냄새가 짜증 났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이 다 싫었다. 시끄러운 소음도, 즐거워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축제 분위기도, 앞에 있는 석영이도.

    “진짜 그게 다야. 벗어둔 옷인데 안 빌려주겠다고 하는 것도 좀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어.”

    “저기에 옷 빌려줄 사람이 너밖에 없어?”

    “아니, 내 말은….”

    석영이의 입에서 한숨이 샌다.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눈썹 끝을 매만지는 게 보였다. 저런 표정을 짓는 석영이를 안다. 이 상황이 숨 막히게 답답하다는 표정.

    “여자 친구가 사준 거라서 안 된다고 하면 되잖아!”

    “나한테 바로 물어보는데, 다른 사람한테 빌려보라고 하기가 좀 그렇잖아.”

    “너 쟤 좋아하냐? 여친이 사준 옷이라 안 된다는데 그게 뭐가 이상해?”

    “아니, 상황이 그랬다고 하잖아. 말을 꼭 그렇게 해야 돼?”

    대화고 뭐고, 화가 나서 도저히 같이 있을 수가 없었다. 뒤돌아 걷자 아, 누리야, 하며 석영이가 따라와 잡는다. 낮게 꺼진 그 목소리조차 서운하기 그지없다.

    “너 만약 내가 여기 오는 거 알았어도 그 옷 빌려줬을 거야? 너 내가 오는 거 알았으면 절대 안 빌려줬을걸.”

    “…….”

    “그게 짜증 나. 내가 없는 곳에서 네가 그러는 게.”

    “그냥 옷이야….”

    순간이었다. 미간을 살짝 좁힌 채 그 말을 뱉는 석영이를 보는데, 밀려오던 파도를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 된 건.

    단순히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감정이 분명해졌다. 이건 실망이다.

    “너는 나한테 그냥 옷을 받았다고 생각했어?”

    “누리야….”

    “품절돼서 네가 못 샀던 거라 생일 선물로 꼭 주고 싶던 거였어. 네가 좋아하는 색상은 재고가 없어서 대구에 있는 매장에까지 전화해서 받은 건데.”

    “…….”

    걸음을 돌리자마자 팔이 붙잡혔다.

    “이대로 가면 어떡해.”

    “그럼 뭐, 여기서 소리라도 지르면서 싸울까?”

    “아니, 나는 우리가 왜 이런 일로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그래.”

    “왜 너만 몰라, 왜? 사소한 이게, 나한테는 너무 중요해!”

    석영이가 말없이 나를 본다. 이 모든 게 피곤한 것처럼 느껴지는 표정이 너무 싫다.

    “연락하지 마.”

    말없이 손을 떨쳐내고 갔다. 가는 나를, 석영이가 더 이상 붙잡지는 않았다.

    일주일간 서로 연락을 안 했다. 싸울 때는 눈물 한 방울 안 났는데, 학교에선 틈만 나면 눈물이 났다. 친구들은 다 내가 헤어진 줄 알았다.

    “누나, 그만 좀 울어.”

    서우영이 휴지를 뽑아 준다. 눈물 젖은 휴지를 놓고 서우영이 건넨 휴지에 얼굴을 묻었다.

    “야, 내가, 어? 흐으윽, 그 옷을 어떻게 구했는데, 그게 그냥 옷이야?”

    휴지로 두 눈을 꾹 누르며 덮자 서우영이 아 좀, 하며 나를 다그친다.

    뭐, 어쩌라고. 서러운 걸 어쩌라고!

    서우영은 누나 마음 다 알겠어, 제발 그만 울자, 하며 나를 달래 주면서도, 이따금씩 석영이 편을 들었다. 그냥 옷이라고 한 건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여자애에게 별 마음이 없다는 그런 뜻이었을 거라나 뭐라나.

    아니, 마음이 없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내가 그딴 말로 위안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에 서러움이 더 깊어만 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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