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62화 (62/70)
  • 외전 4화

    과제 폭탄을 맞은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무조건 다 끝내고 가리라, 의지를 다졌다.

    해가 넘어가던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정리하고 퇴실했다. 도서관 안이 조금 휑해졌다.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두고 책을 꺼냈다. 붙임으로 들어갈 예시문을 뽑아야 했다. 각을 잡고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무렵 석영이에게 메시지가 들어왔다.

    [자기야]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떨어트렸다.

    자, 자기…?

    메시지 내용을 조용히 읽다가 헙, 하고 입을 막았다.

    석영이와 만난 지도 4년이 넘었지만, 애칭이라고는 여전히 콩알뿐이었고 나는 가끔 석영이를 영아, 하고 불렀다. 자기, 그런 말을 서로 뱉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원한 적도 없었는데.

    눈을 의심하며 메시지를 다시 훑었다. 그러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오른다.

    [자기야?]

    얘, 미쳤나 봐. 순간 석영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누구냐]

    그렇게 적어 보낸 답장을 석영이가 바로 확인했다. 말풍선 하나가 쏙 올라온다.

    [자기야 나잖아]

    아무리 봐도 석영이 말투가 아닌데. 확인이 필요하다. 이건 핸드폰을 잃어버렸거나, 누군가에게 뺏겼을 가능성이 크다.

    [네가 임석영이라는 증거를 대라]

    석영이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석영이가 메시지로 자기를 찾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답장이 들어왔다.

    [너 날개뼈 있는 쪽에 초코 칩 같은 점 있어]

    [내가 그거 먹어 보겠다고 설치다가 너한테 맞았잖아]

    세상에…. 진짜 석영이네.

    나는 내 등에 그런 모양의 점이 있는 줄 몰랐는데, 어느 날 석영이가 알려줬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잘 안 보이는 위치라 석영이가 찍은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깻죽지에 있는 조금 흐릿한 점이었다. 다른 점에 비해 크기가 조금 컸다.

    석영이는 그 점을 보며 야, 너 초코 칩 묻었다, 하며 내 살에 입술을 박았다. 이를 박는 통에 죽는다! 하며 발을 날렸었는데….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무서워]

    내 말에 석영이가 ‘ㅋ’을 20개 이상 적어 보냈다. 이게 웃긴가.

    [사실 민석이랑 내기했어]

    [여친한테 동시에 자기야 보내서 응 왜 하고 답장 오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별 내기를 다 하네. 내기에서 이기면 뭐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진 사람이 삼겹살을 사기로 했단다. 내가 보낸 메시지를 훑어 올라가보니 아무래도 석영이가 진 듯했다.

    [그럼 진 거야? 네가 삼겹살 사?]

    그렇게 보낸 메시지에 각자 사 먹기로 했다는 답장이 왔다. 민석이는 애인에게 술 마셨냐? 하는 답장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집중이 흐트러진 김에 잠시 밖으로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 자판기에서 캔 커피 하나를 뽑아 마셨다. 이 밤에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대운동장을 돌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뜬금없이 시선을 뺏겨 멍하니 바라보다가, 커피를 다 마셔 올라왔다.

    [아직도 중도야? 집에 언제 가려고?]

    자리에 앉자마자 석영이에게 메시지가 왔다.

    [과제 다 하고….]

    핸드폰을 집어넣은 뒤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커피를 두 캔이나 마셨는데도 카페인이 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눈이 점점 무거워졌다. 나도 모르게 꾸벅 졸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워드에 자음과 모음이 완전히 분리된 채 도배되어 있었다.

    “아, 안 되겠다.”

    노트북을 닫고 그 위에 엎드려 누웠다. 5분만, 아니 10분만 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간지러운 느낌에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잠이 깼다. 느리게 눈이 뜨였다.

    “…….”

    뭐지. 잠이 덜 깼나. 눈을 끔벅였다. 바로 앞에 길게 뻗은 팔을 베개 삼아 누워 있는 석영이가 보였다. 주황색 티셔츠가 오늘 입고 온 그의 옷이 맞았다.

    현실과 꿈의 경계를 구분하느라 느리게 눈을 끔벅이고 있을 때,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석영이가 미소 지으며 내 이마를 찌른다.

    “과제 다 하고 집에 간다더니. 집에 갈 생각이 없구만?”

    석영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리 어떻게 찾았어?”

    “너 매번 이 열람실 쓰잖아.”

    가만 보면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해주는 점이 좋았다. 그런 면에서 석영이는 참 좋은 남자 친구라는 생각이 잠에서 깬 이 순간 뜬금없이 들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냐. 좀 깨우지.”

    노트북에 눌어붙은 뺨을 떼며 상체를 세웠다. 대답 대신 핸드폰이 넘어왔다. 석영이가 보여준 것은 사진이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입술 사이에 물고, 야무지게 잠든 내 얼굴.

    “솔직히 무서워. 너 이렇게 눈 뜨고 잘 때면.”

    문제는 흰자위가 살짝 보인다는 점. 조용히 사진을 삭제하고 핸드폰을 넘겨줬다. 그러곤 상체를 기울여 석영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한 번만 더 몰래 찍으면 죽는다.”

    “…네.”

    다시 과제를 해볼 생각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핸드폰을 돌려받은 석영이가 무언가를 툭툭 누르며 내게 속삭인다.

    “누리야, 그런데 너 그거 알아?”

    “뭐?”

    “삭제한 사진 복구할 수 있는 거?”

    다시 내 앞으로 핸드폰이 오고, 거기에 방금 삭제했던 사진이 있다. 너 이 새끼, 진짜…. 노려보자 시선을 피하며 핸드폰을 집어넣는다.

    석영이가 계속 자리를 지켰다. 할 일이 없다더니, 가만히 있기 심심한지 내 가방에 있는 시집 한 권을 꺼내 읽는다.

    문서를 저장하는 단축키를 틈틈이 누르며 리포트를 작성했다. 엔터를 누르고 눈가를 긁적이다가 석영이를 보았다. 턱을 괴고 눈을 내리깐 모습이 꽤나 관능적으로 보였다.

    석영이는 손이 조금 큰 편이었는데 두툼하지는 않았다. 손가락이 가느다랗고 곧았다. 그래서 가끔 손으로 입을 가리거나 목덜미를 잡고 있을 때 가슴이 철렁이고는 했다. 뭔가 저렇게 나른한 얼굴을 하고서, 큰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솔직히 떨렸다.

    석영이의 눈동자가 움직인다. 눈이 마주치자 왜? 하고 입을 벙긋거린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작게 속삭였으나, 의미 전달은 확실히 됐는지 녀석의 눈이 조금 동그래진다.

    “뭐지, 이 전투적인 자세는?”

    “…싫으면 말고.”

    홱 고개를 돌리자 석영이가 읽고 있던 시집을 뒤집어 내려놓으며 어깨를 붙여 온다. 그러곤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 너랑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였는데 몰랐어?”

    속닥이는 그 소리에 귀가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리자 더 장난스럽게 머리를 들이밀며 작게 말했다.

    “누리야아, 잠만 잘 거야? 응?”

    결국 과제는 내일 다 끝내기로 나 스스로와 타협한 후 도서관을 나섰다.

    노트북이 든 내 가방을 어깨에 걸친 석영이가 김누리, 빨리 가자!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 다급해 보이는지,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자취방으로 가는 길이 한적했다. 석영이와 맞잡은 손을 앞뒤로 크게 흔들며 길을 걸었다.

    “야아, 하늘에 별 많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는데 까만 밤하늘에 듬성듬성 박힌 별이 선명했다. 뭔가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에 기분이 좋았다. 그 분위기가 깨진 건 석영이가 엇, 하며 말을 이었을 때였다.

    “바퀴벌레다.”

    석영이가 가리킨 위치가 어디인 줄도 모르고 아악!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렸다. 마치 바닥이 뜨거워서 발을 못 딛는 모양새로 폴짝폴짝 뛰었다.

    “뭐야! 어디에!”

    석영이의 두 팔을 붙잡고 매달리자 석영이가 저기, 저기, 하며 바닥 어딘가를 가리킨다.

    “어어, 누리야, 네 다리에.”

    “아아악! 죽어, 진짜아!”

    누구보고 죽으라고 하는 줄도 모르고 그냥 뱉는 말이었다. 석영이의 목에 두 팔을 감고 발을 들었다. 나무에 매달리는 매미처럼, 석영이의 몸에 매달려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어디 있어, 설마 내가 밟았어?”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이 없어 묻자 석영이가 풉, 하고 웃는다. 왜 웃어, 왜. 석영이가 웃는 낯으로 나를 봤다.

    “아니, 왜 까마귀 소리를 내고 그래?”

    눈이 장난스럽게 휜다. 그제야 알았다. 이게 석영이의 장난이라는 것을.

    “야, 진짜 장난치지 마.”

    다리를 풀고 내려오려는데, 석영이가 내 몸을 받치며 제 등에 업는다.

    “내가 오늘 제대로 네 셔틀 한다. 그치?”

    “누가 업어달래? 내려줘.”

    “싫어. 이러고 갈 거야.”

    등에 업혀 가는 게 조금 낯부끄럽긴 했지만, 길에 아무도 없으니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시야가 높아지자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스쳐 가는 나무를 보다가, 석영이의 머리에 턱을 댔다.

    “누리야.”

    “응?”

    “오늘 네가 나한테 임석영이라는 증거 대라고 했었잖아.”

    “어. 네가 안 하던 말 해서.”

    “너는 네가 김누리라는 증거 어떻게 댈 거야?”

    “나는 너한테 ‘자기야’라고 안 할 건데?”

    “아아, 그 말이 아니라. 너는 내가 너를 너라고 확신하지 못할 때, 어떻게 증명할 거냐고.”

    으음, 하고 목을 울리며 고민했다. 그사이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 도로 앞에서 머리를 굴리다가,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것을 입에 담았다.

    “고등학교 때 내가 너 그려준 그림 있잖아.”

    “응.”

    “너 그거 액자에 넣어서 네 책상 왼쪽에 놔뒀어.”

    “김누리 맞군.”

    머리에 턱을 대고 있다가, 미끄러지듯 내려가 석영이의 왼쪽 귀를 물었다.

    “그리고 너는 귀가 성감대야.”

    속삭이듯 말을 뱉자 신호가 바뀌었다.

    “야, 너 진짜….”

    뒷말을 자른 석영이가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희 집까지 1분 만에 간다.”

    횡단보도에서 자취방까지는 도보로 7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아, 미친놈아! 내려줘!”

    “못 내려와, 너는.”

    선선한 밤공기를 돌파하며 나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상황이 너무 황당해서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석영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내 웃었다.

    *

    휴가를 나온 남윤수의 소원대로 떡볶이 집에서 넷이 만났다.

    남윤수가 단무지를 씹으며 군대 이야기만 해댔다. 떡볶이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집에 가고 싶기는 처음이었다. 듣다 못한 김찬영이 그의 입을 막았다.

    “야, 너 복학해서 이러면 진짜 주변에 예비역 말고는 아무도 없을걸.”

    “헐? 그거 너무한데?”

    “그러니까, 그만 말해.”

    남윤수가 입술을 휘어 내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떡볶이가 나오자 남윤수가 제일 먼저 젓가락을 들었고 김찬영이 위생장갑을 끼고 주먹밥을 만들었다. 시시콜콜한 근황 토크를 이어간다 싶었는데, 뜬금없이 남윤수가 아, 맵다, 매워, 하며 손부채질을 하더니 울기 시작했다.

    “…….”

    매운 거 싫다며 계란찜만 먹던 석영이와 쿨피스를 들이켜던 김찬영과 주먹밥에 떡볶이 양념을 묻혀 먹던 내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뭐야, 이 뜬금없는 대성통곡은?

    눈치를 살피던 김찬영이 티슈를 뽑아 남윤수에게 건넸다.

    “아, 고맙다. 너무 맵다.”

    맵다면서 티슈로 입술이 아닌 눈을 꾹꾹 눌러 닦는다. 그러더니 아예 티슈를 눈에 올린 채 고개를 젖혀버린다. 콧구멍이 벌름거리는 게, 얘 진짜 많이 슬픈가 보다. 조용히 눈빛만 주고받았다.

    “왜, 수연이 때문에 그래?”

    석영의 물음에 남윤수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미안. 나와서까지 울 생각은 없었는데.”

    어깨를 축 늘어트린 남윤수가 눈에 붙은 휴지를 떼어내며 얼굴을 문질러 닦는다.

    내게 보낸 편지에는 하도 덤덤하게 서술해놔서 이별도 그냥 씹어 먹는 놈인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이렇게 슬픔이 큰 줄 알았으면 뭐라도 사서 보내줄 걸 그랬다.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법’, 뭐 그런 제목을 가진 책 같은 거.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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