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59화 (외전) (59/70)
  • 외전 1화

    [내 친구 누리에게.

    누리야, 안녕. 잘 지내니? 나는 죽지 못해 살고 있어.

    나는 네 안부가 궁금해서 이렇게 편지를 쓰는데, 요즘 너 통 답장이 없다?

    네가 지역번호 보고 내 전화를 피한다는 소문이 있어. 아닐 거라고 믿는다. 아니지? 우리 우정이 그렇게 가벼울 리가 없잖아. 난 널 믿어.

    혹시 나 몰래 이사 간 거니? 주소 바뀐 거면 알려줬겠지?

    네가 궁금할까 내 근황을 적어.

    나 수연이랑 헤어졌어…. 기다리기 힘들다고 내게 이별을 고했다. 찬영이는 고무신 거꾸로 신는 것보다 낫지 않냐고 하는데, 뭐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

    너는 어떻게 임석영 그 새끼를 기다렸니…? 불멸의 사랑이야 뭐야? 부러워서 이러는 거 아니다.

    아무튼 헤어진 날 조금 울었다고 모두에게 관심병사 취급을 받고 있어. 다들 잘 챙겨줘. 그래서 요즘 계속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 수연이 때문은 아니야. 나쁜 수연이.

    나 곧 휴가 나가는데 애들이랑 같이 보자. 엽떡 너무 먹고 싶어. 제발 같이 먹어주라.

    왠지 네가 여기까지 읽지도 않을 것 같아서 할 말은 많지만 이만 줄일게.

    누리야, 답장… 꼭 해. 안녕.

    아! 그리고 너 술 좀 작작 마시고 다녀라. 소문이 파다하다. 술 취해서 길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진짜 안녕.

    너의 편지를 애타게 기다리는 윤수가.]

    “너 윤수한테 나 술 많이 마신다고 한탄이라도 했냐?”

    편지를 접으며 묻자 앞에서 빨대를 입에 물고 딸기 스무디를 쪽쪽 들이켜던 석영이가 눈을 올린다.

    “윤수가 그래? 줘봐.”

    석영이가 편지를 가져가려고 해 홱 손을 뒤로 거뒀다.

    “야, 내가 술을 마시면 얼마나 마신다고.”

    그 말에 석영이의 입이 작게 벌어진다.

    “얼마나? 500cc 잔에 소맥 말아서 마시는 게 얼마나야?”

    “아, 그건 선배가….”

    “그러니까. 술 강요한다는 그 망할 선배. 그 선배가 있는 술자리에 왜 자꾸 끼냐고.”

    며칠 전에 애써 잘 마무리한 주제가 남윤수 때문에 다시 튀어나온다.

    선배 이름은 김광수. 학교의 온갖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후배들을 술의 구렁텅이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술을 건네는 방법은 다양했다. 처음엔 인사로 한 잔, 그러다 기분이 좋으니까 한 잔, 술잔을 기울이는 게 뜸해질 즈음엔 게임으로, 벌칙으로 몇 잔, 나중에는 주도를 안 지켰다며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몇 잔.

    군대에 있을 때 석영이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내가 술병으로 골골 앓는 거였다.

    처음에는 선배의 술 강요가 힘들어서 하소연을 하다가 나중에는 것도 내 무덤을 파는 것 같아서 술에 관한 이야기를 일절 함구했다.

    하지만 석영이가 군을 제대한 후에도 김광수는 과에 남아 있었고, 새파랗게 어린 학번에 속하는 나는 과 단합, 동기 사랑 등의 여러 명목으로 발을 붙잡혔다.

    석영이가 보기에 김광수는 눈깔부터가 음흉한 새끼였다. 그래서 김광수가 있는 술자리는 무조건 가지 않기를 원했다.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녔고, 꽤나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했다. 전공 필수 강의에서 재수강으로 들어온 김광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조별 과제가 생겨났고, 김광수와 조가 되었다. 그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몇 주 전.

    “얘들아, 고생 많았다.”

    교수님이 나간 강의실에서 김광수가 민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민수는 유난히 선배들을 어려워해서 김광수에게 자료 내놔라, 오늘까지는 진짜 내놔야 한다, 그런 말을 못 했다. 결국 민수는 저 홀로 김광수의 몫까지 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민수의 강의 노트에 ‘김광수 시발 새끼’라고 적혀 있던 낙서를 봤지만 못 본 척해줬다.

    “발표도 끝났는데, 치맥이나 먹자.”

    “저 오늘 지갑 안 가져왔어요.”

    어떻게든 자리를 무산시키고자 뱉은 말에 김광수가 국민은행 봉투를 꺼내 든다.

    “우리 지각비 걷은 걸로 먹어야지.”

    조별 모임에 안 나온 사람은 사정 봐주지 않고 지각비를 냈는데, 김광수 돈이나 다름없었다. 봉투 안에 든 돈의 9할이 김광수의 것이었다.

    “누리, 너 안 갈 거야?”

    고민했다. 김광수가 있는 자리는 싫은데, 김광수 지각비를 쓰는 곳에 빠지면 배가 아플 것 같다. 저 새끼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아니요? 가요, 가.”

    다음 모임 자리를 만들 수 없도록 저 봉투를 거덜 낼 목표를 가지고 함께 이동했다.

    어중간하게 술이 오르는 걸 싫어하는 김광수는 소주병을 들고 모두의 잔을 가정 방문 하듯 들렀다.

    “선배….”

    민수가 맥주에서 소맥이 된 자신의 술잔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야야, 이거 딱 한 잔만 마시고 가자. 응?”

    “한 잔이 치사량인데요?”

    내 말에 김광수가 막 웃는다. 눈치도 없다. 지금 네가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건데, 뭐가 좋다고 웃어….

    “너무 쓰면 안 마셔도 돼. 그런데 이렇게 마셔야 맛있거든. 그리고 어중간하게 마시면 애매해.”

    너만 애매하겠지, 새끼야, 생각하며 답답한 속을 술로 달랬다.

    닭다리나 빨리 뜯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그런데 과제 한다고 전날 밤을 새워서 그런지 술이 잘 안 받는 느낌이 들었다.

    “민수야, 나 화장실 갔다 올게.”

    “응. 어디인 줄 알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나려는데 바닥이 끈적거려 그런지 의자가 뒤로 안 밀렸다. 삐걱대다 멈춰버린 의자에 몸만 뒤로 기울었다.

    헛, 씨, 하며 팔을 휘두르다가 아무거나 붙잡았다. 바닥으로 넘어갈 뻔했던 몸이 다행히도 중심을 잡았다.

    “어어, 후배님, 왜 그래? 취했어?”

    휘두르며 붙잡은 게 김광수의 팔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광수가 내 어깨를 잡아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모양새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누리 언니, 괜찮아요?”

    “어어, 괜찮아.”

    걱정하는 동기들에게 웃어 보이며 몸을 일으키는데, 입구 앞에 서서 나를 보는 석영이를 발견했다.

    머리가 단계를 넘어가듯 상황을 인식했다. 석영이다. 석영이가 나를 보고 있다. 김광수가 나를 부축한다. 나는 술을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진다. 얼굴이 붉으면 취한 것처럼 보이고, 석영이는 김광수를 싫어한다.

    “야, 석영아, 안 들어오고 뭐 해?”

    주변으로 석영의 과 친구들이 보였다. 그러니까, 석영이 너도 치킨 먹으러 왔구나….

    정말 운이 지지리 없게도 석영이가 치킨 집에 과 친구들과 입장했다.

    “누리야.”

    조원들의 시선이 동시에 위로 향한다. 거기에 석영이가 굳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잠깐 나 좀 봐.”

    그렇게 말하고는 혼자 나가버렸다. 누가 봐도 찬 기운이 풀풀 날렸다.

    “누구야?”

    “누리 남친이요.”

    “아아, 졸라 잘생겼네.”

    속닥이는 조원들을 뒤로하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가게 옆 길목에 서 있는 석영이가 보였다. 다가가자 이 상황이 매우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본다.

    “술 많이 마셨어?”

    “아니. 나 생맥 한 잔도 다 안 마셨어.”

    “그런데 몸도 못 가눠?”

    “그런 거 아니야. 일어나려는데 의자가 안 움직여서 그랬어. 취해서 그런 거 아니야.”

    등받이도 없는 의자가 삐걱대서 몸이 반동했을 뿐인데, 석영이 눈에는 내가 만취한 걸로 보였단다.

    “저 새끼 술 들어가면 이상해진다며. 내가 저 사람 되도록 피하라고 했잖아. 특히 술자리는….”

    “조별 과제 뒤풀이라니까. 나만 빠질 수도 없잖아.”

    “과제가 뭐 별거라고 뒤풀이까지 해?”

    이 말은 조금 상처가 됐다. 과제 별거 아닐 수 있지. 그런데 이것도 나름 내 생활의 일부인데 싸잡아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런데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했어? 나는 과제 뒤풀이도 하면 안 돼? 너도 축구 하고 뒤풀이하잖아.”

    “네가 자꾸 취하니까 그렇지.”

    “야, 술 좀 취하면 안 되냐? 내가 뭐 길바닥에서 잠들기를 했어 어쨌어?”

    조금 감정이 격해졌다. 쓸데없는 감정 과잉이라 생각되었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취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몸으로 흡수된 알코올 때문인 것 같았다.

    “저번에 길바닥에 누워 있었잖아.”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방금 말은 하지 말걸, 하고 후회가 밀려든다. 할 말이 없는데, 섭섭하긴 하고, 괜히 씨근덕거리며 석영이를 노려봤다.

    “가방 챙겨서 나와. 데려다줄게.”

    “싫어.”

    감정이 과잉된 결과가 이거다. 석영이가 무슨 말을 하든 그 반대로 작용하는 것.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삐뚤어졌다.

    “이것도 나름의 내 약속이고 관계야. 무시당한 것 같아서 솔직히 기분이 그래.”

    둘 다 잠시 침묵했다. 석영이가 한숨을 뱉으며 침묵을 깬다.

    “알았어.”

    그렇게 그냥 갈라졌다. 석영이도 나를 따라 가게로 들어와 제 친구들에게로 갔을 줄 알았는데, 자리에 앉고 보니 없었다. 그냥 그대로 가버린 건가. 아니, 화를 낼 사람은 난데 왜 지가 그래?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저쪽에 앉아 있는 석영이의 친구들이 과 사람들과 나가는 나를 봤다. 그중 한 명과는 안면이 있는지라 눈인사를 했다.

    핸드폰에 아무런 연락이 안 들어왔다.

    “해보자 이거지.”

    술도 마셨겠다, 심술만 올랐다.

    하루 내내 석영이는 연락이 없었고 물론 나도 안 했다. 연락은 안 했으나 애먼 핸드폰만 붙잡고 대화창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어이가 없네, 하는 말을 한 100번 정도 되뇌고는 잠이 들었다.

    강의실에 들어오는 내 얼굴이 어딘가 불퉁했는지, 먼저 와 있던 연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언니?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왜?”

    “그냥,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요.”

    “아무 일도 없는데?”

    하하, 하고 웃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액정을 깨우자 시간만 뜬다.

    임석영…. 오늘도 연락을 안 한다 이거냐.

    콧바람을 뿜으며 핸드폰을 넣었다. 강의가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왔다. 신경이 오로지 연락 없는 석영이에게만 쏠렸다. 앞자리에 앉은 연주의 등 뒤에 핸드폰을 숨기고 석영이와 나눈 메시지를 훑었다. 엄지가 키패드 위에 올라갔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석영아 어제는 내가]

    아, 아니야.

    다다닥, 입력한 메시지를 지웠다.

    [야 너 왜 연락을 안 하냐]

    고민하다가 이것도 지웠다.

    [화났어?]

    이게 가장 적절한 내용 같았으나, 보내지 않고 그대로 메시지 창을 내렸다. 사소한 문제였는데, 이게 뭐라고 우리가 하루 동안 연락을 안 하게 된 건지.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강의고 뭐고 집에 가고 싶다.

    “언니, 공강이죠? 카페 갈까요?”

    연주가 팔짱을 끼며 묻는다.

    “그래. 단거 먹어야지. 오늘은 휘핑을 두 배로 올려달라고 해야겠어.”

    “네네! 케이크도 먹어요!”

    피식 웃으며 강의실을 나서는데 복도 한쪽에 서 있는 석영이가 보였다. 나를 발견하더니 이쪽을 향해 온다.

    “어? 석영 오빠?”

    “안녕, 연주야.”

    “언니 만나러 왔어요? 언니 기분 안 좋아 보여서 휘핑 잔뜩 올라간 커피 마시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요.”

    멋쩍게 웃는 석영이의 손에 테이크아웃 해 온 일회용 컵이 한 개 있다.

    “아….”

    연주가 작게 탄식하고.

    “미안. 누리 것만 사 왔네.”

    “아니에요.”

    눈치를 살피던 연주가 언니, 아무래도 카페는 다음에 가야겠네요, 하며 팔짱을 풀었다.

    “저 그럼 먼저 가볼게요.”

    연주가 인사를 하고 멀어졌다. 하이 톤의 연주가 사라지고 나니 어쩐지 어색한 공기가 맴돈다.

    “네가 좋아하는 코코아야.”

    “코코아는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툴툴거리듯 말을 뱉자 석영이가 아니야, 하며 내 손에 컵을 쥐여준다. 꽤 오래 기다렸는지 손에 쥔 컵이 조금 식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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