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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홍차-58화 (완결) (58/70)
  • 제58화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열어봤다. 노트나 문제집이 들어 있을 줄 알았던 가방 안을 채우고 있는 건 사탕이었다. 청포도, 프루팁스, 호올스, 멘토스, 츄파춥스. 그 개수가 못해도 100개는 넘어 보였다.

    “이게 다 뭐야.”

    손을 넣어 사탕을 한 움큼 쥐었다. 한 손에 잡힌 사탕은 고작 다섯 개였다. 사탕 하나를 까먹은 뒤 임석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사탕 장사 해?]

    그러자 얼마 안 있어 답장이 들어왔다.

    [석영원한사랑: ㅋㅋㅋ 바보냐]

    누구보고 바보래.

    왼쪽 뺨에 있던 사탕을 오른쪽으로 굴려 넣은 뒤 키패드를 두드렸다.

    [뭔 군것질 거리를 이렇게 많이 샀어 나는 만두 좋아해 만두]

    [석영원한사랑: 알지 김누리 만두 좋아하는 거]

    [석영원한사랑: 자기가 사탕을 왜 받은 줄도 몰라]

    [석영원한사랑: 내가 왜 너한테 사탕을 준 줄도 몰라!]

    “뭐래….”

    오도독, 사탕을 씹으며 핸드폰 화면을 껐다. 앞자리에 앉은 경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봤다.

    “뭐야? 고백받은 거야?”

    “응?”

    경주가 사탕이 잔뜩 든 가방을 눈짓했다.

    “오늘 화이트데이잖아.”

    “화이트데이?”

    중학교 때에야 무슨 데이다, 뭐다 해서 남자애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여자애들도 우르르 몰려가는 그런 풍경이 있었는데, 몇 년 사이에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런 이벤트 따위.

    “부럽다.”

    경주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돌렸다.

    어, 이 사탕, 그래서 일부러 학교까지 와서 주고 간 건가. 부리나케 핸드폰 화면을 켜고 임석영에게 답장을 써서 보냈다.

    [알아! 네가 나 좋아하니까 준 거잖아!]

    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서 느낌표는 왜 썼지, 그런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멀뚱히 앉아 있다가 사탕을 한 움큼 쥐어 경주에게 주었다. 경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탕을 받았다.

    “화이트데이면, 그런 거잖아. 좋아하는 친구한테 사탕 주는 거.”

    “어… 그렇지.”

    “네가 내 앞자리라서 좋아. 앞으로도 잘 지내자, 경주야.”

    경주는 수업 시간에 조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꾸벅꾸벅 졸 때도 경주를 방패 삼아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경주가 내 앞자리라서 좋다는 건 100퍼센트 진심이었다.

    두 손바닥을 붙여 사탕을 들고 있던 경주가 씩 웃었다. 경주를 보다가 나도 따라 웃었다.

    사탕 하나를 더 까서 먹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석영원한사랑: 그래]

    꽤나 간결한 답장에 뭔가 기분이 상했다. 뭐야, 답장이 이게 다야? 별것도 아닌데 괜히 꿍해지려고 하는 찰나, 뒤이어 메시지가 들어왔다.

    [석영원한사랑: 내년에도 줄 거야]

    뒤이어 들어온 메시지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임석영에게 보낼 이모티콘을 고르는데 메시지가 또 들어왔다.

    [석영원한사랑: 내후년에도 줄 거고]

    [석영원한사랑: 평생 줄 거야]

    멍하니 메시지를 들여다봤다. 평생이라는 두 글자에 괜히 뭉클해진 탓이다.

    “뭐야….”

    평생 안 주기만 해봐라.

    히죽 웃으면서 답장은 딱딱하게 보냈다.

    [기대하마]

    *

    복학 기념으로 비상금을 털어 임석영에게 갈비를 사줬다.

    내가 살게! 많이 먹어! 말하고 들어간 식당에서 임석영은 열심히 굽고 나는 열심히 먹었다. 석영아, 왜 너는 안 먹어? 너도 먹어, 하고 말했지만 쌈 하나 싸주지 않는 나를 보며 임석영은 불판을 갈아달라고 했다.

    식당에서 나와 밤길을 걸었다. 고기를 굽는 연기에 갇혀 있다가 나온 탓에 밤공기가 선선하니 좋았다. 길옆으로 높은 화단이 하나 있었다. 걸음을 옮겨 화단에 올라앉자 임석영이 천천히 걸어와 내 앞에 선다.

    임석영은 서고, 나는 화단에 앉으니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졌다. 두 다리를 허공에서 물장구를 치듯 교차하며 흔들었다.

    “야, 아직도 갈비 냄새 나는 거 같아.”

    팔에 코를 묻고 킁킁거리자 임석영이 나를 따라 하듯 제 팔에 코를 묻었다.

    “안 나는데.”

    “안 나? 너 코 막힌 거 아니야? 풀풀 나는데.”

    앞에 선 임석영의 옷을 끌어다가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안 나기는….

    “나잖아.”

    빤히 나를 내려다보던 임석영이 씩 웃는다. 입술을 꾹 붙인 채 늘이자 한쪽 볼에 보조개가 점처럼 파였다. 임석영은 웃을 때 한쪽 볼에만 보조개가 파였는데 그게 사람 눈을 묘하게 끌어당겼다.

    물장구치듯 움직이는 내 발을 내려다보던 임석영이 내 뺨에 붙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나 너한테 줄 거 있는데.”

    멀뚱히 임석영의 행동을 봤다. 가방 속으로 임석영의 손이 깊게 들어갔다. 들어갈 땐 임석영 손뿐이었는데 나올 때는 흰색 운동화와 함께였다.

    “뭔데 이게?”

    “복학 선물.”

    “이거 아니야?”

    손을 올려 머리에 꽂혀 있는 머리핀을 가리키자 임석영이 그것도 맞고, 하며 무릎을 쪼그려 앉았다.

    “임석영 완전 이벤트 장인이었네….”

    혼잣말처럼 뱉은 말에 임석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그냥.”

    다가오는 임석영의 손에 훅 뒤로 발을 뺐다. 그러자 임석영이 고개를 올려다 나를 본다.

    “왜?”

    “시, 신발을, 벗기게?”

    “신어봐야지.”

    임석영이 신발을 두 손으로 잡아 벗겼다. 발목을 감아오는 손길에 순간 몸이 흠칫 떨렸다.

    두 손으로 화단의 테두리를 짚은 채 내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임석영의 모습을 보았다. 숱이 많은 머리칼이 임석영의 머리를 가지런히 덮고 있다.

    임석영이 내 발목을 잡은 채 운동화 뒤축이 꺾이지 않게 뒤꿈치를 밀어 넣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발목이 간질거렸다.

    “신발 선물하면 그거 신고 도망간다고 하잖아.”

    끈을 매듭지어 묶은 임석영이 고개를 든다.

    “그래서 또 도망이라도 가게? 이런 거 선물 안 해도 잘만 가던데, 도망.”

    “야, 그건….”

    “닭 날개 먹으면 바람피운다고 하는데, 김누리 못 먹게 해야겠다.”

    “헐? 닭이 무슨 죄가 있어?”

    “이 신발은 무슨 죄가 있어, 그럼.”

    누가 죄가 있다고 했나. 그냥 그런 말이 있다, 그거지.

    “진짜 또 말없이 사라지면 나 운다.”

    임석영이 운동화 앞코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잘 맞네.”

    임석영의 무릎을 가볍게 툭 쳤다.

    “고마워. 잘 신을게.”

    히죽 웃은 임석영이 시선을 내렸다. 임석영의 손이 종아리에 닿았다. 엄지손가락이 부드럽게 종아리를 쓸었다. 집요하게 한 곳만 쓸어내리는 손길에 몸이 굳었다.

    “여긴 왜 이래?”

    손이 닿아 있는 곳을 보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다가 배기통에 덴 자국이었다. 배기통 더럽게 뜨겁네! 하고 말았는데, 화상을 입은 것처럼 진물이 차오르더니 검게 자국이 남았다.

    “아… 별거 아니야. 오토바이에 데었어.”

    허리를 숙이고 쓱쓱, 종아리를 쓸어내리며 임석영의 손을 떨어트리려는데 내 손 위로 임석영이 손을 올려 겹쳐 잡았다.

    “많이도 데었다.”

    임석영의 눈이 내 종아리를 훑는 게 보였다. 어둡게 남은 자국이 괜히 민망해 다리를 겹쳤다. 그런다고 해서 감춰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 중에 유독 나프탈렌 냄새가 심하게 나는 애가 있었다. 아이들은 걔와 짝이 되는 걸 싫어했고, 그 아이는 그걸 애써 모른 척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숨길 수 없고,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종아리의 상처도 내가 지나온 시간에 대한 흔적이자 설명이었다. 퍽 마음에 드는 흔적은 아니라서, 임석영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그만 봐.”

    발을 화단 벽에 툭툭 부딪쳤다. 잠깐 떨어졌던 임석영의 손이 종아리에 따뜻하게 닿았다. 그러다 불쑥 얼굴이 가까워졌다. 눈을 휘둥그레 뜨는 순간 임석영의 입술이 어둡게 상처가 아문 곳에 지그시 닿았다.

    “어, 어, 야.”

    임석영의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한 손으로 내 종아리를 그러잡은 임석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맞췄다. 허리를 숙인 탓에 마주 본 거리가 가까웠다. 시선이 맞물린다.

    “…뭐야, 왜 그렇게 보는데.”

    툴툴거리듯 말을 뱉고 허리를 폈다.

    “보면 안 돼?”

    임석영이 그렇게 말하며 일어난다. 머리를 쓰다듬더니 느지막이 입을 연다.

    “있잖아, 나는 네가 보는 풍경들이 항상 궁금했어. 그 속에서 내가 어떤 모습일지도. 내가 바라본 풍경 속에는 항상 네가 있었거든.”

    “…….”

    “그게 너무 이상했어. 내가 바라본 곳에 늘 네가 있다는 게. 그러다가 나중에는 생각했어. 네가 바라본 곳에도 늘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임석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나를 상상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나는 매일 너를 상상했거든.”

    마주 보고 선 임석영이 내 이마 위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부드럽게 쓸어 넘긴다.

    임석영의 뒤로 꽃망울이 없는 나뭇가지가 밤을 가로질렀다. 며칠 뒤면 저 마른 가지에 분홍색 꽃망울이 생겨나고, 하나둘 꽃이 피어나다가, 만개할 것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꽃잎이 날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 길을 걸었던 우리를 떠올렸다. 그날, 눈을 돌릴 때마다 맞물리던 임석영의 시선이, 그 무심한 낯이, 그러나 이따금씩 흔들리던 눈빛이 생각났다.

    아마도, 어쩌면, 우리는 그날부터 서로에게 마음을 쏟았는지도 모르겠다.

    “석영아.”

    “응?”

    “여기 벚꽃 피면 또 오자, 우리.”

    물끄러미 나를 보던 임석영이 입술을 늘이며 기분 좋게 웃었다. 한쪽 뺨에 보조개가 깊게 파인다.

    상체를 기울인 임석영이 내 이마에 지그시 입을 맞췄다. 눈꺼풀을 내리자 보이던 풍경이 잘려 나가며 검은 고요가 밀려들었다.

    이마에서 떨어진 입술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내려와 귓가에 닿았다.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듯해 흠칫 몸을 떨었다.

    “누리야, 늘 내 곁에서 오늘을 살아줘.”

    임석영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곳곳에 스몄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에서부터 무언가 뜨거워졌다. 코끝이 찡해지는데, 입술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 밤이 끝나가는 것 같아 슬프고, 깊어가는 것 같아 좋았다.

    꾹 감고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올렸다. 귓바퀴로 임석영의 입술이 가볍게 스치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귀에 감겼다.

    “그게 내 소망이야.”

    시야로 임석영이 들어왔다. 정확하게 시선이 맞물렸다. 가까이 마주 본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가장 진실 되고 투명한 문처럼, 내 마음이 비쳤다.

    씩, 입술을 늘여 웃자 임석영도 입술을 늘여 웃었다. 임석영의 한쪽 뺨에 보조개가 파였다.

    네 안에 내가 머무는 집이 있다면, 그건 보조개가 파이는 너의 뺨이면 좋겠다. 늘 네 웃음 속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호선을 그린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춘 채 숨을 들이켜자 비누 향이, 임석영에게 붙어 설 때마다 맡아지던 그 냄새가 은근하게 숨에 섞여 들었다. 석영이가 내 아랫입술을 포개어 물었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닿는다.

    너와 있을 때, 나는 늘 뜨거워지는 것 같다.

    입술을 떼면 임석영에게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서늘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쳤다. 봄 냄새가 우리 주변을 맴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꽃망울을 준비하는 나뭇가지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의 숨을 나눈다.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임석영의 향이 내게로 쏟아진다. 마주 보는 마음과 함께.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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