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고작 두 살 차이가 날 뿐인데도 반 아이들의 패기가 감당이 안 됐다. 뭐 이렇게 목소리가 크고, 안에 또 화는 얼마나 많은지. 등교 첫날부터 서로 눈을 부라리고 기 싸움을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학교에 강은호가 한 명만 있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이건 뭐, 각 중학교의 강은호들이 한 살 더 먹고 모인 광경 같다고나 할까. 어떤 모습으로 학교를 다니든 험난한 건 같구나,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깔았다.
쉬는 시간에 교실 뒤에서 닭싸움을 하는 애들이 없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쉬는 시간마다 옥상으로 대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편했지만.
점심시간, 식판을 들고 아무도 없는 빈자리에 앉았다. 식단표를 확인하지 못하고 왔는데 떡국이었다. 김 가루가 뿌려진 떡국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 떡국을 만들어 주겠다던 임석영이 떠올랐다.
핸드폰을 꺼내 떡국을 사진 찍어 임석영에게 전송했다.
[오늘의 급식]
오래 지나지 않아 임석영에게 답장이 왔다.
[나는 카레 먹었어]
[이미 먹고 나와서 사진은 없는데]
[내 후식 사진이라도…]
메시지 뒤로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양파링을 입에 물고 있는 임석영의 얼굴이 네모난 사진 안에 담겼다. 임석영의 뒤로 양파링으로 귀걸이를 만들어서 하고 있는 남윤수가 보인다. 장소를 보아하니 운동장 앞 계단이었다. 피식, 가볍게 웃고는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숟가락을 들고 떡국을 한 숟가락 크게 퍼서 입에 넣는데, 웬 무리들이 내 주위에 탁, 탁, 탁, 식판을 놓고 앉았다. 왠지 낯설지 않은 풍경에 꼴깍, 침이 넘어갔다. 비어 있던 테이블에 검은 무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아, 미친. 설날도 아닌데 무슨 입학 첫날부터 떡국이냐.”
“내 말이. 고등학생 된 것도 징그러워 죽겠는데. 세 그릇 먹으면 대학생 되냐?”
“대학은 갈 수 있고?”
“닥쳐라, 새끼야.”
힐긋, 아이들의 얼굴을 살피는데 괜히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무슨 1학년 얼굴이 저렇게 험악해. 얼른 식판 비우고 나가야지, 생각하며 밥 먹는 속도를 높였다.
빠르게 식판을 비우고 있는데 앞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젓가락 하나에 소시지를 쿡쿡쿡 꽂은 뒤 하나씩 빼 먹고 있을 때였다. 소시지를 꽂은 젓가락을 든 채 흘긋 눈을 올렸다.
앞에 앉은 남자애가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뭐지. 혹시 다른 곳을 보는 건가, 싶어 두리번거렸다. 주위를 살피고 다시 남자애를 보았다. 두 눈이 똑똑히 나를 겨누고 있었다. 왜지. 괜히 민망해져 눈을 내리깔고 소시지를 두 개씩 빼 먹었다.
“김누리?”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내리깐 눈이 절로 올라갔다. 내 명찰을 보던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 친척 형이랑 이름이 똑같네.”
아, 그렇구나, 누리가 흔한 이름이긴 하지, 하고 답하려다가 말해 뭐 하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넌 어디 중 나왔어?”
“차조중학교.”
남자애의 얼굴이 언뜻 찌푸려지더니, 이내 웃음기가 돈다.
“나도 거기 나왔는데. 왜 처음 보지?”
그야 너는 올해 졸업했고, 나는 몇 년 전에 졸업했으니까.
딱히 대답하고 싶지는 않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얼마 안 남은 떡국을 싹싹 긁어 먹는데 내 말 씹어? 하고 남자애가 말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남자애를 보았다.
처음 볼 수도 있지. 나도 너 처음 보는데. 그리고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려, 하고 생각했으나.
“아… 잘 안 들려서.”
이걸 변명이랍시고 했다. 남자애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남자애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았다. 서우영.
그의 옆에 앉은 애들이 입학 첫날 서우영과 말을 섞고 있는 나를 힐끔거렸다.
갑자기 홍차연 명찰을 달고 학교에 갔던 첫날의 급식실 광경이 떠올라 식판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과 비슷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든 탓이다.
퇴식구에 식판을 반납하고 급식실을 나왔다. 급식실 앞으로 나무가 줄줄이 심어져 있었다. 겨울을 버틴 나뭇가지가 휑했다.
급식실 앞에서 바라본 학교의 풍경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전에는 급식을 먹고 나오면 공을 차는 아이들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는데.
저편에서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교실을 향해 걸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섰다. 휘적휘적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내 가방을 잡아당겼다. 갑자기 잡힌 가방에 몸이 휘청거리며 걸음이 뒤로 갔다.
“누, 누구세요?”
가방이 잡혀 몸이 완전히 안 돌아갔다. 몸을 최대한 틀어 뒤를 보았다. 올려다본 곳에 급식실에서 봤던 얼굴이 있었다.
“서우영?”
“어, 내 이름 아네?”
툭, 힘주어 몸을 틀자 가방을 쥐고 있던 서우영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손가락으로 재킷에 박힌 명찰을 가리켰다.
“아는 게 아니고 보인 거.”
서우영이 눈을 내려 내 손가락이 향한 곳을 확인했다. 아, 하며 정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잘 안 들린다고 해서. 부르려다가 잡은 건데. 너 이거 놓고 갔더라.”
서우영이 뭔가를 내밀었다. 그의 손에 있는 것을 보았다.
“바나나 우유?”
내가 언제 이걸 놓고 가. 산 적도 없는데, 하고 생각하는 찰나 급식이 생각났다.
생각해보니 후식으로 나온 우유를 챙겼는데 먹지는 않았다. 급하게 식판을 정리하고 나오면서 놓고 온 모양이었다. 그걸 이렇게 챙겨준 건가. 쓸데없이 친절하네.
“아, 고마워.”
내가 놓고 간 거라는데 안 받기도 뭣해서 건네받았다. 이제 볼일이 끝났으니, 각자 갈 길을 갑시다, 생각하며 걸음을 돌리는데 서우영이 따라왔다. 곁눈질로 훔쳐보다가 거리를 벌리는데 서우영이 간격을 다시 좁히며 붙어 섰다.
“야, 같은 중학교 나왔는데 너 나 몰라?”
“모르는데.”
“어떻게 몰라?”
“모를 수도 있지.”
옆에 선 서우영이 뚫어져라 내 얼굴을 응시했다. 뭔데 부담스럽게 저래. 불만스럽게 쳐다보자 서우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말이 안 되는데.”
서우영의 눈이 가늘어지는 동시에 어디선가 임석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김누리!”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소리가 난 곳을 보았다. 재킷 안에 후드를 껴입은 임석영이 멀리서 보아도 매우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걸어오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임석영이 가까워지자마자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뭐야? 어떻게 왔어?”
“어떻게 오긴. 버스 타고 왔지.”
무표정한 얼굴로 앞에 선 서우영을 노려보던 임석영이 고개를 낮게 숙이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 지금 여기서 너한테 뽀뽀해도 돼?”
팔꿈치로 임석영의 옆구리를 툭 쳤다.
“죽을래?”
“안 되는구나.”
서우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임석영을 번갈아 봤다.
“뭐야? 너 남자 친구 있어?”
“있어? 이써어어? 누나한테 말이 좀 짧다.”
서우영이 미간을 찌푸리고서 임석영을 봤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표정이었다. 저가 보기에는 오늘 같이 입학한 친구인데 누나라고 부르라니 이상할 만도 하다.
“…뭐라는 거야.”
그러더니 말없이 걸음을 돌렸다. 멀어지는 서우영의 모습을 임석영이 활활 타는 눈으로 좇았다.
“그만 노려봐….”
임석영의 얼굴 앞으로 손을 올리고 휘휘 흔들었다. 서우영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던 임석영의 시선이 내게로 온다.
“여기 앞에 현수막이라도 걸까?”
“뭐라고.”
“김누리 하트 임석영.”
“…….”
“임석영의 영원한 동반자 김누리의 복학을 축하합니다.”
“…….”
“여기 임석영의 사랑 김누리가 다니다.”
“내가 죽었냐. 여기 잠들다도 아니고. 뭐야, 그게.”
임석영이 끙, 하고 콧등을 찡그리더니 한 팔로 내 목을 감았다. 뒤에서 나를 안은 채 부스럭거리더니 갑자기 내 머리에 뭔가를 꽂았다.
“어, 뭐야?”
핸드폰을 들어 올린 임석영이 전방 카메라를 켜고 화면에 우리 둘의 모습을 담았다. 카메라에 비친 머리에 노란색 머리핀이 꽂혀 있다.
“복학 선물.”
물끄러미 화면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모나게 꽂긴 했어도 옆머리를 잘 쓸어 올려 꽂은 게 귀여웠다. 핸드폰을 들고 선 임석영이 얼굴을 가까이 붙이더니 혼자서 씩 웃었다. 왜 웃지, 생각하는 찰나 찰칵하고 사진이 찍혔다.
“뭐야!”
분명 내 두 눈 흐리멍덩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사진을 찍기가 있나. 홱 몸을 돌려 핸드폰을 뺏으려고 하자 임석영이 팔을 높이 들며 웃었다.
“이건 네가 나한테 주는 선물.”
“아, 다시 찍어. 다시.”
“싫은데?”
임석영이 팔을 높이 든 채 고개를 젖히고 혼자서 사진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입술을 벌리고 웃었다. 임석영의 한쪽 볼에 보조개가 깊게 파였다.
“김누리, 진짜 귀여워.”
임석영이 웃는 낯으로, 사진 속의 우리를 보며 말했다.
*
수업 끝종이 울렸다. 선생의 퇴장과 함께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두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창가 옆자리라 그런지 넘어온 햇살에 자주 졸음이 몰려왔다. 이번 시간도 잠이 와서 죽는 줄 알았다.
멀뚱히 앉아 있다가 엠피스리를 꺼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에 섰다. 창틀에 몸을 기대고 이어폰을 귀에 꽂는데 교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음?”
귀에 꽂으려던 이어폰을 손에 쥐고 창문을 내다봤다. 뭔가 익숙한 모습에 눈이 가늘어지는 순간 핸드폰이 진동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잠깐 교문으로 나와봐]
임석영이다. 메시지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저 사람, 왠지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
엠피스리를 집어넣고 교실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본관을 나서려다가 멈칫 섰다.
나아간 걸음을 뒤로 물려 유리에 비친 얼굴을 살폈다. 앞머리를 쓸어내리고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단정하게 넘겼다. 턱 밑으로 내려온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가 주머니에서 립밤을 꺼냈다.
립밤 뚜껑을 여는데 여학생 두 명이 본관을 향해 걸어왔다.
“야, 교문 앞에 봤냐?”
“봤지. 완전 봤지. 겁나 잘생겼더라.”
“개 잘생김.”
“누구 만나러 온 거 같지 않냐.”
“누구인지 볼까?”
본관으로 들어가려던 아이들이 걸음을 멈추더니 후다닥 뛰어 벽 뒤에 숨었다. 숨는 모습을 내가 다 봤다. 입술에 아무것도 바르지 못한 채 뚜껑을 돌려 닫았다. 갑자기 민망해진 탓이다.
애써 귀 뒤로 넘긴 머리칼을 빼내 얼굴을 가리고 교문으로 걸어갔다. 연청바지에 남색 맨투맨을 입은 임석영이 보였다. 맨투맨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스트라이프 티셔츠가 귀엽다.
눈가를 문지르고 있던 임석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씩 미소를 짓는다.
오늘 수수고등학교는 개교기념일이다. 그래서 김찬영, 남윤수와 셋이서 도서관에 간다고 그랬는데.
“무슨 일이야?”
“줄 거 있어서.”
임석영이 메고 있던 가방을 내게 건넸다.
“뭐야?”
“선물이야.”
임석영이 잡고 있는 가방을 보다가 눈을 올렸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임석영이 내 팔을 잡아 올려 손수 내 어깨에 메여줬다.
“갑자기?”
임석영이 반대쪽 팔도 들어 가방끈을 올린다. 선물이면 이게 가벼워야 하잖아. 그런데 왜 자꾸 어깨가 아래로 처지는 느낌이 드는지. 꽤나 묵직했다.
“이거 완전 그거잖아. 가방 셔틀.”
“너한테 주는 건데 어떻게 셔틀이냐?”
“안에 뭐 들었는데? 네 짐 아니야?”
“다 네 거야.”
시작종이 울렸다. 임석영이 어, 종 쳤다, 하고 말하더니 한 걸음 다가와 상체를 숙였다.
불시에 내 이마로 임석영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이마로 낯선 감촉이 스며들고, 임석영의 맨투맨이 얼굴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지그시 이마를 누른 임석영의 입술이 떨어졌다.
“끝나면 연락해.”
멀어지는 임석영을 보다가 조용해진 학교가 느껴져 재빠르게 교실을 향해 달렸다. 선생보다 한발 빠르게 교실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보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뜬금없이 웬 선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