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아득하게 파도 소리가 밀려왔다. 별이 촘촘하게 박힌 밤하늘에 파도 소리가 섞이고, 어디선가 풀벌레가 울었다.
평상에 누워 있는 우리를 보고 잠자리에 들기 전 할머니가 모기향을 피워주고 들어갔다. 모기향 냄새에 막걸리 냄새가 섞였다. 옆에 누운 임석영에게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바닥에서부터 피어올라 온 연기가 멀리 올라가지 못하고 흩어졌다. 평상에 모로 누워 하늘을 보는데 손가락 끝에 무언가 툭 닿았다.
시선을 내려다보자 대자로 누운 임석영의 손이 내 손가락 끄트머리에 닿아 있다. 약지 손톱을 살포시 누른 임석영의 손가락을 보다가, 손을 움직여 임석영의 손가락을 살며시 잡았다. 손에 잡힌 임석영의 손가락이 조금 차다.
하늘을 보던 임석영의 고개가 내 쪽을 향해 내려왔다. 물끄러미 녀석의 얼굴을 보았다. 술기운이 도는지 뺨이 붉고 나를 보는 눈이 조금 나른해 보였다. 평상에 누워 흐트러진 머리칼이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그러다 한 번, 세찬 바람이 허공을 스쳐 지나갔다. 솨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나뭇잎이 저들끼리 부닥치고, 바람을 이겨내지 못한 나뭇잎들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흩날렸다. 바람에 밀린 수면이 더 크게 일었는지 파도 소리가 더 크게 울린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마당을 밝히고 임석영은 나른해진 시선으로 나를 계속 응시했다.
여름 냄새가 났다. 한낮의 더운 열기가 식고, 새벽을 지나가는 시간의 선선한 바람이 옷깃에 스몄다.
“나 없이 잘 지냈어?”
한동안 침묵하던 임석영이 말했다.
“나는 진짜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어. 처음엔 너무 황당해서 진짜 네가 너무 어이없고 안 봐도 그만이다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다소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귀에 감겼다.
“네가 콩콩콩 걸어 다니던 모습이 자꾸 생각나고, 입에 설탕 묻히고 핫도그 먹던 거 생각나고, 너랑 같이 버스 타고 집에 가던 거, 걸어 다닌 길, 그냥 온통 다 너무 소중한 기억뿐이라 누가 훔쳐 간 것도 아닌데 돌려달라고 기도도 했어.”
물끄러미 나를 보던 임석영이 몸을 돌리며 자세를 바꿨다. 평상에 한쪽 어깨를 붙이며 몸의 방향을 내 쪽으로 놓더니 잡고 있는 내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렸다.
임석영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 손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너는 여기 있어.”
임석영의 목소리가 낮게 울린다.
“여기서 네가 자꾸 뛰어.”
평상에 등을 붙이고 누워 있다가, 몸을 돌려 임석영을 바라보았다. 잡혀 있는 손을 빼서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살짝 스친 이마가 뜨겁다.
“너 몸이 뜨겁다.”
“너 때문이야.”
“술 때문이겠지.”
“인정.”
툭, 웃음이 터졌다.
“심장 빨리 뛰는 것도 술 때문 아니냐.”
“…어, 그런가. 아닌데. 이건 너 때문인데.”
임석영이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곤 제 손을 가슴에 올리고 심장 박동을 느끼더니 눈썹을 찌푸리고 집중했다.
“누리, 누리, 하고 뛰는데.”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무표정한 얼굴로 임석영을 보았다.
“야, 그런 말 하지 마. 징그러워.”
“징그럽다고?”
임석영이 태연하게 제 가슴을 문질렀다.
“진짜인데. 들어볼래? 누리, 누리, 하고 뛰어.”
“하지 마.”
임석영이 몸을 일으키더니 내 머리를 잡아당겨 제 가슴에 파묻는다.
“들어봐. 진짜야.”
“아, 아, 하지 마라. 놔라.”
몸을 버둥거리며 떨어지려고 하자 임석영이 머리를 더 단단히 잡고 당겼다.
“아, 놔. 놓으라고 했다.”
힘을 주며 버티자, 임석영이 작게 웃으며 내 머리를 놓았다. 그러더니 상체를 일으킨 채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봤다.
내 위로 드리운 임석영을 보다가, 뭔가 자세가 심상치 않음에 꼴깍 침을 삼켰다. 묘한 분위기에 내가 어색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임석영의 손이 이마 위로 내려왔다.
“아!”
짝, 소리가 나게 붙은 손바닥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마 위에 얹은 손을 임석영이 부드럽게 쓸어 올려 앞머리를 넘겼다.
“누리야.”
“왜?”
“나 사랑해?”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직설적인 단어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네가 그렇게 사라지고 생각해 봤거든. 너를 영영 못 보는 게 무서운 건지, 네가 나를 안 좋아하는 게 무서운 건지. 둘 다더라고.”
“…….”
“영영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지금 이렇게 너를 보고 있으니까. 해결 못 한 궁금증은 네 마음, 그거 하나야.”
살짝 말아 문 입술이 임석영의 긴장을 보여주는 듯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눈을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녀석의 시선을 피했다.
“누리야, 나 좋아해?”
평상에 한쪽 뺨을 붙이고 평상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뗐다.
“좋아하지.”
평상과 뺨 사이로 임석영의 손이 들어오고, 내 얼굴을 잡아 돌려 눈을 맞춘다.
“내 눈 보면서 말해주라.”
“…….”
“내 얼굴 보면서 말해줘.”
이게 뭐라고 이렇게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요동치는지 모를 일이다. 바람 때문인가. 우리를 내려다보는 밤하늘의 별 때문인가. 솨아아, 하고 흔들리는 나뭇잎 때문인가. 저 멀리서 일렁이는 바다 때문인가. 은은하게 흩어지는 가로등 불빛 때문인가.
임석영의 시선이 빤히 닿는다. 무표정한 그 얼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합니다, 임석영 씨.”
좋아한다고 했는데, 내 대답이 영 딱딱했는지 임석영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다.
“다른 버전은 없어?”
“…뭐.”
“석영아, 라고 부를 수도 있잖아.”
임석영 씨, 그것도 네 이름인데. 뭐가 문제지.
“아이 러브 석영….”
내 말에 임석영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하며 인상을 썼다. 좋아한다고 말하면 말할수록 임석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았다.
“원하는 게 대체 뭔데? 그럼 네가 먼저 말해봐.”
내 말에 임석영이 어쭈, 하며 뺨을 꼬집었다. 뺨이 늘어난 채 장난스러운 얼굴로 임석영을 보았다. 아마 임석영이 듣고 싶은 말은 저번에 버스에서 따라 해보라고 한 석영아 사랑해, 그 말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임석영도 내게 누리야, 사랑해, 라고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아 괜히 심술이 났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해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삐죽이는데 임석영이 꼬집은 뺨을 놓고 내 뒤통수를 잡아 올렸다.
“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임석영을 보는 동시에, 임석영의 상체가 낮게 내려왔다. 간격을 좁혀 오는 얼굴에 눈을 크게 뜨다가 질끈 감았다.
입술 위로 생경한 느낌이 내려앉았다. 한 번도 닿아본 적 없는 임석영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뜨거운 숨이 닿는다. 순간 얼어버린 몸에 호흡이 멎었다.
가만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임석영이 내 아랫입술을 포개어 물었다. 계속 숨을 참기가 어려워 조심스레 뱉었다. 호흡하며 살짝 벌어진 입술로 임석영이 입술을 더 깊게 맞물려왔다.
발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멱살을 잡은 것처럼 임석영의 옷깃을 힘주어 쥐고 눈을 꾹 감았다. 멀어진 숨결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상체를 뒤로 물린 임석영이 달뜬 숨을 뱉으며 나를 봤다.
“…….”
말없이 시선이 맞물렸다. 앞에 있는 녀석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다.
임석영이 구깃구깃해진 옷을 펴지도 않은 채 뒤로 물러났다. 자기가 해놓고도 당황스러운지 마른세수를 했다.
“아….”
그러곤 혼자 괴로운 신음을 뱉으며 나를 등졌다.
“졸라 흥분되네….”
임석영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혼잣말처럼 뱉은 말이 귀에 쏙 박혔다. 흥분, 흥분이라니요. 너무나 낯선 단어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다가 우리가 한 게 키스는 아니지 않나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입술만 닿았는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달래 주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싶어 조심스레 임석영의 너른 등을 토닥였다. 내 손이 닿자 임석영이 몸을 움찔 떨며 나를 돌아봤다.
“아니. 너 괜찮은가 해서….”
임석영이 빤히 나를 본다. 뺨은 터질 것처럼 붉어 가지고는. 제 등을 토닥이는 내가 저와는 다르게 태연하다고 보는 듯했다. 그게 조금 억울한지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다.
나를 등지고 앉아 있던 임석영이 무릎의 방향을 틀었다. 꿇어앉은 자세로 나를 보더니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눈 감아봐. 다시 해볼게.”
임석영이 천천히 내게 가까워지고.
“야, 뭐, 뭘 다시 하는데?”
“방금 한 거. 내가 너무 서툴렀어.”
서슴없이 가까워지는 거리에 한 손을 잽싸게 올려 임석영의 이마를 빡 때리며 막았다.
“아악! 잠깐만!”
“왜.”
호흡이 가빠진다.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아니, 떨려서. 호흡 좀.”
내 말에 임석영이 눈을 끔벅이다가 입술을 꾹 문다.
“이제 해도 돼?”
후, 하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비장하다.
숨결이 가까워지더니, 입술이 닿았다. 눈을 감았다. 임석영이 포개어 문 아랫입술을 천천히 빨아들이더니 윗입술을 포개어 물었다.
뺨을 쓰다듬던 임석영의 손이 목덜미를 감쌌다. 깊게 맞물리는 입술에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달뜬 숨에 어깨가 올라가고, 맞붙은 임석영의 몸이 뜨겁게 느껴졌다.
얼마간 입술을 비볐는지 모르겠다. 얼굴을 떨어트리고 눈을 떴을 때, 어딘가 휘몰아치는 눈동자가 앞에 있었다.
“너는 나한테 너무 소중해.”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임석영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임석영의 손이 내 눈을 덮는다. 시야가 캄캄해지고, 눈가로 임석영의 체온이 옮겨 왔다.
“나도 너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어.”
어떤 답을 내놓기 위해 달싹이는 입술 위로 임석영의 입술이 닿았다. 서로의 입술이 맞물린 채 생각했다.
너는 이미 내게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고.
*
아침, 작은방 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임석영의 몸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임석영.”
문고리를 잡은 채 임석영을 불렀다. 이불 위로 불쑥 손이 튀어나오더니 이불을 잡아 아래로 내린다. 내려온 이불 위로 임석영의 얼굴이 드러났다. 머리가 부스스했다. 게슴츠레 뜬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잠이 아직 덜 깬 모양이다.
“아침 먹어.”
“나 아침 안 먹는데.”
“내가 너 먹이려고 볶음밥 했어.”
“…그럼 먹어야지.”
임석영이 몸을 일으켜 앉아 흐트러진 머리칼을 꾹꾹 눌렀다. 그러곤 벌떡 일어나 이불을 반듯하게 개켜 정리하고 방을 나왔다.
밥상이 단출했다. 김치볶음밥에 냉장고에 있는 반찬이 전부였다. 숟가락을 든 임석영이 두 손을 모으고 잘 먹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할머니는 새벽 일찍 밭에 나가 둘만 먹는 식사였다.
임석영이 한 수저 가득 밥을 떴다. 별로 대단한 요리를 한 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이 됐다. 맛이 없으면 어쩌지, 걱정이 되어 힐끔 임석영을 보았다.
맛있다거나 짜다거나 싱겁다거나 무슨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임석영이 말없이 밥만 먹었다. 접시에 코 박은 듯 수저질을 계속하는 임석영을 보다가 그의 수저 위에 소시지 하나를 올렸다. 그제야 임석영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맛있어?”
내 물음에 임석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떡국 잘 끓여. 내가 다음에 만들어줄게.”
“떡국?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응. 할머니가 알려줬어. 설이 됐는데도 떡국 주는 사람 없으면 스스로 챙겨 먹으라고.”
물끄러미 임석영을 보다가 웃었다.
“기대하고 있을게.”
소시지를 입에 집어넣은 임석영이 입술을 붙이고 씩 웃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할머니가 돌아왔다. 내 손에 지폐 몇 장을 쥐어주더니 친구 가는 길을 배웅해 주라고 했다.
감자 한 박스를 임석영에게 주려고 하기에 할머니,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가, 라고 하자 할머니는 아, 그렇지, 하며 박스를 놓고 임석영의 주소를 받았다.
멀리 안 나가, 라고 한 할머니는 마당까지도 안 나왔다. 마루를 밟고 서서 손을 흔들었다. 더 많이 못 챙겨줘서 미안하네, 하면서.
신발을 꿰어 신고 마당으로 나온 임석영이 할머니를 보며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와. 누리 친구.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영달이?”
“…석영입니다. 임석영이요.”
“아, 그렇지. 석영이 또 누리 보러 오게.”
“네.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조만간 또 올 거예요. 진짜 올게요!”
임석영이 할머니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을 대문 앞에 서서 건너다보았다. 부서진 햇살 때문인지, 눈이 부셨다. 빛이 걸린 임석영의 머리칼이 반짝 빛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