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54화 (54/70)
  • 제54화

    매미가 목을 놓아 운다. 높이 뜬 것만 같은 하늘이 푸르고, 하얀 구름이 듬성듬성 하늘을 채웠다. 흙길 옆으로 아득한 바다의 수평선이 보였다. 햇빛이 바다 위로 부서지고, 반짝인다.

    여름이 됐다.

    “사장님, 파 한 단 주세요.”

    텅 빈 슈퍼에 들어서 외치자 안쪽에서 누군가 부채를 펄럭이며 고개를 내민다. 손님이 온 것을 확인한 슈퍼 주인이 슬리퍼를 신고 나와 파 한 단을 건넸다.

    “오늘도 걸어왔어?”

    “네.”

    “자전거를 사라니까?”

    슈퍼 주인이 부채질을 계속하며 돈을 받았다. 부채질에 꼬부라진 머리칼이 펄럭인다. 계산대로 걸어가 돈 통을 열고 받은 지폐를 넣더니 거스름돈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손바닥 위로 동전이 짤랑이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그것을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안녕히 계세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슈퍼를 나왔다. 슈퍼 주인이 날도 더운데, 자전거를 사라니까, 하며 혀를 찼다.

    슈퍼에 들어서며 벗었던 선 캡을 다시 머리에 썼다. 커다란 챙에 얼굴로 그늘이 졌다. 파 한 단을 품에 안고 걸음을 뗐다.

    할머니는 섬으로 들어와 감자 재배를 시작했다. 혼자 하겠다며 너는 네 할 일이나 알아보라고 했지만 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밭에 난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할머니 대신 감자를 들고 시장에 나가 팔았다.

    섬으로 온 바로 다음 날, 섬에 딱 하나 있는 이동 통신점에 갔다. 내 핸드폰을 살펴보더니, 이건 수리 업체에 가야 한다고 했다. 그게 어디에 있는데요, 묻자 섬에는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날이 늦어 바로 그다음 날 할머니 몰래 배를 타고 육지로 갔다. 길을 묻고 물어 수리 업체에 갔고, 메인보드가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수리비가 많이 드나요? 묻자 못 고친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나 새로 사세요, 하는 직원에게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안녕히 계세요, 그건 헤어질 때 하는 인사인데. 정말 모든 게 이별의 급물살을 타고 흘러갔다. 핸드폰에 든 모든 것들이 그냥 가버렸다. 안녕히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 켜지는 핸드폰을 붙들고 잠들기 전마다 전원을 눌러봤다. 그러던 어느 날 전원이 켜지면 어쩔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석영은 이제 고3이 될 테고, 나는 할머니를 이 섬에 두고 나갈 수가 없다.

    석영아, 안녕. 나 누리. 나는 지금 섬에서 감자를 재배하고 있어, 너는 잘 지내고 있니? 우리는 이제 만날 수가 없겠구나, 잘 지내고, 잘 지내. 뭐 그런 인사를 하게 되려나.

    그날 밤, 빨랫줄에 널어져 있는 내 바지를 보았다. 꽃무늬가 촘촘하게 박힌 일 바지. 내일도 저 바지를 입고 할머니와 함께 밭에 나갈 내 모습을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그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슈퍼가 있는 동네를 벗어나 둘레길에 접어들었다. 바다를 옆에 끼고 걷는 길이 한적했다. 슬리퍼를 질질 끌자 흙먼지가 날린다. 밀려든 파도가 갯바위에 부딪치며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을 보았다.

    선착장을 지나서 길을 틀었다. 바다를 등지고 길을 걷는데 마을 어귀에 있는 정자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어수선했다.

    “뭐라고? 안 들려!”

    “누리요, 누리. 김누리! 키 요만해 가지고, 어린 여자애요. 몇 가구 없어서 물어보면 바로 알 거라던데?”

    “여기 마을에 사는 사람이 몇인데, 내가 다 알아?”

    느려지던 걸음이 멈췄다. 정자에 모여 있는 사람 중 한 명의 키가 유난히 크다 싶었는데,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람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저쪽에 가서 한번 물어봐.”

    “어디요?”

    “저기, 저 선착장 사람들. 배 타고 드나드는 사람들 매일 보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남자가 걸음을 옮기며 모자를 벗는다. 눌린 머리칼을 손으로 헤집으며 흐트러트리더니 다시 모자를 쓰려는 듯 머리를 반듯하게 뒤로 쓸어 넘긴다. 앞머리가 그의 손에 쓸려 넘어가며 가려져 있던 얼굴이 시원하게 드러났다.

    임석영이다. 예상치 못한 인물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 졸라 덥네. 진짜.”

    모자를 눌러쓴 임석영이 선착장을 향해 걸었다. 베이지색 반바지에 파란색 티셔츠, 색깔도 튀어 눈에 훤히 들어왔다.

    너무 놀라 몸이 얼었다. 눈동자를 굴려 그의 걸음을 좇았다. 선착장을 향해 걷던 임석영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파 한 단을 품에 안고 서 있다가 급하게 선 캡의 챙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너무 다급하게 챙을 내린 탓에 챙이 완전히 얼굴을 가리는 모양새로 내려왔다. 시야 확보가 안 될 정도로.

    아니, 나 왜 숨었지.

    스스로도 이유를 몰랐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고, 어디로 걸어야 할지를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그림자가 드리웠다. 톡톡, 얼굴을 가린 챙을 앞에 선 사람이 손가락으로 튕기듯 두드렸다.

    “여보세요.”

    “…….”

    “김누리 씨.”

    “…….”

    “연락도 없이 사라지셔서 살아 있나 확인하러 왔는데요.”

    두 손에 파를 꼭 들고 숨을 죽였다. 너무 듣고 싶던 음성이 바로 앞에서 흩어지자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이 섬 안으로 임석영이 들어오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는데. 하필 이런 모습일 때 만나게 될 건 뭐람.

    고개를 숙이자 녀석의 손이 얼굴을 가린 선 캡의 챙으로 올라왔다. 챙을 잡더니, 천천히 들어 올린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얼굴 좀 보여주면 안 될까.”

    파를 꼭 끌어안은 채 고개를 들었다. 챙이 올라가 확 트인 시야로 임석영의 얼굴이 보인다.

    허공에서 시선이 맞물리고,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핑 눈물이 돌아 울상이 되자, 엷게 웃는 임석영의 눈망울에 눈물이 맺힌다.

    “네가 드니까 파도 꽃 같다.”

    임석영의 말에 픽 웃음이 터졌다. 내가 웃으니 임석영도 따라 웃고, 눈이 접히면서 녀석의 뺨으로 눈물이 떨어진다. 손을 올려 임석영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쳐 닦았다.

    “너는 왜 울어.”

    내 말에 임석영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울음을 참는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나보고 너 버리면 죽여 버린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나를 버려, 왜.”

    “내가 언제 너를 버렸어….”

    “버린 거지.”

    울컥 올라오는 울음에 입술이 휘어 내려갔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임석영을 보았다. 임석영이 눈가를 문지르는 척 제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았다.

    “임석영 우네.”

    “안 울어.”

    “우는데?”

    눈가를 문지르던 임석영이 주먹을 쥐고 가볍게 꿀밤을 놓더니 내 어깨를 그러안았다.

    “이건 우는 것도 아니야. 너 그렇게 가고 나서는 밤마다 존나 울었어.”

    “…내가 뭐라고 밤마다 우냐.”

    손을 올려 임석영의 등을 토닥였다.

    “대역 끝나면 만나 준다더니. 지킨 약속이 하나도 없어, 김누리.”

    “…….”

    “한 번만 더 말없이 사라지면 가만 안 둬.”

    답이 없자 임석영이 꼭 붙였던 상체를 뒤로 물리며 나를 내려다봤다. 어? 하고 묻는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모자도 예쁜 걸로 골라 썼네.”

    임석영이 내가 쓴 선 캡을 보더니, 두 손으로 턱을 잡아 올렸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다가온다. 입을 맞추는 건가 싶었는데 모자챙이 내 이마에 탁 부딪쳤다. 다가오던 얼굴이 멈췄다. 마주 보는 간격이 좁다.

    눈을 깜박거리자, 임석영이 민망한 듯 히죽 웃으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더운데.”

    “응?”

    “냉수 한 잔 주면 안 될까.”

    선착장에서 배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햇볕이 머리를 뜨겁게 데우고, 가까이 붙어 선 임석영에게서 비누 향이 은은하게 흩어졌다.

    *

    기름 냄새가 퍼졌다. 할머니는 묵묵히 파전을 부치고, 노릇노릇 익어가는 전을 임석영은 무릎을 꿇고 앉아 쳐다봤다. 기름에 번들거리는 뒤집개를 든 할머니가 임석영을 곁눈질했다.

    “거, 편하게 앉으라니까.”

    “지금 완전 편합니다!”

    임석영이 무릎 위에 둔 주먹을 불끈 쥐며 허리를 곧게 펴고 말했다.

    종지에 간장을 따르고 참기름과 고춧가루를 부어 상 위에 놓았다. 할머니가 다 부친 전을 그릇에 옮겨 담았다. 젓가락을 양손에 쥐고 동그란 파전을 찢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파전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할머니의 입에 넣어주었다. 할머니가 열이 오른 프라이팬에 파전 반죽을 둥그렇게 부으며 입을 오물거린다.

    이제 내가 파전을 한 입 먹으려는데 임석영이 젓가락을 든 채 나를 빤히 봤다.

    “왜.”

    내 물음에 임석영이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린다. 그 모습을 할머니가 봤다.

    “손 뒀다가 어디다 쓰냐.”

    할머니의 목소리에 임석영이 민망한 듯 입을 다물고,

    “한 입 줘라, 그냥.”

    뒤따라온 말에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내 무릎을 툭툭 건들며 입을 벌렸다.

    “아.”

    “손 있잖아, 너.”

    내 말에 입을 다문 임석영이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너희 할머니도 손 있으시잖아.”

    이 무례한 새끼를 봤나.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보자 임석영이 입술을 말아 물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저 혼자 알아서 파전을 집어 먹었다.

    할머니가 부친 파전이 열 장이 넘었다. 임석영은 탑 쌓듯 올라간 파전을 보며 아직도 많이 남았네, 하며 젓가락질을 느리게 했다.

    반죽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할머니가 뒤집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 왔다.

    “억지로 안 먹어도 돼. 누리 혼자 열 장은 먹어.”

    할머니가 막걸리 뚜껑을 돌리며 말했다. 임석영의 느려진 젓가락질과 다르게 점점 속도가 빨라지던 나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열 장 아니라니까.”

    내 말에 할머니가 얼토당토않다는 듯 웃었다.

    “한 잔 줄까?”

    할머니가 나를 보며 물었고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의 시선이 임석영에게로 옮겨 가고, 임석영이 넙죽 두 손을 내밀며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할머니, 얘 고등학생이야.”

    “아니야. 어른이랑 마시는 술은 괜찮다고 그랬어.”

    할머니한테 한 말인데 임석영이 잽싸게 답했다. 임석영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할머니가 소리 내 웃었다.

    할머니와 임석영이 막걸리 잔을 짠, 하고 소리 내며 부딪치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임석영이 밥그릇 가득 채워진 막걸리를 한 번에 들이마셨다.

    얼굴을 찌푸리고 크으,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계속 할머니의 술 상대가 되려는 건지 빈 그릇을 할머니 앞으로 내밀었다. 할머니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임석영이 내민 그릇에 막걸리를 따랐다.

    “그나저나 돌아가는 배는 끊겼겠네?”

    할머니의 말에 임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밤만 재워주세요.”

    “집에 말씀은 드렸고? 부모님이 걱정하셔.”

    “친구 만나러 간다고 말씀드리고 왔어요.”

    “집이 좁아. 방이 두 개밖에 없어. 하나는 창고처럼 쓰는데.”

    “괜찮습니다. 그 방이라도 내어주시면 조용히 자고 갈게요.”

    할머니가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막걸리 잔을 들었다. 그러자 임석영이 빠르게 잔을 들어 건배를 하고 막걸리를 마셨다.

    어쩌려고 저렇게 마시나, 했는데 콧등을 찡그리며 술을 넘긴 임석영이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괜찮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임석영과 함께 마당 평상에 누워 하늘을 봤다. 고층 건물이 없고 늦은 밤이 되면 섬 내부에 있는 집의 불이 대부분 꺼져 밤하늘이 유독 어둡고 별이 잘 보였다.

    “와….”

    평상에 누워 하늘을 보는 임석영이 감탄하듯 소리를 뱉었다.

    “별 많지.”

    “응. 이런 하늘 처음 봐.”

    어두운 밤하늘이 푸르렀다. 그렇게 보였다. 누군가 흘리고 간 것만 같은 별이 선명하게 빛났다. 그 빛이 조금 꿈처럼 느껴졌다. 지금 내 옆에 함께 있는 임석영처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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