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52화 (52/70)

제52화

뒷짐을 지고 서 있던 홍 회장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돌렸다. 그러곤 눈이 마주쳤다. 살벌한 시선이 내게 꽂힌다.

“갑자기 학교를 옮겼다기에 오자마자 들렀다.”

홍 회장이 느린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이 묘하게 굳는다. 홍 회장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가슴으로 옮겨 가는 게 보였다. 명찰을 잃어버려서 며칠 전에 새로 샀는데, 그냥 사지 말걸, 하는 후회가 일었다.

“도련님, 잘 지내셨습니까.”

홍 회장의 비서가 웃으며 인사했다.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는 느낌에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트렸다.

한 발자국, 홍 회장이 다가왔다. 시야로 들어온 홍 회장의 구두를 보았다. 분명 누군가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고 했을 텐데,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홍차연.”

“…….”

묵직한 음성이 머리 위에서 울렸다. 다리가 자꾸 후들거렸다. 가슴이 답답한 게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를 보고 한 마디도 안 하는구나.”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홍 회장의 손가락이 턱에 닿았다. 턱을 들어 올리는 힘에 속절없이 고개가 올라갔다.

아무런 감정도 안 느껴지는 홍 회장의 눈이 내 얼굴을 쭉 훑었다. 홍 회장의 눈을 애써 피하는데도 사나운 기운이 그대로 전달됐다.

“하.”

홍 회장의 입에서 한숨 같은 웃음이 터졌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두툼한 손바닥이 뺨으로 날아들었다.

“회장님!”

홍 회장의 비서가 내 뺨으로 날아든 홍 회장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저가 보기에도 너무 뜬금없는 폭력이었을 것이다. 뺨을 내려치는 힘이 얼마나 셌는지, 몸이 돌아갔다. 입 안이 터지는 듯한 통증에 두 손으로 맞은 곳을 감싸고 시선을 돌렸다.

홍 회장이 걸음을 돌려 교무실을 나갔다. 홍 회장의 비서가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다가 내 어깨를 토닥이고는 홍 회장을 따라갔다. 비서는 내가 홍차연인 줄 아는 모양이고, 홍 회장은 내가 홍차연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 쪼그려 앉아 뺨을 문질렀다. 맞은 곳이 점점 뜨거워졌다.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던 선생이 다가와 나를 일으켰다.

“아, 아니…. 괘, 괜찮니?”

아버지라고 찾아온 작자가 때리고 간 것이니, 경찰을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

선생이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의자에 앉혔다. 2학년 담임들만 쓰는 교무실인지라 교무실엔 나를 데려온 선생 한 명뿐이었다. 그녀는 홀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답이 안 서는 듯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학교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집에 알리는 게 우선일 텐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들을 때리고 갔으니 선생으로서도 대책이 없는 게 당연할 것이다.

“선생님, 괜찮아요.”

“혹시 집에서도 자주 이러니?”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계속 앉아 있다가는 나에게도 선생에게도 난감한 상황이 생길 것 같아 의자에서 일어났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교무실을 나서려는데 선생이 조심스레 팔을 잡았다.

“차연아, 혹시 도움이 필요하거든 담임 선생님께 도움을 구하고, 그게 힘들면 선생님한테 와도 좋아.”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고 교무실을 나섰다. 문을 닫고 나와 복도에 섰다.

아무도 없는 복도는 긴 터널처럼 비었고, 교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들이 알아들을 수 없게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하늘이 푸르고, 목화솜 같은 구름이 속도를 가늠할 수 없게끔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교실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를 서성이다가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는데 뺨이 붉다.

“힘도 좋으시네.”

거울 가까이 얼굴을 내밀고 입술을 벌렸다. 어금니라도 나간 건 아닌가, 하고 살펴본 치아가 멀쩡했다. 이가 하나라도 빠졌으면 미친 척 폭행으로 고소해볼까 했는데,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한 짓도 고소당할 짓이긴 했으니까.

홍차연은 홍 회장이 7월이나 되어야 돌아온다고 했는데, 아마 말없이 일찍 들어온 모양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모님이 전학 절차를 밟기 전에 학교로 찾아온 걸 보면, 어쩌다 이야기가 새어 나간 것 같았다.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홍차연이 다닌다고 들은 학교로 온 거겠지. 거기서 나를 봤고, 제 아들이 아닌 것을 안 것이다.

“홍차연 오늘 엄청 맞겠네.”

물끄러미 거울 속 나를 바라보다가 수도 레버를 올리고 세수를 했다. 뺨에 물이 닿을 때는 통증 때문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고개를 들고 거울을 봤다. 턱에 맺힌 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가지를 뒤집어쓴 것 같은 머리, 빨갛게 부은 뺨, 가슴에 붙은 홍차연의 명찰, 내 것이 아닌 교복.

홍 회장이 돌아왔으니, 이제 정말 끝이다. 홍차연 명찰을 달고 있는 것도.

*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걸었다. 나를 찾아온 사람은 누구인지, 무슨 일인지, 임석영이 재차 물었지만 별일 아니라고 답했다.

“진짜 말 안 해줘?”

“말해줄 게 없다니까 그러네.”

임석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더니 포기한 듯 어깨에 팔을 두르며 몸을 당겼다.

“안 믿지만 믿어줄게.”

“…학교인데, 좀 떨어져줄래.”

팔을 올려 임석영의 옆구리를 밀어냈다. 그러자 임석영이 헤드록을 걸었다. 임석영의 팔에 얼굴이 걸린 채 끙끙거렸다.

“야, 놔라!”

팔을 잡고 버둥거리자 임석영이 소리 없이 웃으며 장난을 쳤다. 놔라,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하는 말을 반복해서 뱉다가 교문에 가까워져서야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얼굴에 눈이 동그래졌다가, 사색이 됐다.

“뭐야.”

임석영이 교문 앞에 서 있는 재민을 발견했는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뱉었다. 내 머리를 감싸고 있던 팔이 느슨해지자 자세를 고치고 섰다.

“…누리… 아니, 어….”

재민이 난감한 얼굴로 나를 봤다. 내 이름을 부르려다가 내 이름을 부르면 안 될 상황에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저 형 그때 그 형이지?”

임석영이 물었고, 나는 얼었다.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아….”

재민이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핸드폰이 물에 빠진 후 전원을 꺼놔서 재민의 전화가 온 걸 전혀 몰랐다.

“아니,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있지. 학교 앞까지 찾아올 건 뭐야.”

임석영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홍 회장 일이 있기 전부터 운세를 찾아볼 만큼 오늘 하루가 이상하긴 했다. 손이 종이에 베어 데일밴드를 붙였고, 다리엔 멍이 들었다. 오늘 가장 최악인 일은 홍 회장의 방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루가 아직 남았음을 인지하지 못한 탓이다. 가장 괴롭고도 슬픈 일은 왜 항상 마지막을 장식하는 걸까.

재민의 옆에 키가 작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할머니였다.

“…누리, 너.”

할머니가 나를 불렀고, 나는 걸음을 떼지도, 입을 벌리지도 못한 채 할머니를 봤다. 힘없이 펴진 할머니의 손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톡, 하고 한 번 튀어 올랐다가 떨어진 물건을 봤다. 명찰이다. 그 명찰에 새겨진 이름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할머니의 시선이 교문에 붙어 있는 현판으로 향했다가 다시 내게 돌아왔다. 휘청거리는 할머니를 재민이 부축하듯 잡았다.

할머니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가, 멈췄다.

“…네가, 어떻게.”

할머니가 하얗게 질린 낯으로 나를 봤다.

뭔가가 망한다는 건 이런 걸까. 단추를 잘못 꿰어 잠근 옷을 발견했을 때,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는데 버스 카드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그러니까, 뭔가가 이미 많이 진행된 후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모든 게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집, 그 집을 떠올릴 때면 모든 불행이 해소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멀쩡한 집이 없는 나로서는 그것만이 이 팍팍한 삶에 환기구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랬는데, 나를 보는 할머니의 표정이 낯설다. 할머니 또한 나를 그렇게 느끼고 있겠지. 이런 내가 낯설다고.

갑작스러운 파도나 폭풍우에도 꿋꿋하게 항해를 이어가던 배가 목적지를 잃고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만 같다. 구름 한 점 없고,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없는 잔인한 고요 속에서. 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배 위에서 나는 울먹였다.

홀로 남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이 시간을 버텨왔는데, 그게 누구를 위한 일이었는지, 갑자기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

재민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가자고 했다. 교문 앞에 세워져 있는 재민의 차로 향하더니 나를 살피지도 않은 채 올라탔다.

재민을 보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임석영은 내 이름을 부른 할머니를 보고서는 상황을 대충 파악한 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봤다. 집으로 올 거지? 하고 임석영이 물었다. 임석영이 말하는 집은 홍차연의 모친이 구해준 집이었다. 할머니는 그 집에 대해서 모르고, 나조차도 오늘 내 행방에 대해 예측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홍 회장의 집으로 갔고, 내가 따라 들어가려고 하자 눈을 부릅뜨며 막았다.

네 집으로 가 있어.

그게 홍 회장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 할머니가 내게 뱉은 말이었다.

계단을 오르자 몇 달간 찾지 않았던 옥탑이 나왔다. 문 앞에 보자기로 싼 물건이 있었다. 쪼그려 앉아 보자기를 풀었다. 반찬통이었다.

“할머니가 너 집에 안 들어오는 것 같다고, 혹시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알고 있냐고 전화해서 물어보셨어.”

“…오늘?”

“아니. 그건 며칠 전에. 그런데 오늘 갑자기 만나자고 하셔서 너한테 전화했는데 꺼져 있더라. 오늘 그 집 발칵 뒤집어졌나 봐. 걔 아빠한테 들킨 거지?”

“…응. 할머니가 뭐래?”

“몰라. 그 집 아들이고 엄마고 울고 난리도 아니었다던데. 할머니한테 말을 한 건 아닌데 느낌이 이상했대. 그래서 만나자고 하셨나 봐. 만나자마자 갑자기 여기 학교로 가자고 하시더라.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자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뱉자 재민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미안해. 도움이 못 됐어.”

“…아니야. 오빠가 도와줄 게 뭐가 있어. 내가 미안.”

집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옥상에 있는 평상에 앉았다. 재민과 나란히 앉아 있다가, 평상에 드러누워 하늘을 봤다.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아까 옆에 있던 애, 같은 반 친구라고 했던가?”

재민이 평상에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응.”

“걔는 네가 여자인 거 알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임석영 눈에 나는 김누리의 정체를 알고 있다, 라고 써져 있기라도 한가.

말없이 쳐다보자 재민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너 좋아하는 거 같던데.”

정면을 보던 재민의 시선이 다시 내 얼굴로 돌아온다.

“아니야?”

“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 표정이 어색하기라도 했는지 재민이 싱겁게 웃었다.

“걔 얼굴이 거짓말을 못 하던데.”

임석영 얼굴이 어땠기에? 내가 봤을 때는 재민을 못마땅하게 노려보고만 있었는데. 누가 봐도 성격 더러운 고등학생 얼굴을 하고서.

“누리 너도 그 친구 좋아해?”

재민이 물었다. 임석영 얼굴에는 표가 나고 내 얼굴에는 아무런 표도 안 났던 모양인가. 끔벅끔벅, 재민을 보다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재민과 마주 보는 눈의 위치가 엇비슷해졌다. 입술을 잘근잘근 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해.”

재민의 시선이 물끄러미 내 얼굴에 닿는다.

“어이없지? 남들 속이면서 학교 다니는 주제에.”

갑자기 내가 한심하게 느껴져 고개를 숙였다. 재민도 아마 나를 그렇게 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의 손이 머리 위에 가볍게 닿았다. 동그란 머리통을 쓱쓱 문지르더니 손을 거두어갔다.

“누구를 속였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

“…….”

“아마도 학교 친구들은 너를 귀엽고 성격 좋았던 친구로 기억할 거야. 이름은 그냥 그때의 너를 지칭하는 표일 뿐이잖아.”

고개를 들어 재민을 보았다.

“거기에 네 진심이 없었던 건 아닐 거 아니야. 친구들을 대하는 너는 너였을 테니까.”

재민이 엷게 웃더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누리야, 다 잘될 거야.”

재민의 옆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올려 하늘을 봤다. 하늘이 더 짙은 보라로 물들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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