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50화 (50/70)
  • 제50화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눈이 떠졌다.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느낌이 태어나 처음 겪는 종류의 고통이다. 손을 올려 머리를 짚으려는데 팔이 안 움직였다. 몸을 누르는 무거운 느낌에 찌푸린 눈을 바르게 떴다. 바로 앞에 임석영의 얼굴이 있다.

    “어….”

    벌어진 입을 급하게 다물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가만 감긴 눈꺼풀이 보인다. 곧은 콧대와 두툼한 입술. 어떻게 된 애가 얼굴에 잡티 하나가 없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넘어왔다. 눈동자를 굴려 현재 우리의 상태를 살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임석영과 한 이불을 덮고 있었다. 내 머리는 임석영의 팔 위에 있고 임석영은 품 안에 나를 꼭 안고 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건 둘째 치고,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애들이 원카드를 하고 있었는데. 애들은 대체 언제 갔고 이불은 언제 폈으며 왜 임석영과 나는 이런 꼴로 누워 있는 것인가.

    눈을 깜박거리며 임석영의 얼굴을 보는데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숨을 죽이고 자는 척을 했다.

    아, 세상에. 신이시여. 임석영도 일어나 우리가 이렇게 누워 있는 꼴을 본다면 퍽 당황할 텐데. 대체 이 자세는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내가 자다가 굴러 들어온 것인가, 임석영이 자다가 굴러 들어온 것인가.

    눈을 감은 채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임석영이 말한다.

    “얘 어제 분명 양치했는데. 술 냄새 엄청 나네.”

    기억이 났다. 맞다. 나 어제 아이시스 생수를 들이켜 마셨는데 고량주라고 그랬다.

    미친, 술 냄새가 나다니. 눈을 감은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가 계속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럼 지금 이 냄새는 콧바람에서도 난다는 것인가. 숨을 안 쉴 수는 없는 노릇이라 꾸물거리며 고개를 슬쩍 내렸다.

    “그런다고 술 냄새가 안 나냐고.”

    얘 왜 자꾸 혼잣말하는 거지.

    “좋은 아침이야.”

    임석영의 손이 이마로 올라왔다. 앞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쪽, 소리를 내며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그 바람에 번쩍 눈을 떴다. 임석영과 눈이 마주쳤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빛이 임석영의 얼굴을 밝힌다.

    “자는 척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지?”

    아닌데, 나 진짜 지금 눈 떴는데, 하고 말하려다가 술 냄새가 더 날까 싶어 입을 안 열었다. 고개를 뒤로 빼고 거리를 벌렸다.

    “너 자면서 혼잣말 엄청 하더라.”

    “내, 내가?”

    “응.”

    “뭐라고? 또 만두 좋아한다고 그랬어?”

    임석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뒤로 물러난 내 어깨를 잡아당기더니 제 품 안에 넣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임석영 좋다고. 간만에 옳은 소리를 하던데.”

    제가요?

    임석영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거짓말, 하고 말했다. 머리를 쓸고 내려온 임석영의 손이 목덜미에 닿았다. 따뜻한 체온이 옮겨 온다.

    “석영아아, 나 버리묜 진짜 죽능다아아.”

    “장난하지 마….”

    “장난 같지?”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꼭 붙은 임석영의 몸이 따뜻하다. 그의 체온을 느끼다가 몸을 꿈틀거리며 뒤로 뺐다.

    “왜?”

    임석영이 팔에 힘을 풀지 않은 채 묻는다.

    “아니, 갑자기 문이라도 열리면.”

    “잠갔어.”

    헐, 하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야, 그러면 애들이 완전 오해하지!”

    둘이서 한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있었다, 하는 이야기까지 퍼지면 빼도 박도 못하고 무슨 짓 하는 애들 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됐다.

    “태욱이랑 은솔이 옆방에서 잤어.”

    “…아, 진짜?”

    그거 다행이군, 생각하는데 임석영이 뒷말을 이었다.

    “네가 거실 구석구석에 토했다고 하니까 안 오더라.”

    “…….”

    그 부분은 다행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어제 그랬어?”

    “아니, 안 그랬어.”

    “그런데 왜….”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니. 정녕 나를 토쟁이를 만드는 것밖에는 수가 없었던 것이니, 하는 얼굴로 임석영을 보았다. 임석영이 씩, 입술을 늘여 웃으며 뺨을 꼬집었다.

    “애들 오기 전에 빨리 먼저 씻어.”

    *

    “영역 표시의 장인, 홍차연 선생님 들어오십니다.”

    “모두 박수!”

    버스에 오르자 먼저 타 있던 김태욱과 정은솔이 박수를 유도했다. 김윤환을 비롯한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내가 닭싸움은 너한테 져도 술은 안 진다.”

    김윤환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다들 옆방에서 모여 잤다더니, 거기서 술을 마신 모양이다.

    “…대단하구나.”

    대꾸는 해줘야 할 것 같아 김윤환을 향해 엄지를 펴고 작게 흔들었다.

    수학여행 둘째 날이 되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려 삼나무 길을 걷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려 점심을 먹었다. 문학관에 들러 강의를 듣기도 했다. 날이 화창했다. 문학관 강의가 끝난 뒤 다시 우르르 버스에 올랐다.

    한참을 달린 버스가 해변에서 섰다. 푸르게 펼쳐진 바다에 아이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해변에서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김윤환과 닭싸움을 한판 붙었고 내가 이겼다. 모래사장에 엎어진 김윤환이 내 언젠가 너를 꼭 이기리라! 하고 소리쳤다.

    임석영과 남윤수, 김찬영과 함께 모래사장에 앉아 모래성 깃발 뺏기를 했다. 두꺼비집처럼 모래성을 쌓은 뒤 그 가운데 나뭇가지 하나를 꽂아 순서대로 돌아가며 모래를 파내고 깃발을 쓰러트린 사람이 지는 게임이었다.

    “야, 벌칙이 있어야지.”

    남윤수의 말에 김찬영이 뭐? 하고 물었다.

    “진 사람 바다 입수.”

    “안 돼.”

    “안 돼.”

    남윤수의 말에 임석영과 김찬영이 동시에 말했다. 남윤수가 둘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임석영과 김찬영이 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냥 아이스크림 쏘기나 해.”

    “겨우 아이스크림?”

    “돈 많아? 요즘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비싼데.”

    김찬영의 말에 남윤수가 입술을 삐죽였다.

    “누가바 이런 걸로 퉁 칠 생각 말아라. 하겐다즈 먹을 거니까.”

    깃발을 꽂기만 하고 게임은 시작도 안 했는데 남윤수는 이미 이긴 것처럼 굴었다. 꼭 네 돈으로 네가 비싼 걸 사 먹었으면 좋겠구나, 생각하며 의지를 다졌다. 내 꼭 이 게임에서 이기고 말리라.

    나, 임석영, 남윤수, 김찬영 순서로 돌아갔다. 모래성 아래를 한 바퀴 크게 긁어내자 남윤수가 와, 이게 뭐라고 겁나 떨리네, 하며 두 손을 모았다.

    다음 순서인 임석영이 손가락으로 모래를 조금 긁어냈다. 아이들이 황당하다는 듯 보자 임석영이 손가락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말했다.

    “안전제일.”

    “비겁하네. 나 하는 거 봐라.”

    코웃음을 친 남윤수가 거의 포크레인 수준으로 모래를 긁어냈고 가운데 꽂아놓은 나무 막대가 휘청 기울었으나 쓰러지진 않았다. 김찬영이 난감한 얼굴로 모래성을 보았다.

    “아, 얼른 하라고. 내가 봤을 때는 너 아니면 홍차연이야.”

    남윤수가 손가락을 꼼짝도 안 하는 김찬영을 재촉했다. 모래성을 보던 김찬영이 나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가만 보다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파이팅, 뭐 그런 의미로.

    남윤수가 너 아니면 나라는데, 우리 이 위기를 넘겨 남윤수가 나무 막대를 쓰러트리게 만들자!

    김찬영의 시선이 모래성으로 향했다. 손을 내밀더니 밑부분이 깊숙하게 파인 곳으로 쑥 넣었다. 모래가 부슬부슬 떨어져 내리더니 기울어 있던 나무 막대가 뚝 떨어졌다. 남윤수가 깔깔 웃으며 김찬영을 손가락질했다.

    “바보 아니냐? 거기 모래를 손대면 당연히 무너지지.”

    “생각 못 했어.”

    김찬영의 말에 남윤수가 입술을 터트리며 웃었다.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김태욱이 정은솔을 잡아 바다에 빠트렸고, 정은솔이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김태욱을 잡으러 다녔다. 그러다 뜬금없이 반장이 물에 빠졌다. 정은솔의 짓이었다.

    반장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돌돌 말아 짜며 은솔이 너 정말 대책 없는 애구나, 하더니 김윤환을 바다로 떠밀었다. 김윤환이 물에 빠졌다.

    그때에서야 아 뭔가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모래사장에서 일어났다.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덥석 손목이 잡혔다.

    손목으로 옮겨 오는 차디찬 느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자 김윤환이 헤헤 웃으며 나를 봤다.

    “어, 아니, 잠깐만.”

    김윤환이 내 손목을 잡아당겼고 김윤환의 팔을 임석영이 잡았다. 김윤환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임석영을 보고, 임석영이 표정을 갈무리하며 김윤환을 들쳐 업는다.

    “억! 쓰바! 뭔데!”

    김윤환이 소리쳤고, 임석영이 성큼성큼 바다로 걸음을 옮겼다.

    “던져줄까, 날려줄까.”

    “시바! 그게 그거잖아! 내려줘!”

    김태욱이 깔깔 웃으며 뛰어오더니 임석영의 어깨 위에서 버둥거리는 김윤환의 두 다리를 잡았다. 임석영이 김윤환의 두 팔을 잡았고, 그네처럼 크게 움직인 김윤환의 몸이 바다로 날아갔다.

    아아악! 하는 김윤환의 외침이 물에 빠지기 전까지 크게 울렸다.

    해변에서 2학년 1반 단체 사진을 찍었다. 담임이 아이들을 모았고, 지나가던 학생이 담임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쫄딱 젖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는 임석영도 있었다. 김윤환을 빠트리고 돌아오는 길에 김태욱, 정은솔한테 잡혀 끌려갔기 때문이다.

    바닷물에 젖은 옷이 임석영의 몸에 딱 붙었다. 흰 티셔츠에 살갗이 다 비쳤다. 젖은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임석영의 뒤로 푸른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수평선에 임석영의 머리가 걸렸다. 파란색 배경에 선 임석영의 모습이 멋있었다. 부서진 햇빛이 수면 위에 별처럼 박히고, 그 아름다운 풍경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찍을게요!”

    카메라를 든 학생이 말했다. 물기가 덜 마른 임석영이 젖은 어깨를 내게 쓱 붙였다. 고개를 돌리고 보자 임석영이 정면을 향해 웃고 있었다. 나도 학생이 든 카메라를 보았다.

    “하나, 둘, 셋.”

    학생이 말했고,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홍차연으로 산 나의 모습이 기록되는 순간이다.

    *

    밤이 됐다. 저녁을 먹은 뒤 슬리퍼를 질질 끌고 숙소 뒤편에 있는 야외무대로 향했다. 반별로 줄을 맞춰 섰다. 낮에는 그렇게 뜨겁더니, 밤이 되자 불어오는 바람이 꽤 쌀쌀했다.

    차렷을 하고 가만 서 있는데 갑자기 무릎 뒤쪽을 누군가 쿡 찔렀다. 그 바람에 절로 무릎이 구부러졌다. 휘청거리다가 중심을 잡고 서서 뒤를 돌아봤다. 바람막이 후드를 올려 쓴 임석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먼 곳을 응시했다.

    “하지 마라.”

    임석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러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말해 뭐 하냐.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 섰다. 임석영과 거리를 벌리고 가만 서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귀찮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깨 위에 손을 얹은 임석영이 검지를 길게 빼고 있었다. 그 검지가 내 볼을 찔렀다.

    “…….”

    눈을 올려 흘겨보자 임석영이 입술을 말아 물며 웃음을 참는다.

    “알았어. 안 할게.”

    임석영이 뺨을 꾹 찌른 다음에 손을 거두어 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장기자랑이 시작됐다. 어제 심각한 얼굴로 장기자랑을 검색해보던 반장은 결국 몇몇 아이들과 함께 나가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를 불렀다.

    오늘 아침에 반장이 “차연아, 무슨 좋은 노래 없을까?” 하고 묻기에 “코리아나 어때?” 하고 그냥 던져봤을 뿐인데 정말 이 곡을 부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반장과 함께 나간 아이들이 연결고리처럼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높이 들고 흔들었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하는 가사가 밤하늘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거 노래가 완전 홍차 취향인데.”

    뒤에 앉아 있던 임석영이 어깨 위에 팔을 두르며 귓속말을 했다.

    “너지?”

    “…….”

    “네가 반장한테 이거 부르라고 했지?”

    말없이 무대를 바라봤다. 그래, 나다. 내가 이 곡을 추천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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