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49화 (49/70)

제49화

태어나 처음 마신 술이 고량주라니. 이대로 가다가는 머리가 유리처럼 와장창 깨질 것 같았다. 다행인지 뭔지 토기가 올라오지는 않았다.

“…가아. 너도 가서 놀아아.”

임석영의 팔을 두드렸다. 그만 나를 놓고 가도 좋다, 그런 신호였다. 몸을 데구루루 옆으로 굴려 바닥에 깔아놓은 이불로 돌아갔다. 대자로 누워 입을 벌렸다. 정신을 잡고 싶은데 자꾸 안 잡혔다.

“살려주세요….”

벽을 향해 돌아누운 뒤 몸을 웅크렸다. 이불을 끌어안고 혼자 웅얼거렸다. 고량주가 이렇게 위험한 술이었던가. 다신 먹지 않으리.

“미치겠다.”

등 뒤에서 임석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나도 미쳐 버리겠다. 내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니다.

무릎을 배 쪽으로 끌어 모았다. 그런데 너무 더웠다. 더운 열기가 안에서부터 훅 끼쳤다.

“…더워.”

끌어안은 이불을 내던졌다. 데구루루 굴러 맨바닥에 누웠다. 그런데 맨바닥이 더 뜨거웠다. 어지러운 와중에 이 방이 온돌방이라는 점을 상기했다.

“후드를 입고 있으니까 덥지.”

“그치이. 더워 죽을 거 같애…. 여기 사막이에요? 찜질방인가?”

“너 안에 티 입었어?”

고개를 끄덕였다. 소매에서 팔을 당겨 뺐다. 한쪽 팔을 빼고 버둥거리다가 남은 한쪽 팔도 뺐다.

“아, 야, 자, 잠깐만.”

후드를 벗는데 임석영이 말을 더듬으며 나를 말렸다. 엉? 하며 고개를 돌리다가 벗다 만 후드에 머리가 꼈다.

갑자기 힘이 빠져 팔을 내렸다. 아아, 미친 고량주, 옷 하나 벗을 힘도 주지 않는 것이냐.

후드를 머리에 걸어두고 돌아누웠다. 머리에 옷을 뒤집어쓰고 있어 시야가 완전히 차단됐다.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졸음이 몰려온다.

“뭐야, 왜 그래. 자?”

“어어, 너무 졸려….”

한 팔을 허공에 들고 파닥파닥 흔들었다.

“석영아, 푸후, 나 신경 쓰지 말고, 후, 가서 놀아아.”

그때 갑자기 방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임석영이 나간 건가. 대답은 하고 나가지. 성격 급하네….

“가라 잘 가라 가라 멀리 가버려….”

어디서 주워들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 진짜, 미쳐 버리겠네.”

임석영의 목소리다. 나간 거 아니었나. 가만히 누워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목에 걸려 있던 옷이 위로 쑥 올라갔다. 까맣게만 보이던 시야가 트였다. 내 옷을 들고 있는 임석영이 보인다.

“안 가써어?”

“이제 말도 어눌하게 하네.”

“아아… 죽을 거 같아, 석영아.”

임석영의 손목을 잡아 내 가슴 위에 올렸다.

“이거 봐. 이거 정상 맞아?”

“아, 자, 잠깐, 야.”

임석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을 뺐다. 이렇게 심장이 뛰는 게 정상인지 궁금했던 건데, 뭐가 잘못됐나.

“아, 잠깐. 야, 멈춰. 그만 와. 야, 너 가만히 좀.”

몸을 꿈틀거리며 다가가자 임석영이 뒤로 물러나며 내 이마를 잡고 밀어냈다.

“술 냄새 나…?”

“아, 그게 아니라.”

임석영이 작게 신음하며 눈썹 끝을 매만진다. 물러나 있는 임석영의 팔을 잡았다. 상체를 일으키려고 잡은 팔이 훅 당겨져 온다. 바로 앞에 드리운 임석영이 눈을 깜박인다.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양치….”

하러 가려고, 하는 뒷말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흘러 나간다. 코끝에서 비누 향이 맴돌았다. 조금만 거리를 좁히면 아래로 흐트러진 임석영의 머리칼이 얼굴에 닿을 것만 같았다.

“좋은, 냄새가 나.”

고개를 살짝 들어 늘어진 머리카락에 코를 댔다. 임석영의 앞머리가 간지럽게 얼굴에 닿는다.

“너는… 진짜, 나를 너무 곤란하게 만들어.”

그 말을 뱉는 임석영의 얼굴이 조금 묘했다.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하긴.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된 적은 없지.

“미안.”

바로 튀어나온 사과에 임석영이 짧은 한숨을 내뱉는다. 몸을 뒤로 물린 임석영이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는 순간 머리가 크게 울렸으나 바로 중심을 잡았다.

“나 씻고 올게.”

가방을 뒤져 세면도구를 챙겨 들고 화장실로 갔다. 커버를 내린 변기 위에 앉았다. 치약 뚜껑을 돌려 여는데 자꾸만 손이 엇나갔다. 그렇게 뚜껑 하나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을 때 임석영이 화장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혀를 찼다.

“내 이러고 있을 줄 알았지.”

슬리퍼가 하나뿐인 화장실 안으로 임석영이 맨발로 들어왔다.

“어, 여기.”

급하게 내 발에 있는 슬리퍼를 벗자 됐어, 너 신어, 하며 내 손에 있는 치약과 칫솔을 뺏어 간다. 옷에 뭐 묻는 것도 안 좋아하는 임석영이 맨발로 화장실 타일을 밟다니. 내심 놀랐다.

두 손을 무릎에 모으고 앞에 선 임석영을 올려다봤다. 칫솔을 든 임석영이 허리를 숙이고 눈높이를 맞추더니 내 턱을 잡아 올렸다.

“이.”

“이?”

벌린 입 안으로 칫솔이 들어왔다. 알싸한 치약 맛이 입 안으로 퍼진다.

“혼자 할 수 있어.”

임석영의 손에 있는 칫솔을 뺏어 들었다.

“치약 뚜껑도 못 열면서.”

“아, 그근, 응으.”

칫솔을 입에 문 채 말을 뱉자 임석영이 눈가를 찌푸리며 알았어, 그만 말하고 양치해, 하며 내 말을 잘랐다.

앞니를 칫솔질하고 입을 벌려 어금니를 칫솔질했다. 양치를 하는 나를 가만 보던 임석영이 갑자기 픽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지. 칫솔을 입에 물고 쳐다보자 임석영이 세면대를 탁탁 두드렸다.

“이제 그만 헹궈.”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세면대 앞에 섰다. 입에 든 거품을 뱉으려다가 가만 서 있는 임석영을 보았다. 지금 내 양치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관람하겠다는 건가. 임석영의 등을 떠밀었다.

“나가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임석영의 등을 밀었다. 멀대같이 큰 임석영이 순순히 미는 대로 밀려났다. 화장실 밖으로 나가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화장실 문을 닫았다. 거품을 뱉고 손바닥에 물을 받아 입을 헹궜다. 세수를 하니까 술이 좀 깨는 것 같기도 하고.

거울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수건걸이가 휑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아까 나갔던 모습 그대로 임석영이 문 앞에 서 있다.

“대체 어떻게 씻은 거야. 물을… 뭐 쏟은 거야?”

몸통을 쭉 훑는 임석영의 시선에 고개를 숙였다. 분노의 세수를 한 것인가. 티셔츠가 물에 잔뜩 젖었다.

“아, 이게 왜.”

손으로 젖은 티셔츠를 쓱쓱 문질렀다. 손으로 차가운 기운이 스미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정은솔이 들어오는 걸 확인한 동시에 임석영의 손에 의해 몸이 홱 돌아갔다.

“어, 석영이 왔냐?”

난데없이 임석영이 내 등을 두드렸다.

“아, 좀 작작 토해.”

“아, 뭐야. 차연이 토해?”

정은솔이 질색하는 목소리를 냈다.

“아니… 등 좀….”

가만히 놔두라고 하려는데 임석영이 퍽퍽, 힘주어 등을 두드렸다. 없던 토기도 올라오게 생겼네.

“지금이 세 번째야. 밤새 하게 생겼다.”

“아, 미친. 화장실 하나잖아.”

“그러게. 아까 바닥에 한 거 내가 대충.”

“그만! 그만 말해!”

몸을 꿈틀거리자 임석영이 팔을 꽉 붙들어 잡았다. 얼마간 있다가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등을 두드리던 임석영의 손이 멈춘다.

“이거 완전 죽음의 수학여행이네.”

임석영이 한숨을 뱉으며 잡고 있던 팔을 놨다. 얼굴을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머리를 쓸어 넘긴 임석영이 제 옷소매로 내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자야겠다, 너.”

칫솔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 밖에 선 임석영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내가 문 앞에서 잘게.”

“응.”

칫솔 케이스에 칫솔을 넣고 누웠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덮었다가 더워서 두 팔을 이불 밖으로 빼냈다.

장롱 문을 닫은 임석영이 내 앞으로 와 쪼그리고 앉았다. 분노의 세수로 젖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마 위에 손을 얹는다.

“씻고 올게. 먼저 자.”

“응, 석영아. 빨리 씻고 와.”

가만 나를 내려다보던 임석영의 뺨이 갑자기 붉어졌다. 이마 위에 두었던 손을 거두어 가더니 어, 그래, 하며 후다닥 방을 나갔다. 문을 닫고 나가더니 다시 열고 들어와 불을 껐다. 방이 어두워지고 문이 닫혔다.

불이 꺼진 방 안으로 갑자기 고요가 밀려든다. 너무 조용해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술을 마셔서인지 나는 왜 살까, 하는 그런 덧없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학교도 그만두고 철가방을 들고 다니며 돈을 벌긴 버는데, 왜 버는 걸까. 살기 위해서 버는데. 사는 건 뭘까.

새카만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이 새카만 건지, 천장으로 도달하는 그 공간이 새카만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어둠을 응시했다. 그게 꼭 내가 사는 곳의 색깔 같아서 조금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무거워진 눈으로 어둠을 응시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고 보자 누군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젖은 머리칼이 축 처진 임석영이다.

“어, 안 자네.”

임석영이 숙였던 허리를 세우고 들어왔다. 활짝 열린 문틈으로 거실 불빛이 쏟아져 들어오다가 문이 닫히며 잘려 나갔다. 빛이 새어 들어오던 방이 다시 어둠에 잠겼다.

정적이 흘렀다. 방 안이 어둡고 조용한 것은 변함이 없는데 혼자가 아닌 임석영과 함께 누워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됐다.

“석영아.”

“어?”

“나 아마 다음 주면 끝날 거 같아. 홍차연 대신에 학교 다니는 거.”

종결 소식에 놀란 듯 임석영이 벌떡 일어나 나를 본다.

“진짜? 드디어 그 새끼 학교 간대?”

“응.”

“와, 진짜 오래도 걸렸다.”

몸을 옆으로 돌려 베개 밑에 팔을 넣고 임석영을 보았다. 임석영이 나와 같은 모양새로 누워 나를 본다.

“축하해. 드디어 지긋지긋한 남고 생활 끝나네.”

“응. 내 책상 보면서 울지 마.”

내 말에 임석영이 작게 웃는다. 임석영은 지긋지긋하다고 표현했지만, 우리의 모든 추억이 학교 안에 있었다. 화장실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홍차연이 아니었다면 임석영을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네가 남자인 척 안 해도 돼서 좋기는 한데, 수업 시간에 눈 뜨고 자는 거 못 봐서 아쉽다.”

“뭐 그런 게 아쉽고 그러냐.”

그런데 나도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끝나는 날만 고대했는데. 참으로 이상한 감정이었다.

“석영아.”

“응?”

“우리 자주 볼 수 있겠지?”

자연스럽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어째 임석영이 말없이 나를 봤다. 뭐야, 아닌 건가.

“아, 맞다. 너 내년에 고3이지…. 놀면 안 되겠구나. 그러면, 내가 도서관 같이 가줄까?”

임석영은 여전히 대답이 없고, 나는 마음만 초조해져서 혼자 말을 덧붙이다 점점 기분이 상해갔다.

“뭐야, 너 나 안 만날 거야?”

빤히 나를 바라보던 임석영이 피식 웃는다.

“우, 웃어? 비웃냐, 지금?”

뭐가 그렇게 웃긴지 이마를 문지르며 웃음소리를 죽이더니 이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으며 아아, 하고 신음했다.

“진짜, 미치겠다. 너 오늘 왜 이렇게 사랑스러워?”

“…….”

멀뚱히 임석영을 봤다. 묻는 말에나 대답할 것이지, 교묘하게 대답을 자꾸 피해 가네.

사랑스럽다는 말에 일말의 감동도 느끼지 못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임석영이 작게 한숨 쉬며 내 옆으로 왔다.

“너 지금 내가 묻는 말에 대답 안 했다고 짜증 났지?”

어느 정도 적중했다. 그래서 대꾸 없이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머리를 받치고 누운 임석영이 삐죽 튀어나온 내 입술을 찌른다.

“아니, 너무 당연한 걸 묻잖아.”

“그게 당연해?”

“그럼 아니야? 네가 홍차연 대역 끝날 때 나 만나준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임석영의 손이 눈썹을 훑고 지나간다. 피부로 스며드는 그 온도가 좋았다.

“너 약속 지켜라. 도서관 같이 가준다는 거.”

이번엔 내가 입을 다물었다. 말없이 시선을 돌리자 눈썹 끝에 머물러 있던 녀석의 손가락이 볼을 꼬집어 잡는다.

“아아, 지켜. 지킬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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