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48화 (48/70)
  • 제48화

    “어어! 우리 같은 방!”

    정은솔이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김태욱과 정은솔은 김윤환의 친구로, 아까 버스에서 김윤환을 놀리며 깔깔 웃던 아이들이다. 매번 교실에서 닭싸움을 할 때마다 안 빠지는 놈들이기도 했다.

    잽싸게 달려온 김태욱이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내 침대!”

    가방을 내동댕이치고 방으로 들어간 김태욱이 소리쳤다. 뒤따라 뛰어 들어간 정은솔이 김태욱의 옆자리를 차지하며 침대 자리 끝! 하고 소리쳤다. 한 놈은 가방을 바닥에 던져두고, 한 놈은 가방을 품에 꼭 안은 채 침대에 누워 나를 봤다.

    “홍차연, 네 자리는 없다.”

    “침대 자리 끝남.”

    뒤이어 들어온 임석영이 내 뒤에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본다.

    “방 두 개잖아.”

    “응. 하나는 온돌이래. 침대 없어.”

    “침대 찜.”

    김태욱과 정은솔이 동지애를 다지듯 어깨동무를 했다. 그러고는 매트리스를 팡팡 두드렸다. 이 침대는 우리의 것이요, 이 방도 우리의 것이다, 너희들은 뜨끈한 온돌방으로 가라, 잘 가라, 하는 얼굴이었다.

    “아, 그런 게 어디 있어. 가위바위보 해. 나 바닥에서 못 잔다고.”

    “그런 거 여기 있어. 먼저 온 사람이 임자야.”

    김태욱과 정은솔이 왜 그렇게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뛰어오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미리 들은 것이다. 방이 두 개인데 침대가 한 개밖에 없다더라, 하는 것을.

    걸음을 돌려 맞은편에 있는 방으로 갔다. 고개를 쑥 들이밀고 방을 살폈다. 다른 방과 똑같은 구조인데 침대만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 한쪽에 있는 장롱을 열었다. 하얀색 이불이 두툼하게 개켜져 있다.

    “아….”

    나란히 포개져 있는 베개 두 개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두 손으로 장롱 문을 잡은 채 고개를 돌려 방문을 보았다. 임석영이 방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하고 심각한 얼굴로 입술을 문질렀다.

    “두, 둘이… 자는 건가.”

    임석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그러더니 얼굴을 붉힌다. 뭐야, 왜 그래.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래. 뛰어온 열정을 봐서 쟤네 둘이 저기 쓰라고 하자.”

    갑자기 임석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김태욱과 정은솔이 들어간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야, 그래. 너희 둘이 여기 써라. 내가 양보한다.”

    김태욱과 정은솔이 박수를 쳤다. 평화롭게 끝난 방 선택에 대해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내가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임석영과 함께 방을 쓰게 되었으니 나에게도 나름 평화로운 결과인 듯했다. 김태욱과 정은솔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뭐, 별일이야 있을까, 생각하면서.

    짐을 풀고 자유 시간을 가졌다. 담임은 내일 있을 장기자랑 때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우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반장만 홀로 핸드폰을 붙들고 장기자랑을 검색하는 중이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불행하게도 반장을 포함한 아이들이 우리 방으로 몰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이 거실을 점령했다. 누가 트럼프 카드를 챙겨 왔는지 원카드를 하는 중이었다.

    “원카드!”

    “원카! 아, 시발! 내가 먼저 말했다고!”

    “꺼져. 내가 더 빨랐어.”

    “이 새끼 뭐지? 진짜 눈이 네 개야 뭐야, 겁나 빨라.”

    지금 이게 몇 번째 판이더라. 그러니까, 열여섯 번 정도 했으려나.

    지치지도 않는지 원카드를 계속했다. 이다음에는 도둑잡기를 하자며 아이들이 입을 모았다. 자기들 방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 보인다. 눈치껏 누군가가 야, 시간도 늦었고 그만 가자, 했으면 좋겠는데 모두 눈치를 말아먹은 것 같다.

    정은솔과 김윤환은 침대에 드러누워 핸드폰 게임을 했다. 김태욱은 방에 아이들이 있다며 임석영과 내가 쓰는 방으로 들어가 여자 친구와 통화를 했다. 장난 아니게 오래 했다. 아직도 안 나왔다.

    그 탓에 나는 부엌 의자에 가만히 앉아 아이들이 카드를 내고 먹는 모습을, 반장이 심각한 얼굴로 장기자랑을 검색하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차연아, 내일 장기자랑 네가 나가서 노래하는 건 어때?”

    맞은편에 앉은 반장이 물었다. 두 손으로 다리를 감싼 채 눈을 돌려 반장을 보았다. 지금 나보고 내일 무대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라고 말하는 건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세차게 저었다.

    “왜? 너 아까 버스에서 노래 잘하던데.”

    숙소로 오는 길, 기사님이 노래방 기계를 틀어줬다. 갑자기 천장에서 조명이 번쩍번쩍 빛나더니 마이크가 앞자리에서부터 쭉 한 바퀴를 돌았다.

    제발 마이크가 나에게 오기 전에 숙소에 도착했으면 했는데 차가 계속해서 달렸다. 앞에서부터 넘어온 마이크가 결국 나에게까지 전달됐고 아이들이 안 부르면 죽일 것같이 달려들어서 결국 한 곡을 뽑았다.

    도시 아이들의 ‘달빛 창가에서’를 불렀다. 보나 마나 분위기 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으로 아이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오오오, 내 사랑, 하는 후렴구 가사를 아이들이 모두 따라 불렀다. 그래서 아는 노래인가 했는데 다들 모른다고 했다. 도시 아이들의 음악이 좋은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야. 나 무대 공포증 있어.”

    “음… 안 그래 보였는데….”

    반장이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핸드폰을 붙들어 잡더니 아, 뭐 하지, 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제안만 받았을 뿐인데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냥 걸어만 다녀도 쟤야? 소리를 듣는 판국에 무대 나가서 마이크 잡고 노래를 부른다? 한 소절 부르고 기절할지도 모른다.

    테이블 위에 있는 생수통을 들었다. 뚜껑을 돌려 열고 입술에 닿지 않게 입구를 떨어트린 채 입 안으로 물을 들이부었다. 몇 모금 들이켜 마시다가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느낌에 젖혔던 고개를 세웠다. 인상을 쓰며 손에 든 생수통을 보았다.

    아이시스. 아이시스 맞는데. 맛이 왜 이래.

    얼굴을 찌푸리고 생수통을 쳐다보자 카드를 손에 쥐고 있던 애가 어? 하며 나를 손가락질한다.

    “야, 너 그거 마셨어?”

    생수통을 손에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왜 이래?”

    “미친 새끼야, 그거 술인데.”

    둥그렇게 모여 앉아 카드를 하던 아이들이 모두 나를 돌아봤다.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가 손에 든 생수통을 살폈다. 나 혹시 물 먹는 하마였던가. 생수통을 채우고 있던 액체가 절반이 사라지고 없었다.

    “으, 소주 맛이 이래?”

    맛이 이상하긴 했는데, 소주였단 말인가. 콧등을 찡그리며 생수통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카드를 바닥에 놓고 일어난 애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테이블 앞에 서더니 반이나 비운 생수통을 발견하고 기함한다.

    “등신아, 이거 고량주야.”

    “…응?”

    남자애가 생수통을 내 얼굴 앞으로 들이밀며 페트병 뒤에 작게 써져 있는 글자를 가리켰다.

    “여기 고, 고라고 써져 있잖아.”

    자세히 보니 고, 한 글자가 써져 있다. 아이시스 생수가 아니고 고량주다, 그런 표식이었던 것인가. 너희들만 알고 나는 모르는.

    “와, 씨. 고량주를 단번에 이만큼 원 샷 했어. 대단한 새끼.”

    “삼다수는 소주고 아이시스는 고량주인데. 하늘보리는 양주, 밀키스는 막걸리.”

    말 안 해줬잖아, 새끼들아. 술 뷔페도 아니고 다양하게도 챙겨 왔네.

    반장이 안쓰럽다는 듯 나를 보았다. 징조가 안 좋다. 갑자기 가슴도 조금 빨리 뛰는 것 같고. 가슴을 툭툭 때리며 앞에 선 남자애를 올려다봤다.

    “고량주 그거 몇 도야?”

    대답은 앞에 선 남자애가 아닌 반장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핸드폰으로 검색을 해본 듯 놀란 얼굴로 검색 결과를 읊었다.

    “고량주는 도수가 40에서 63도로 높다….”

    갑자기 딸꾹질이 넘어와 두 손으로 급하게 입을 막았다. 그걸 토하고 싶은 걸로 착각했는지 앞에 서 있던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야! 토하면 뒈져!”

    갑자기 원카드를 하던 애들이 카드를 회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방은 이제 끝났어. 옆방으로 옮기자.”

    “얘들아, 술 잘 챙겨서 와라.”

    “야, 홍차연 취해서 토할지도 모르니까 귀에다가 비닐봉투 하나 걸어주고 와.”

    절대로 방을 안 나갈 것 같던 아이들이 우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아, 우리 방 이제 토 방 되는 거야?”

    침대에 드러누워 있던 정은솔이 울상을 하며 방에서 걸어 나왔다. 정은솔과 눈이 마주쳤다.

    “야, 너 얼굴 졸라 빨개졌어.”

    “…나?”

    이렇게나 빨리 얼굴이 빨개질 수 있단 말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검은 액정에 얼굴을 비춰봤다. 액정이 검어서 그런가. 그렇게 안 보이는데.

    핸드폰을 내려놓고 반장을 보았다. 진짜 내 얼굴 빨개? 하고 물어보려는데 반장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연아, 푹 쉬어.”

    그러더니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야, 반장. 너마저 이러기니?

    내 얼굴이 그렇게 빨간가. 아이들이 모두 대피를 할 만큼. 한 손을 올려 뺨을 쓸었다. 뺨을 쓸다가 놀랐다. 손에 닿은 얼굴이 너무 뜨겁다.

    세상에. 술기운이 이렇게 빨리 올라온다고?

    벌컥, 방문이 열렸다. 통화를 끝내고 나온 김태욱이 세상에, 하며 나를 봤다.

    “얘 얼굴 왜 이래?”

    “고량주 원 샷 함.”

    “애들은 다 어디 갔어?”

    “옆방으로 갔어.”

    “우리도 가자.”

    김태욱과 정은솔이 방을 빠져나갔다. 침대를 점령할 때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나갔다. 왜 다들 가고 그래.

    담임 심부름을 간 임석영은 돌아올 생각을 안 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로 바글거리던 315호에 홀로 남았다. 가슴이 폭주하는 것처럼 빨리 뛰었다. 얼굴에 뜨거운 기운이 끼쳐 왔다.

    “느낌이 안 좋아.”

    손을 올려 뺨을 짚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돈다.

    “홍차야, 어디 있니.”

    임석영이 돌아온 건 머리 하나도 가누기가 힘들어 방으로 기어 들어간 후였다. 방문이 열렸다. 대충 장롱에 있는 이불을 끄집어내 바닥에 깔고 누워 있다가 눈을 돌렸다.

    “벌써 자?”

    먹을 걸 사 왔는지 편의점 비닐봉투를 흔들며 임석영이 들어왔다.

    “…어, 임석여어엉.”

    가슴이 빨리 뛰어 숨을 가쁘게 내쉬던 찰나 뱉은 말이 어눌하게 흘러 나갔다. 말투가 이상했는지 임석영이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어디 아파?”

    임석영이 이마를 짚는다.

    “헐, 열 나? 왜 이렇게 뜨겁지?”

    이마 위에 얹어져 있던 임석영의 손이 얼굴 곳곳을 순회한다.

    “야, 나,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심장? 왜? 어디가 안 좋은데? 어?”

    임석영이 금방이라도 나를 업고 나갈 태세로 등을 받쳐 들었다. 옷을 얇게 입고 있을 수 없어 날도 더운데 후드 티를 입고 있었더니 등이 땀으로 젖었다.

    “야, 우선 선생님한테.”

    임석영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내가 길게 뱉은 숨을 맡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대고 킁킁거린다.

    “너 술 마셨어?”

    임석영에게 등이 받쳐져 상체가 반쯤 허공에 뜬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 힘이 안 들어가 뒤로 확 젖히자 임석영이 제 다리 위에 내 머리를 놓았다.

    흡사 전쟁터에서 활 맞아 숨이 다하는 병사를 끌어안은 장군의 모습으로 임석영이 내 어깨를 잡았다.

    “갑자기 왜? 누가 강제로 먹였어?”

    내가 억지로 먹기라도 한 줄 아는지 임석영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눈을 느리게 끔벅이다가 숨을 크게 몰아 뱉었다. 자꾸만 숨이 크게 쉬어졌다. 뱉은 숨에 앞머리가 팔락팔락 흔들린다.

    “어? 석영이 왔냐?”

    누군가 들어왔다.

    “야, 홍차 왜 이래? 누가 술 줬어?”

    “주긴 누가 줘. 자기 혼자 고량주 원 샷 했어.”

    “고량주?”

    “응. 애들 다 옆방에 있어. 너도 와.”

    뭔가를 가지러 온 건지 목소리의 주인이 다시 나갔다. 김태욱 아니면 정은솔이겠지.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임석영의 다리를 베고 누워 앓는 소리를 냈다.

    “사람 살려….”

    내 목소리에 임석영이 한숨을 내뱉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환장하겠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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