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47화 (47/70)
  • 제47화

    수학여행 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온갖 긴장으로 얼굴이 창백했다.

    날씨와 관계없이 두툼한 옷들을 챙겼다. 2박 3일 일정이었고 3일은 안 씻을 각오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가장 늦게 버스에 오른 탓에 혼자 앉을 수 있을 만한 자리가 없었다. 버스 내부를 둘러보다가 뒤쪽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임석영을 보았다. 시선을 돌리고 반장 옆자리에 앉았다.

    “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반장이 물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안 좋아서. 혹시 아프면 말해.”

    “응.”

    안전벨트를 모두 착용했는지 확인이 끝난 후 버스가 출발했다.

    [옆자리 비워뒀는데]

    버스가 출발한 후 내 위치를 확인했는지 임석영에게 메시지가 들어왔다.

    [뒤에 앉으면 멀미해서]

    되도 않는 변명이었다. 그냥 임석영 옆에 앉아 가는 게 불편했다. 그로 인해 따라오는 아이들의 시선이.

    가방에서 엠피스리를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창문에 머리를 대고 창밖을 내다봤다. 도시의 풍경이 스쳐 가다가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자 끝없이 산의 풍경이 이어졌다.

    우울한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더 낮게 꺼질까 싶어, 조금이라도 잔잔한 전주가 흘러나오면 다음 곡으로 넘겼다. 쿵짝쿵짝, 신나는 음악을 듣고 있다고 해서 어깨를 들썩이는 것은 아니었다. 멍한 얼굴로 음악을 들었다.

    내가 한숨을 쉴 때마다 할머니는 아이고, 땅 꺼진다, 누리야, 하며 대체 어린 내가 왜 한숨을 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아마 내가 엄마의 배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세상으로 나온 날에도 한숨을 쉬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태어난 순간부터 숨이 멎는 순간까지 한숨을 쉬다가 가는 건 아닐까, 하고.

    작게 벌린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 나갔다. 뱉은 숨이 창문에 닿은 듯 뿌옇게 자국이 남았다. 그러다 빠르게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의 실의도 언젠가 저 자국처럼 사라질까. 한숨처럼, 오래 머물지 않고. 그렇게 사라지고 생겨나기를 반복하는 걸까.

    덜덜덜 진동하는 창문에 기대고 있던 머리가 흔들렸다.

    점심을 먹고 박물관이다 뭐다 정해진 코스를 돌았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창문에 머리를 박고 자기도 하고, 자다가 눈을 떴는데 반장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기도 했다.

    달리던 버스가 주차장에서 정차했다. 버스 앞문이 열리고 담임이 마이크를 잡는다.

    “자자, 1반, 여기가 마지막 코스다. 한 시간 뒤에 여기 앞에서 모이는 거야.”

    아이들이 네! 하고 답했고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아이들이 내리는 사이 나는 무언가를 찾는 척 허리를 숙이고 가방 안을 뒤적거렸다.

    시끄럽던 버스 내부가 조용해졌다. 아이고, 하며 버스 기사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숙인 채 눈을 깜박거렸다. 다 내린 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운전석을 보았다. 치익, 소리를 내며 버스 앞문이 닫혔다. 운전석은 비어 있었고, 밖에서 문을 닫는 기사가 보였다.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댔다. 긴장이 풀려 숨을 몰아 뱉었다. 혹시라도 안에 있는 모습이 밖에서 보이면 나오라고 할까 봐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시간 더럽게 안 가네.”

    팔을 베고 누워 자주색 의자 시트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뒤쪽 자리에 나와 있는 발이 보였다. 버스 안에 나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다.

    “…어.”

    몸을 슬쩍 일으키자 발만 보이던 사람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팔짱을 낀 임석영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나를 보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이 괜히 날이 선 것처럼 보였다. 임석영의 눈매가 원래 저렇게 날카로웠던가.

    슬쩍 올렸던 몸을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렸다. 버스 안에 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공기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의자 뒤에 몸을 숨기고 눈동자를 굴렸다. 아이들은 한 시간 뒤에나 돌아올 텐데, 일부러 둘이 남기 위해 안 내렸다고 오해를 받게 되면 어쩌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릴걸.

    입술을 말아 물고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성큼성큼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성큼 다가온 임석영이 보였다. 옆자리에 앉더니 커튼을 쳐서 창문을 가린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가슴이 두근 뛰었다.

    “…어, 왜?”

    임석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본다.

    “나 좋아해?”

    “…어?”

    “나 좋아하냐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던 임석영이 말을 덧붙인다.

    “나는 요즘 네가 헷갈려. 정말 좋아하면 헷갈리게 하지 않잖아. 나는 그래. 너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

    “너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아이들에게 네가 누구인지 들키면 안 되니까, 그러려면 주목받지 않는 게 좋으니까, 그런 건 이해해. 내가 나빴어.”

    “석영아.”

    “그런데, 나 진짜 네가 좋거든? 네가 아마 남자였다고 해도… 너라면 좋아했을 거 같아.”

    임석영의 두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내게 꽂혔다.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뛰었다. 두근두근 뛰는 기운에 손끝이 저리다.

    “그런데 네가 이러면. 네가 이런 식으로 선을 그어버리면.”

    임석영의 눈이 어쩐지 처연해진다.

    “내가 너를 욕심내는 것 같아서, 좋아하면 안 될 것처럼 느껴져.”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내가 너를 욕심내는 것 같다고. 괜히 내가 네 반경에 들어가 너를 망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느껴져서.

    나는 전학 처리와 함께 학교에 안 나오면 끝이지만, 이 학교에 계속 남아 있는 임석영에겐 안 좋은 소문이 끝없이 붙어 다닐까 봐.

    “애들이 너 남자 좋아한다고 그래.”

    “알아. 나도 다 들었어.”

    “괜찮아?”

    “남자 좋아한다고 하면 오해가 맞는데, 너 좋아한다고 하면 그건 오해가 아니잖아. 그리고 나 그런 거 신경 안 써. 뭐라고 하든가 말든가.”

    가만 서로를 응시했다. 임석영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는 듯했다. 내 눈동자에도 임석영의 얼굴이 비치겠지.

    “말해봐.”

    “…뭐를.”

    “나만 너 좋아하는 거야?”

    임석영이 내게 사귀자고 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 밤의 공기와 선선한 바람,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냄새와 임석영에게서 흩어지던 기분 좋은 비누 향.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던 할머니의 음성까지.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선을 그었는데, 오히려 그 선 안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도 너를 지키고 싶어서 그랬어.”

    “…….”

    “너만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빈 좌석으로 가득한 버스가 유달리 크게 느껴진다. 세상에 아무도 없고 우리만 남은 것처럼.

    학교에 퍼진 소문으로 아이들 입에 우리의 이름이 오르내릴 때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졌다. 와르르 무너져 잔해만 남은 그런 세상이 그려져서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게 전부가 아니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가 가진 세상이 하나가 아니고 무수히 많다면, 소문과 함께 무너진 세상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라면.

    “나도 네가 너무 좋아, 석영아.”

    *

    버스로 돌아온 아이들이 우리를 힐끔거렸다. 모르쇠로 일관하며 애써 눈을 돌렸다.

    “대박 빨리 왔네?”

    김윤환이 버스로 들어오며 물었다.

    “차연이랑 화해했냐.”

    김윤환이 임석영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곁눈질로 보다가 애먼 창문만 뽀득뽀득 소리 나게 문질렀다.

    “친구끼리 싸웠다가 화해하고 그러는 거지.”

    임석영의 목소리가 밝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에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렇지.”

    “그렇지는 뭐가 그렇지야. 너 덕철이랑 작년에 싸웠는데 아직도 화해 안 했잖아.”

    김윤환의 옆에 앉아 있던 김태욱이 끼어들며 말했다. 그 말에 김윤환이 어어! 여기서 덕철이 새끼 이름이 왜 나와! 하며 큰소리를 냈다. 모두가 다 아는 사건인 듯 아이들이 소리 내 웃었다.

    “아이템 안 줬다고 피시방에서 멱살 잡고 싸우더니 절교함.”

    정은솔이 깔깔 웃었다.

    “근데 웃긴 건 생일 파티는 같이 했어.”

    어디선가 또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이들이 미친놈이라며 웃었다. 분위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분위기가 되지 않아 다행이다.

    뽀득뽀득, 창문을 문지르고 있는데 누군가 밖에서 창문을 탕탕 두드렸다. 눈을 내리자 밖에 서 있는 남윤수와 김찬영이 보였다. 지나가다가 보고 온 듯 남윤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질을 했다.

    “와! 뭐냐! 너희 둘! 절교 각 세우더니!”

    남윤수가 입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눈을 마주 보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임석영이 훠이, 훠이, 손을 흔들더니 커튼을 치며 창문을 가린다.

    “자, 이제 숙소로 이동합니다.”

    인원수를 확인한 담임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남은 일정을 대충 설명하더니 내일 저녁에 장기자랑이 있으니 뭘 할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버스가 천천히 움직였다. 한 시간 동안 같은 풍경만 담고 있던 창문에 다른 풍경이 들어왔다.

    주머니에서 뭔가가 쏙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고 보자 이어폰 한쪽을 콩나물처럼 들고 있는 임석영의 손이 보였다.

    “아니, 튀어나와 있어서.”

    임석영이 이어폰 줄을 잡아당기자 주머니에서 반쯤 튀어나와 있던 엠피스리가 쑥 빠져나온다.

    이어폰 한쪽을 귀에 꽂은 임석영이 남은 한쪽을 내 귀에 꽂았다. 엠피스리 전원을 켜고 음악 목록을 살피더니 아아, 하며 탄식한다.

    “노래가… 다….”

    다 자신이 모르는 곡인 듯 심각한 얼굴로 버튼을 계속 눌렀다.

    “너 열여덟 살 맞냐.”

    “맞는데.”

    “불사의 몸 이런 거 아니지?”

    “…….”

    “알고 봤더니 1960년생 아니야?”

    “…장난하냐.”

    “아니면 됐어.”

    고개를 돌린 임석영이 다시 엠피스리 목록을 훑었다. 아무리 돌려도 아는 곡이 안 나오는지 아, 모르겠다, 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익숙한 전주에 흘긋 눈을 돌려 임석영을 보았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임석영이 엠피스리를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임석영이 재생한 곡은 조갑경과 홍서범이 부른 ‘내 사랑 투유’였다.

    “좋군.”

    임석영이 팔짱을 끼더니 눈을 감았다. 잠을 자려는 건가. 눈을 감은 얼굴을 몇 초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음악을 들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나무를 보는데 웃음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꾹 물었다.

    함께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같은 음악을 듣는 지금이 꽤 마음에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

    숙소 앞, 담임이 손에 든 종이를 훑으며 아이들 이름을 호명했다. 부르다가 지쳤는지 아, 우리 반은 A동 3층이고 문 앞에 이름 붙어 있으니까 찾아서들 들어가라, 하고 말했다.

    건물로 들어가 3층 복도를 걷다가 홍차연 이름이 붙어 있는 315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호실 번호 아래에 종이 한 장이 스카치테이프로 붙어 있다.

    [수수고등학교 2학년 1반 김태욱 임석영 정은솔 홍차연]

    대체 무슨 기준으로 짝을 정해준 거지. 가나다 순서도 아니고 번호순도 아니었다. 다만 뭔가 연관이 있다 싶은 게 있다면, 임석영은 옆 분단 같은 자리였고 내 앞자리가 정은솔, 임석영의 앞자리가 김태욱이라는 거였다. 그러니까 사각형을 이루며 우리의 자리가 붙어 있다는 건데.

    “담임이 교탁에 붙어 있는 자리 배치도 보고 그냥 네 명씩 붙여서 짰대.”

    언제 왔는지 임석영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말했다. 315호 문이 활짝 열리고 임석영이 먼저 들어가라는 듯 머리를 기울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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