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46화 (46/70)
  • 제46화

    멍하니 정류장에 서 있는데 누군가 옆에 와서 섰다.

    “홍차.”

    임석영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정류장에 있는 아이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쟤들, 쟤가 전학생, 하고 소곤거렸다.

    “화났어?”

    “아, 아니.”

    “그런데 왜 그래? 사람을 막 없는 사람 취급 하고. 교실도 혼자 나가버리고.”

    “…….”

    “내가 아까 한 말 때문에 그래?”

    임석영이 손을 내밀어 손목을 그러잡았다. 잡힌 손목을 뒤로 빼며 임석영을 보았다. 단지 소문이 도는 것뿐인데, 마치 현상수배범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우리를 주목하고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은.

    예고도 없이 무대로 끌려 나온 기분. 대본도 없이 연기를 해야 하는 암담한 상황. 배역이 뭔지, 결말이 뭔지, 아무것도 모른 채 말이다. 그래서인지 아무렇지 않게 임석영을 대하기가 어려웠다.

    “나 화 안 났어. 네가 아까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뭐.”

    “그런데 왜 나랑 말도 안 해?”

    “애들이 자꾸 우리 이야기를 해….”

    “그런데…?”

    “저번에 네가 그랬잖아. 조심해서 나쁠 거 없다고…. 찬영이 체육복 내가 입었을 때.”

    임석영의 얼굴이 한순간 멍해졌다. 얼빠진 사람처럼 나를 봤다.

    “그래서 그러는 거야. 조심하려고.”

    조용히 내뱉은 말에 팔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간다. 타야 할 버스가 들어왔다.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는데 임석영은 요지부동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버스 왔는데.”

    조용히 뱉은 말에 반응이 없다.

    “석영아.”

    차마 저러고 있는 애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어서 이름을 불렀다. 멍하게 서 있던 임석영이 느리게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임석영의 뒤로 하늘이 붉게 물들어갔다.

    “아, 나 교실에 뭐 두고 왔다. 먼저 가.”

    얼굴을 쓸어내린 임석영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노을로 얼룩진 거리를 걸어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안 타요?”

    기사가 내게 묻고, 시선을 돌려 버스에 올라탔다.

    *

    임석영과 나에 대한 소문이 학교에 돌기 시작했다. 김윤환처럼 왜 남의 일에 지랄이냐며 넘기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대놓고 수군거리거나 와서 물어보는 애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아닌데, 라는 거짓말을 하곤 자리를 피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의기소침해졌고 조용해졌다. 임석영과 말을 섞는 것도 어쩐지 불편한 마음이 되어 쉬는 시간마다 책상에 엎드려 누워 자는 척을 했다.

    그런데 소문 때문에 쉬는 시간이 불편해진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강은호가 툭하면 다른 애들과 싸웠다. 그가 하고 다니는 이야기를 곱게 안 들은 애들이 한마디씩 던지자 싸움이 붙은 거였다.

    그러다 한 명과 싸움이 크게 붙었다. 아니, 그게 네가 도둑질하고 다니는 것보다 더 나빠? 그 말 때문이라고 했다. 말을 던진 애가 영리한 건가. 주먹 한 번 안 휘두르고 강은호가 때리는 대로 맞더니, 경찰에 신고를 했다고 했다. 상황이 꽤 심각하게 굴러가는 것 같았으나,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내 걱정 하기도 바빴다.

    소문의 싹을 어떻게 자르지, 고민하다가 사모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소문에 대한 이야기는 빼고 곧 수학여행이라 그 전에 끝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다 같이 가는 여행이니 들킬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요? 하는 말을 덧붙이며.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나름의 돌파구였는데, 사모님에게 연락이 왔다.

    “차연이에게 안 좋은 소문이 났다지? 차 한잔 마시러 오렴.”

    놀랍게도 소문이 거기까지 흘러가 있었다.

    큰 대문 앞에 서자 일순 긴장이 일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크게 울리며 문이 열렸다. 숨을 고르고 발을 들였다.

    마당 한쪽에서 누군가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나무의 가지를 치고 있었다. 가지치기 가위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닫는 모양새가 꽤나 섬뜩했다. 양손으로 가위를 잡고 움직일 때마다 길게 뻗은 가지가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사다리 아래로 잘려 나간 가지가 수북하게 쌓였다.

    집에 가까워지자 잔잔한 클래식 선율이 들렸다. 우아하고도 묵직한 첼로 선율에 비위가 상했다. 넓은 통창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홍차연의 모친이 보였다.

    돌길을 따라 걷다가 눈을 올렸다. 2층 베란다에 몸을 기대고 있는 홍차연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눈을 내리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이 열리자 희미하게 들리던 음악 소리가 막을 걷어낸 것처럼 크게 울린다.

    신발을 벗고 발을 들였다.

    “왔니?”

    “안녕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소파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가 손에 든 위스키 잔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투명한 잔 안에 든 동그란 얼음이 그 방향을 따라 돈다.

    “차연이한테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눈을 올렸다. 홍차연이 그녀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학교생활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네.”

    “차마 내 아들 이름에 붙여 두기에는 조금 불쾌한 소문인지라, 네 말처럼 이제 그만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 일주일 뒤에 전학 처리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렴.”

    마치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는 사람처럼 여유롭고 느긋한 태도였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고 가만 앉아 있다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일주일 뒤죠?”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빤히 나를 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어처구니없는 이유일 것이라 생각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캐리어가 보였다. 여행이라도 가는 건가. 황당하다.

    다음 주엔 수학여행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전에 홍차연 대역을 그만두고 싶은데. 싫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의 입이 열린다.

    “할머니가 기다리시는 것 같구나.”

    그녀가 문밖을 눈짓했다. 고개를 돌리고 보자 통창 너머로 마당 한쪽에 서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나를 본 누군가가 할머니에게 내가 왔다는 소식을 알린 듯했다.

    “일주일이야. 조금만 더 힘내주렴.”

    잔잔한 그 목소리가 얄팍하기 그지없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운동화에 발을 꿰어 넣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기 전, 몰려온 한숨을 뱉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우울한 낯은 귀신같이 잡아내던 할머니니까.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할머니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로 향한다.

    “누리야.”

    “어, 할머니.”

    어색하게 웃으며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아, 나 할머니 보러 왔다가. 사모님이 잘 지내냐고 여쭤보셔서 잠깐 이야기 나눈 거야.”

    할머니가 묻기 전, 내가 먼저 이 집에서 걸어 나온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입을 길게 찢어 다문 할머니가 숨을 내쉬더니 내 얼굴을 조목조목 훑었다.

    “아니, 그런데 머리는 왜 그려?”

    “아, 이거. 날도 덥고 해서.”

    훌러덩 드러난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덥다는 애가 옷은 왜 이렇게 껴입었어?”

    할머니가 지퍼를 끝까지 올려 잠근 후드를 눈짓했다. 안에 입은 교복 셔츠를 숨기려고 입은 거였다.

    “아, 바, 밤이 되면 또 쌀쌀하더라고?”

    아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자 할머니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았다. 영 수상쩍다, 하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할머니, 나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간다고?”

    “응.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네.”

    “반찬은?”

    “아, 걱정 마. 아직 있어. 할머니, 연락할게!”

    더 있다가는 괜한 트집이라도 잡힐까 후다닥 마당을 벗어났다. 세게 닫은 문에 대문이 쾅,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문 앞에 서서 몸을 돌리고 높은 담벼락을 보았다. 망할 놈의 집이 크기는 더럽게 컸다.

    “빼도 박도 못하고 수학여행 가게 생겼네.”

    고개가 수그러들며 깊은 한숨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는 길,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나뭇잎이 푸르고, 활짝 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열기가 섞여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교문 앞에 섰을 때 아이들의 두발과 교복을 점검하는 학생주임이 보였다. 교문을 들어서려다가 훑어본 교복에 명찰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를 뒤졌다.

    “어디 갔지.”

    그러니까, 어제 홍차연 집에 가기 전에 혹여 할머니를 마주치고, 정말 재수가 없게 할머니가 후드를 벗으라고 할까 봐 명찰을 뺐다. 후드 주머니에 명찰을 넣었는데. 명찰을 본 게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 진짜.”

    한숨이 흘러나왔다. 눈을 질끈 감고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타이가 없거나 명찰이 없는 아이들, 두발이 엉망인 아이들이 교문 앞에서 걸려 줄줄이 벌을 섰다. 벌 서는 것도 싫은데 아이들이 등교하는 시간, 교문 앞에 서 있는 게 제일 싫었다.

    가방을 열어 포스트잇을 한 장 떼어냈다. 펜을 꺼내 포스트잇에 홍차연 이름 세 글자를 적었다.

    [홍차연]

    이름을 적은 포스트잇을 가슴팍에 붙이고 교문을 들어섰다. 고개를 최대한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는데 어, 거기, 포스트잇,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 저, 저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학생주임이 사랑의 매를 휘휘 흔들며 나를 불렀다.

    “명찰이 되게 크십니다?”

    학생주임의 눈이 가슴팍에 붙은 포스트잇에 꽂혔다.

    “아, 네.”

    “네?”

    “…아, 아니요.”

    “이거 봐라.”

    사랑의 매가 어깨에 가볍게 내려앉았다가 올라갔다. 순간 포스트잇을 붙인 가슴을 찌르는 줄 알고 몸을 흠칫 떨었다. 그 몸짓에 학생주임이 어쭈, 하며 인상을 썼다.

    아, 그냥 명찰 없이 들어올 걸 그랬나. 포스트잇 따위를 가슴팍에 명찰이랍시고 붙이고 들어온 것을 후회하고 있는데 학생주임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스톱. 스톱.”

    사랑의 매가 어딘가로 향한다. 매가 향한 곳을 돌아보았다.

    “너 인마, 머리가 왜 그 모양이야?”

    사랑의 매 끝에 입술을 꾹 다문 남윤수가 콧김을 뿜으며 서 있었다.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건지 왁스를 덕지덕지 발라 이마를 훤히 드러냈다. 하와이안 셔츠에 일수 가방 들면 딱 그건데. 건달인데.

    “…선생님, 제 두발이 교칙을 위반한 것 같습니다.”

    남윤수가 우울한 낯으로 선생을 보다가 눈을 치켜뜨며 나를 봤다. 뭐지. 왜 나를 째려보는 거지.

    “심각한 위반이다, 이건.”

    학생주임이 남윤수의 머리를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교직 생활 몇 년 만에 이런 또라이를 다 만난다며 박수까지 쳤다. 박수를 받은 남윤수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나를 노려봤다. 옆구리에 끼우고 있던 사랑의 매를 손에 쥔 학생주임이 나를 돌아봤다.

    “내일은 명찰 달고 와라. 안 그러면 벌점이야.”

    “네.”

    학생주임이 사랑의 매를 휘휘 흔들며 들어가도 좋다고 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다가 남윤수와 눈이 마주쳤다. 잔뜩 처진 어깨에 불만이 가득 올라가 있는 듯 보였다. 입을 댓 발 내밀고는 나를 노려보는데, 대체 왜 나를 노려보는지 모를 일이다. 머리는 저 지경을 하고서.

    가슴팍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어내고 걸음을 돌렸다. 뒤에서 학생주임이 남윤수를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동관으로 가자 나를 힐끔거리는 아이들이 몇몇 보였다. 2학년만 있는 동관이라 그런지 소문이 더 빨리 퍼진 것 같다. 고개를 푹 숙이고 교실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가던 아이들이 아, 쟤야? 전학 온 애?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임석영은 아직 오지 않은 듯 자리가 비어 있다. 수업 종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좁은 교실 안, 줄 맞춰 놓인 책걸상을 보자 가슴이 꽉 막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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