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45화 (45/70)

제45화

말문이 턱 막혔다. 아직 임석영이 대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묘한 분위기가 이상한 물살을 타는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몸이 굳은 것처럼 안 움직였다.

“왜 대답을 못 해? 설마 너 진짜 저 새끼 좋아해?”

아이들이 임석영과 나를 번갈아 봤다. 임석영은 굳은 얼굴로, 나는 불안한 얼굴로 앞으로 닥칠 일에 그 어떤 대비도 하지 못한 채 놓여 있었다.

아니. 야식 메뉴도 한식, 중식, 양식을 결정하는 데만 몇 분이 걸리는데 한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질문을 예고도 없이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하는 강은호는 진정한 개새끼다.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 있는데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단숨에 아이들 틈에서 끌려 나왔다. 고개를 돌리자 손목을 잡고 선 김찬영이 보였다.

“잠깐만.”

발에 힘을 주고 버티자 김찬영이 고개를 젓는다.

“여기 있으면 너나 석영이나 둘 다 곤란해져.”

김찬영이 내 손목을 이끌었고, 그를 따라가다가 아이들 틈에서 흩어지는 임석영의 목소리를 들었다.

“와, 씨, 소름 돋아! 대답을 해봐, 새끼야. 너 진짜 홍차연 그 새끼 좋아하냐고!”

“그래. 좋아한다. 그러니까 건들지 마, 씹새끼야. 죽여버리기 전에.”

우뚝, 멈춰 섰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다 못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돌아보려고 하자 김찬영이 나를 끌어당겼다.

임석영이 나를 좋아한다는데,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세상과 함께, 임석영의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

임석영이 나를 좋아한다고 한 순간 긴 복도 전체가 정적에 잠긴 듯했다. 그 정적을 깬 사람은 남윤수였다.

야! 나도 홍차연 좋아하는데! 왜 우리 차연이 괴롭히고 지랄이야! 이 맞아도 싼 새끼야!

뒷말은 김찬영과 함께 복도를 빠져나오며 듣지 못했다.

옥상으로 갔다. 김찬영과 나란히 서서 난간 너머를 내려다보는데 텅 빈 운동장처럼 몸 안이 비어버린 것 같았다. 정신은 멍하고 미친 듯 뛰던 가슴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괜찮아?”

김찬영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멍하니 운동장을 보다가 괜찮아, 하는 그 말을 곱씹어봤다.

“괜찮을까.”

김찬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내 목소리가 너무 처진 탓일까. 나를 보는 김찬영의 낯이 조금 어두워진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임석영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사실은 이제 추측과 과장, 오해와 결합되어 가공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해명할 수 없고, 어쩌면 그것은 임석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들은 계속 우리를 주시하게 될 테고, 자꾸 시선이 쏠리다 보면 자연스레 의기소침해지겠지.

최악의 상황은 이 이야기가 홍차연 집으로 새어 들어가는 것이다. 졸지에 연애사가 한 줄 생겨버린 홍차연이 얼마나 두 눈을 뒤집고 발악을 하며 내게 포악한 말을 쏟아낼지, 생각만으로 참담한 기분이 든다.

조용히 출석이나 할 것이지, 연애를 해? 어떻게 내 아들 이름에 먹칠을 할 수 있지?

사모님 음성도 들리는 것 같고. 아….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임석영이나 나보다 그 집 사람들을 신경 써야 하는 처지가 서럽다.

김찬영이 난간을 잡고 있는 내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표정 좀 풀어.”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너도 좀 풀어, 매번 무표정이야, 하고 말하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의 햇살이 김찬영의 머리 위에 걸렸다. 나를 보는 표정이 전과 다름없었다. 임석영이 하는 말을 들었을 텐데. 그게 친구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눈치챘겠지. 어쩌면 김찬영도, 남윤수도 다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너희 둘 그러고 있는 거 하나도 안 괜찮거든?”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고개를 돌리고 보자 임석영이 옥상 문턱을 넘어왔다. 방금 강은호의 멱살을 쥐고 있던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능글맞은 모습이었다.

“수업 종 쳤는데 왜 여기 있어?”

앞에서 걸음을 멈춘 임석영이 김찬영을 보며 물었다.

“그러는 너는?”

김찬영의 무미건조한 답에 임석영이 허,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짝꿍이 안 들어와서 찾으러 왔지.”

임석영이 내 정수리를 콕 찌르며 가리켰다. 그러고는 여기, 이 콩알, 하고 말을 덧붙인다.

“그러니 너는 네 짝꿍 윤수에게로 돌아가. 얼른.”

“윤수가 왜 내 짝꿍이야. 내 짝꿍 덕호야.”

“아, 윤수든 덕호든. 얼른 수업 들어가. 약속 존나 안 지키는 놈아.”

임석영이 김찬영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무슨 약속.”

“아, 그.”

임석영이 말을 머뭇거리자 무표정하게 보던 김찬영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얘 옆에 붙어 있지 말라고 한 거? 그게 약속이었어? 협박인 줄 알았는데.”

김찬영의 시선이 느긋하게 내 얼굴에 닿았다. 나는 답을 모르니 김찬영에게 받은 시선을 임석영에게 돌려줬다. 임석영이 난감한 얼굴로 김찬영의 얼굴을 흘겼다.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와? 하고 묻는 듯했다.

“먼저 갈게.”

걸음을 뗀 김찬영이 임석영의 앞을 지나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나도 얘 친구야. 친구 옆에 있는 건 내 마음이지.”

말을 끝낸 김찬영이 옥상을 빠져나갔다. 임석영이 황당한 얼굴로 김찬영이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만난 모양이다.

옥상 문으로 가 있던 시선이 내게로 옮겨 왔다. 임석영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의 분노는 애초에 일었던 적도 없다는 듯 보이지 않았다.

임석영이 한 손에 들고 있는 캔 음료를 내 뺨 위에 올렸다. 냉기가 뺨으로 빠르게 옮겨 붙었다. 움찔 몸을 떨며 눈을 올리자 임석영이 작게 웃는다.

“열 좀 식히라고.”

“아… 고마워.”

손을 올려 뺨에 닿은 캔을 잡았다. 임석영이 등장하기 전까지 내내 곱씹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런데 너.”

묻고 싶은 말은 괜찮아? 였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간다. 무엇에 대해 묻는지 뻔히 알면서 대답하기 싫은 듯 임석영이 눈을 돌린다.

“너 어쩌려고 그래. 애들이 안 좋은 말이라도 하면.”

“신경 안 써, 남이 하는 말. 진짜도 아니잖아.”

수업이 시작된 학교 운동장이 조용하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고, 순간 바람에 머리칼이 나부낀다.

“나 미워?”

흔들리던 머리칼에 주던 시선을 그의 얼굴로 옮겼다.

“내 마음대로 너 좋아한다고 말해서?”

그런 건 아닌데,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우린 아직 너무 어리고, 소문에 쉽게 휩쓸리고, 그 소문이 머무는 우리의 세계는 너무 작아서.

깊은 곳에서부터 답답한 숨이 파도처럼 몰려와 말문이 막혔다. 고개를 떨어트리며 한숨을 뱉자 분위기가 어색하게 굳는다.

옥상 바닥으로 늘어진 임석영과 나의 그림자가 보였다. 내 발밑에 붙어 있는 그림자보다 조금 더 기다란 임석영의 그림자. 발밑에서부터 꺼멓게 늘어진 저 안에 대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갇혀 있는 걸까. 서로에게 기울었다가 멀어지고, 포개졌다가 떨어지는 이 검은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우리를, 사람들은 어떻게 보게 될까.

“나는 남이 하는 말 신경이 쓰여. 진짜가 아니더라도. 나 자체가… 진짜가 아니잖아.”

이상하게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그림자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임석영은 대답이 없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아까 그 새끼는 너를 안고 있었어. 그 상황에서 내가 그냥 보고만 있어야 됐다고 하는 건.”

힘없이 낮게 처진 목소리였다. 임석영이 느리게 고개를 든다.

“진짜 화나.”

시선이 부딪쳤다. 차분한 듯 말했으나 목소리에 노기가 어려 있었다. 연거푸 한숨만 내쉬더니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나를 보지 않은 채 먼 곳만 응시하는 게, 뭔가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임석영은 화가 나 있었다. 아마 강은호네 교실에서 그러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부터 줄곧 기분이 나빴을 거다. 임석영은 내가 정체를 숨기고 남자 고등학교에 있는 것을 늘 불안해했고, 하루빨리 홍차연 대역을 끝내기를 원했다.

정체를 숨기는 것도 불안한 마당에 임석영이 이렇게 내 일에 참견하며 열을 낼 때면 그 불안이 극도로 높아졌다. 아이들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임석영과 달리 나는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게 구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애였다고 하더라도 강은호의 행동은 분명 잘못됐다. 좋아하는 마음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니까. 그런데 나는 홍차연이 아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서 임석영을 좋아한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어쩐지, 홍차연이 망할 놈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도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도리가 임석영에게는 다른 의미로 굴러가는 듯했다. 좋아하는 애가 다른 애에게 억지로 안겨 있는데, 그걸 그냥 넘겨버리는 건 제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주먹이 먼저 나가는 임석영이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런 것마저 내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하니, 화가 나는 저 심정을 아주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새끼 명찰, 빨리 버렸으면 좋겠어.”

고개를 내리고 교복 셔츠에 붙은 명찰을 보았다. 홍차연. 그 이름이 정갈하게 내 가슴에 붙어 있다.

“이러다 한여름 돼.”

“…나도 알아.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내 일이고 내가 알아서 해.”

딱딱하게 나간 말투에 임석영의 표정이 조금 굳는다.

“그 집은 대체 아들 새끼 학교 안 보내고 뭐 하는 거야.”

녹음이 우거진 풍경 속에서 새가 울었다. 핸드폰 진동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내 것은 아니었으니 임석영의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는 것이리라.

내게도 소리가 들릴 정도인데, 임석영이 제 핸드폰이 울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임석영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옥상 너머의 풍경을 바라봤다.

새가 울고, 불어온 바람에 임석영의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햇빛이 부서지고 구름이 지나가며 그늘이 졌다.

사막 위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 언덕에 가슴이 탁 막히고, 우리는 서로에 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들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것 같다.

*

마지막 수업이 끝날 때까지 임석영과 서먹한 대화를 나누었다. 서먹함의 원인은 나였다. 왠지 모르게 전처럼 임석영을 대할 수 없었다.

수업 시간에도, 수업이 끝난 쉬는 시간에도, 그가 뚫어져라 나를 봤지만 못 본 척했다. 임석영의 시선이 느껴지면 의식적으로 피했고, 그가 자세를 틀고 앉아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식으로 나를 응시하면 책상에 엎드려 누웠다.

반 아이들이 우리를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누구 하나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강은호 교실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봤거나 들은 듯했다.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홍차여어언!”

큰 소리를 내며 남윤수가 교실로 들어왔다. 내 책상에 걸터앉더니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좀 괜찮냐?”

“어? 뭐가?”

“뭐긴, 인마. 은호 새끼가 너 괴롭혔잖아.”

“괜찮아.”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내리며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났다. 내 반응이 이상했는지 남윤수가 음? 하며 내 얼굴 아래로 머리를 들이민다.

“괜찮은 거 맞어?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남윤수가 장난스럽게 등을 때린다. 힘을 내라는 식인 것 같았으나 나도 모르게 몸이 휘청거리며 밀려났다.

“오 씨, 너 진짜 어디 아프냐?”

책상에서 폴짝 내려온 남윤수가 내 팔을 붙든다.

“아, 아니. 네가 너무 세게 쳐서….”

남윤수의 시선이 임석영과 나를 오간다. 설핏 눈가가 구겨지는 것이 곧 무슨 질문이라도 던질 것 같아 후다닥 움직였다.

“나 먼저 갈게.”

“홍차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교실을 나섰다. 머리를 드는 두더지처럼 뜬소문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임석영이 홍차연한테 고백했다가 까였다더라.’

‘그럼 임석영 혼자 좋아했다고?’

‘아니야, 강은호랑 임석영 가운데서 홍차연 등이 터진 거라던데. 삼각관계 아니냐?’

‘아니야, 강은호가 홍차연을 졸라 괴롭혀서 그런 거래. 나 같아도 친구가 이유 없이 괴롭힘 당하면 빡치지.’

‘그런가. 아니, 그래서 홍차연이 누군데?’

‘홍차연? 걔 아닌가. 전학생?’

나와 임석영, 강은호의 이름을 담은 그런 소문들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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