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44화 (44/70)
  • 제44화

    열심히 굴러가던 다리가 멈춘 곳은 버스 정류장이었다. 민망한 얼굴을 하고 서 있자 얼마 안 있어 황당한 얼굴을 한 임석영이 다가왔다. 구깃구깃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팔랑팔랑 흔들며 나를 봤다.

    “너 괴롭힘 당하는 게 뭔 줄 모르지?”

    지폐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찔러 넣은 임석영이 팔을 올려 내 목을 감았다. 눈이 동그래졌다. 이상한 상황을 피해 도망 왔더니, 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됐다.

    “아, 진짜 화낸다!”

    두 팔로 임석영의 팔을 잡고 버둥거렸다. 버스 정류장에 아무도 없다지만,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른 한 손으로 임석영이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에 머리칼을 끼운 채 이마를 눌렀는데, 그 힘에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울상을 하고 임석영을 봤다.

    아, 제발, 학교 근처에서 이러지 말자, 하고 보는데 녀석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본다.

    “이런 걸 보고 괴롭힌다고 하는 거야. 네가 싫어하는 짓을 하는 거.”

    “아, 알았어. 미안.”

    “안 미안하면서.”

    “아니야. 미안해. 완전 많이 미안해.”

    임석영이 지그시 나를 내려다봤다. 이제 이것 좀 풀어주면 안 될까, 하며 단단한 팔을 톡톡 두드렸다. 말없이 얼굴을 훑고 내려간 임석영이 목을 감은 팔에 힘을 풀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못되게 괴롭히고 싶지만 착한 내가 참는다.”

    목을 감고 있던 팔이 느슨하게 풀렸다. 잽싸게 임석영에게서 벗어나 거리를 벌렸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뺨을 쓸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힐끔 눈을 돌렸다. 임석영이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봤다. 거리를 벌리고 섰는데도, 그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조금 더 올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 손에서 연하게 임석영의 향이 났다.

    *

    “헐, 진짜 둘이 그러고 있었다고?”

    “그래, 새끼야.”

    다른 친구를 바짝 안은 강은호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동 수업을 갔다가 교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임석영은 반장과 함께 책걸상을 나르러 갔다. 그 둘의 교과서까지 챙겨 들고 가는데 복도에 나와 있는 강은호와 그의 무리를 만났다. 눈이 마주쳤다.

    복도를 지나가는데 강은호가 들으라는 듯 나와 임석영의 이야기를 꺼냈다. 장미꽃이 어쩌고, 사진이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아주 없는 말도 아니었다.

    대체 담벼락 아래에서 사진 찍으려고 했던 걸 쟤가 어떻게 알지? 하며 눈을 돌리자 그 길을 지나갔던 애가 보였다. 강은호 무리에 끼어 있었다.

    아, 어쩐지 피하고 싶더라니.

    “더럽지 않냐?”

    그렇게 말하며 강은호가 붙어 있던 친구에게서 떨어졌다. 시선이 내게 쏟아진다. 그중 한 명의 시선이 내가 든 책에 닿았다.

    “와 씨, 임석영 책 껴안고 있는 거 봐.”

    누군가는 웃음을 터트리고 누군가는 몸서리를 친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이대로 그냥 지나가 버리면 쟤들이 하는 말을 다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발이 안 떨어졌다. 그럼 대체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가슴만 빨리 뛸 뿐 좀처럼 머리가 안 굴러갔다.

    두 팔 안에 책을 안고 가만히 서 있자 강은호가 눈을 흘기며 시비를 걸어온다.

    “왜? 네가 좋아하는 애한테 이르기라도 하게?”

    빈정대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꽂혔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아 시선을 낮은 곳으로 내렸다. 눈을 마주하고 있지 않아도 느껴졌다. 강은호가 뚫어져라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게.

    바닥으로 향한 시야 속으로 강은호의 발이 들어왔다. 내 앞에 서서 수그리고 있는 머리를 튕겨내듯 밀어낸다.

    “사람 말을 대놓고 씹네. 야, 왜 눈을 깔고 그래? 내가 너 때려? 고개 안 드냐?”

    책을 움켜쥐었다. 떨어트린 시선을 못 들고 있자 강은호가 턱을 잡아 올렸다. 단숨에 시선이 마주쳤다. 날이 선 눈매가 사납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어색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러는 너는 왜 사람이 앞에 있는데 대놓고 씹어?”

    “허, 이 새끼가 뭐래. 너 약 먹었냐?”

    턱을 잡은 강은호의 손에 악력이 점점 세졌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이 와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굴을 찡그린 채 강은호의 팔을 꽉 잡았다.

    “내 말이 틀려? 너랑 그 새끼랑 껴안고 염병 떤 거 맞잖아.”

    “야, 네가 봤어?”

    목소리가 튀어나온 곳으로 모두의 시선이 돌아간다. 교과서를 쟁반처럼 들고 그 위에 딸기우유 세 개를 올려놓은 김윤환이 기분 나쁜 얼굴을 하고 걸어왔다.

    “얘랑 임석영이랑 그러고 있는 거 네가 직접 봤냐고.”

    이쪽으로 걸어온 김윤환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강은호를 올려다본다.

    “뭔 상관이야, 너는. 빠져, 멸치 새끼야.”

    멸치라는 말에 김윤환이 허! 하고 눈을 부릅뜬다.

    “지는 고릴라 같은 주제에 어디 태평양 멸치한테 지랄이야. 멸치가 뭉치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새끼야? 바다가 은빛으로 물들어!”

    뜬금없는 태평양 멸치설에 다른 애들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강은호가 손을 털듯 내 턱을 놨다. 별꼴을 다 본다는 투였다.

    “얘가 봤거든? 모르면 작작 나대라.”

    그날 우리를 지나쳐 갔던 애가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자기가 한 말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생각은 못 한 모양이었다. 안 한 건가.

    “야! 김윤환! 뭔 일 났어?”

    복도 끝에서 김태욱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돌아보자 교실에서 상체를 길게 뺀 김태욱과 정은솔이 보였다. 아까 멸치를 외치던 김윤환의 목소리가 좀 많이 컸나 보다.

    “어어! 아무것도 아니야!”

    김윤환이 금방이라도 튀어올 것처럼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제 친구들을 향해 소리쳤다. 허리를 숙여 떨어진 교과서를 주웠다. 내 이름과 반장 이름, 임석영 이름이 다시 손에 들어온다.

    아, 대체 강은호 얘는 왜 이러는 걸까. 무어라 꼬집을 말이 없나 고민하고 있는데 김윤환이 내 어깨를 친다. 눈이 마주치자 머리를 까닥였다.

    “뭐 해? 가자.”

    “어? 어.”

    돌아서며 김윤환이 다 들으라는 식으로 말한다.

    “참 남 일에 관심도 많다. 친구끼리 껴안고 있든가 말든가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러곤 멀어지며 말을 덧붙였다.

    “친구 물건 훔치는 게 대수지. 안 그러냐?”

    김윤환이 강은호가 있는 쪽을 눈짓하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란 듯 가운뎃손가락으로 등을 긁적였다. 뒤에서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욕지거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김윤환의 능청 때문인지 마음이 한결 나았다.

    “고마워. 도와줘서.”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나란히 걷던 김윤환이 휘적휘적 속도를 빨리하며 앞서 나갔다.

    문제는 그다음 시간에 터졌다. 김찬영이 그랬던가. 강은호 완전 꼴통이라서 수틀리면 피곤해진다고.

    4층 화장실에 갔다가 내려오는 계단에서 강은호와 마주쳤다. 왠지 우연이 아닌 듯했다. 아까 복도에서의 일이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는지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어딘가 뒤집어진 것처럼 보였다.

    “야.”

    아무도 없는 계단, 강은호가 길을 막고 섰다.

    “시발, 내가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수업 시간에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하자 강은호의 손에 팔이 잡혔다.

    “내가 없는 말 했냐? 너 임석영 그 새끼 좋아하잖아. 그런데 왜 나를 처 맥이고 지랄이야, 진짜.”

    팔을 뒤로 당겼으나 강은호의 손에 다시 끌려갔다. 허탈한 숨이 흘러나갔다. 얘는 대체 왜 이렇게 모든 것에 날을 세우는 건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해서 다 삐뚤어진 채 들이받는 건지.

    “너 무슨 피해망상 있어?”

    “뭐?”

    “너한테 한 방 먹인 것도 없는 거 같은데, 네가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고 하니까. 내가 네 코뼈를 부러트리기를 했어, 빡대가리를 후려치기를 했어?”

    “미쳤냐, 너?”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등이 벽에 붙었다. 순간 뒤로 밀어내는 힘에 계단을 헛디딜 뻔했다.

    “너 때문에 온 학교에 도둑놈 새끼라고 소문이 났는데, 먹인 게 없어?”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야.”

    “그럼 나도 사실대로 말하면 되겠네. 게이라고.”

    “…….”

    “맞잖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시발, 네가 게이가 아니라고?”

    아무 말 없이 노려보자 강은호가 헛웃음 지으며 나를 끌고 계단을 내려간다. 몸을 뒤로 당겨도 소용이 없었다. 마구잡이로 끌어당기는 통에 2층 복도까지 끌려왔다.

    뒤엉킨 채 들어온 우리를 아이들이 쳐다봤다. 제 교실로 나를 데리고 들어온 강은호가 그날 우리를 지나쳐 갔던 애 앞에서 멈춰 선다.

    “야, 박민. 네가 말해봐. 네가 봐도 둘이 이상했다며.”

    박민이라는 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강은호를 번갈아 본다.

    “어? 어, 갑자기 무슨….”

    말을 얼버무리자 갑자기 옆에 있는 책상을 걷어차며 난동을 부린다. 제 화에 못 이겨 돌아버린 것처럼 보였다.

    “아! 네가 이 새끼 게이인 거 같다고 그랬잖아!”

    “아, 아니, 그건… 네가 그렇게 물어서, 그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한 건데….”

    박민의 낯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아까 그 무리에 끼어 있기에 친구인 줄 알았더니,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아 씨, 야 네가 네 입으로 말해. 너 남자 좋아하지?”

    “…….”

    “야, 말을 해보라고. 어느 쪽인지.”

    아무도 강은호를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들 수군거리며 이쪽을 구경했다.

    “저기, 은호야, 여기서 이러는 건.”

    누군가 그렇게 말하며 끼어들자 강은호가 소리를 지르며 뒷말을 싹둑 잘라먹는다. 아이들이 놀란 얼굴로 강은호를 봤다.

    강은호는 지금 이곳에서 나를 망신 주고 싶은 것 같다. 그런데 뭔가 자기 뜻대로 상황이 굴러가지 않아서, 그래서 고삐가 풀려버린 건가.

    “너 나한테 관심 있냐?”

    “미쳤냐?”

    “그런데 뭘 좋아하는 걸 캐묻고 그래.”

    내 말에 강은호가 소리 내서 웃음을 터트리더니 표정을 싹 바꾼다.

    “야, 민이가 분명 봤다고 그랬어. 얘랑 임석영이랑 학교 뒤에서 이러고 있는 거.”

    강은호가 아이들을 보며 나를 끌어당긴다. 그러더니 제 품 안에 넣고 내 허리를 감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몸을 버둥거리자 강은호가 더 세게 몸을 끌어안았다.

    “야! 이거 놔!”

    “야, 네들이 보기엔 이게 친구냐?”

    으으, 하며 강은호의 옆에 있던 애가 몸서리를 치고, 다른 애가 웃는다. 가슴이 미친 듯 뛰고 뜨거워졌다.

    “놓으라고! 미친 새끼야!”

    “왜? 임석영이 이렇게 하니까 네가 좋아 죽겠다는 듯 웃었다던데? 아아, 그 새끼는 네가 좋아하는 애고 나는 아니라서 그런가?”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온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 이건 분노였다.

    “네가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으니까, 제발 떨어져….”

    “그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사람 등신 만들지 말고.”

    이를 꾹 물고 눈물을 참았다. 몸이 터질 것만 같다.

    너는 원래 등신 새끼였잖아. 반성하는 법을 학습하지 못한 사람처럼.

    강은호의 팔을 깨물자 녀석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내 머리를 밀어냈다. 절대 떨어지지 않고 들러붙어 이를 박자 내 머리를 때리려는 듯 녀석의 손이 올라간다.

    순간 둔탁한 타격 음이 귓전을 울렸다. 강은호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우당탕 책걸상이 흐트러졌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순간 얼었다.

    “시발, 돌았냐?”

    허공을 가르고 올라간 강은호의 손이 낙하하기 전, 임석영이 먼저 강은호의 몸을 밀어낸 거였다. 홍차연이고 나발이고 들이받자는 생각이 강해지던 머리에 임석영이 폭력 때문에 교내 봉사활동을 했던 사실이 확 떠오른다.

    “어, 임, 임석영!”

    급하게 임석영의 등을 잡아당겼으나 좀처럼 끄떡하지 않았다.

    “야! 하지 마! 때리면 안 돼!”

    크게 내지른 소리에 막무가내로 나아가던 임석영이 멈춰 선다. 두 손을 올려 머리를 감싸고 있던 강은호가 그제야 얼굴을 드러낸다. 급하게 눈물을 닦는 듯했다.

    “왜 밀고 지랄이야!”

    강은호가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사과해.”

    “뭐?”

    “방금 네가 한 짓 전부 사과하라고!”

    “가만히 있다가 봉변당한 건 난데 왜 내가 사과를 해!”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언성을 높인 강은호가 씩씩거리며 나를 본다.

    “설마 홍차연 저 새끼한테 사과하라고? 미쳤냐? 야, 정신 차려. 쟤 너 친구로 안 봐, 등신아.”

    “친구도 뭣도 아닌 너한테 내가 그런 말까지 들어야 되냐?”

    씨근덕거리며 임석영을 보던 강은호가 하, 황당하네, 하며 시선을 돌린다. 매섭게 나를 노려보더니, 비릿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다.

    “아, 잠깐만. 뭐야? 저 새끼가 너 좋아하는 거 너도 아는 거야?”

    일순 아이들이 웅성거린다. 아이들의 눈이 나와 임석영을 오가며 움직인다.

    “와아, 알면서도 이래?”

    “…….”

    강은호의 멱살을 잡은 임석영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순간이었다.

    “야, 너 저 새끼 좋아하냐?”

    강은호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질문이 나와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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