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43화 (43/70)
  • 제43화

    학교에서는 진로상담이 진행됐다. 쉬는 시간마다 몇 명의 아이들이 담임을 만나고 오는 방식이었는데, 한 명이 담임을 만나 진로상담을 하고 나오면 다음 번호의 아이가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수업이 끝나자 반장이 임석영의 이름을 불렀다. 임석영 차례인 듯했다.

    “아, 이런 거 왜 하나 몰라.”

    책상에 엎드려 누워 있던 임석영이 툴툴거리며 교실을 벗어났다.

    “졸려….”

    눈을 느리게 끔벅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눈가를 문지르는데 앞자리에 앉은 정은솔과 눈이 마주쳤다. 몸을 돌리고 앉아 나를 힐끔거리며 뭔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야.”

    이유를 물으려는데 정은솔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 한 장을 내 책상 위에 놓는다.

    “잘 그렸지. 내가 네 초상화 그렸다.”

    볼펜 똥이 덕지덕지 묻은 종이에 동그란 얼굴, 왕방울만 한 눈, 삼각형 코와 입술을 가진 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지금 이걸 나라고 그린 건가.

    “포인트는 이거야.”

    정은솔이 손에 쥔 볼펜으로 멸치처럼 그려놓은 몸통을 가리킨다. 심드렁하게 눈을 올리자 뭐가 웃긴지 혼자서 깔깔 소리 내 웃는다. 아 씨, 진짜, 개 웃기네, 하면서.

    뭐가. 같이 웃자. 대체 어디가 웃겨.

    정은솔이 멸치 같은 몸통 위에 갑자기 무언가를 덧그린다. 투박하게 선을 긋더니 갑옷 같은 교복 재킷이 완성됐다. 그러더니 혼자 숨이 넘어가게 웃는다.

    “…….”

    노트를 뒤집어 빈 공간에 웃고 있는 정은솔의 얼굴을 그렸다. 눈을 내렸다가 올리며 정은솔의 특징을 빠르게 옮겼다.

    “와 씨, 개 똑같네.”

    옆에서 툭 튀어나온 김태욱이 그림을 보고 말했다. 문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얼굴을 들이민 김윤환이 종이를 낚아채듯 뺏어 가더니 욕을 하며 웃는다.

    “김윤환 이 새끼야, 웃지 마! 이게 뭐가 똑같아! 하나도 안 똑같아!”

    “이게? 이게 안 똑같다고? 나 이거 네 증명사진인 줄 알았는데?”

    김윤환이 정은솔 얼굴이 그려진 종이를 칠판에 붙였다. 그걸 본 아이들이 다 웃고 지나갔다. 토끼를 닮은 정은솔의 특징이 잘 살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안 똑같다고!”

    정은솔이 그렇게 외친 순간 교실 앞문으로 임석영이 들어왔다. 칠판에 현상수배 포스터처럼 붙은 종이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본다.

    “야, 이거 은솔이냐?”

    임석영의 말에 김윤환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 미대 가야겠다. 싹이 보여. 홍카소.”

    정은솔의 그림을 시작으로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의 얼굴을 그렸다. 돗자리를 편 것처럼 아이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꼼꼼하게 특징을 살려 그리던 그림이 오후가 되어서는 큰 동그라미 하나에 눈 두 개를 점 찍는 지경이 되자 야유를 들으며 문을 닫게 됐다.

    칠판에 내가 그린 그림이 포스터처럼 주르륵 붙었다. 이제 아무도 자기 얼굴을 그려달라고 내 앞자리에 앉지 않게 되었을 때, 옆자리에서 끈질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고 보자 임석영이 내 책상에 있는 노트를 툭툭 건드린다.

    “왜?”

    “나도 그려줘.”

    이제 귀찮은데.

    말없이 건너다보자 임석영이 “학교 끝나고 떡볶이 사줄게.” 한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놓았던 연필을 다시 들었다.

    “예쁘게 그려주세요.”

    “있는 대로 그릴 거야.”

    포스트잇을 앞에 두고 임석영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임석영을 보고 얼굴선을 그리고, 눈을 보고 눈동자를 그렸다.

    눈매가 조금 기다란 특징을 살리기 위해 임석영의 눈꼬리를 뚫어져라 응시하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임석영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연필을 손에 들고 턱을 긁적였다. 이상하게 그림이 쉽게 안 그려졌다.

    “왜? 너무 잘생겨서 그리기 힘들어?”

    “뭐래.”

    임석영이 피식 웃는다. 순간 미소하며 들어간 보조개가 보였다. 입술 옆에 보조개 하나를 그려 넣었다.

    학교가 끝나고 후문 뒤에 있는 포장마차로 갔다. 임석영과 나란히 서서 떡볶이와 어묵을 먹었다. 임석영이 그림 값을 후하게 쳐주겠다며 먹고 싶은 만큼 먹으라고 했다. 녀석이 포스트잇을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통에 떼어내느라 애를 먹었다.

    “야, 그거 포스트잇에 그린 건데. 그게 무슨 그림이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앞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어묵꼬치가 네 개 놓였다. 충분히 많이 먹은 것 같은데, 하나 더 먹어도 되려나.

    어묵꼬치를 한 번 보고, 임석영을 한 번 봤더니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는데 임석영이 픽 웃음을 터트린다.

    “너 지금 내 허락 기다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석영 군, 나 이거 하나 더 먹어도 될까.”

    앞에 있는 어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임석영이 눈을 가리며 웃었다. 안 되는 건가. 나 너무 많이 먹었나.

    임석영이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사장님에게 건넸다. 다 먹으면 계산해 주세요, 하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왜 이렇게 여유로워 보이는지.

    석영이, 너, 부자였니?

    종이컵에 어묵 국물을 따라 임석영에게 건넸다. 종이컵 하나를 더 들고 국자를 드는데 임석영이 어? 하며 건네받은 종이컵을 내 앞으로 내민다.

    “파가 하트야.”

    종이컵 위에 하나 떠 있는 파가 하트 모양이었다. 어, 하트구나, 하며 시선을 돌리는데 임석영이 말한다.

    “네 마음이야? 이제 나한테 주는 거야?”

    어묵 국물을 따르다가 흘긋 시선을 올리자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다 먹은 어묵꼬치 하나를 칼처럼 들고 임석영을 겨눴다.

    “헛소리하면 죽는다.”

    “어떻게 죽일 건데.”

    임석영이 떡볶이 양념이 묻은 입가를 쓸어 닦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어? 어떻게 나를 죽여줄 건데요.”

    곁눈질로 사장님을 보다가 임석영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눈치 없는 새끼야, 제발 조용히 해, 하고 신호를 쏘았으나 받지 못한 건지, 무시하는 건지, 표정에 변화가 없다.

    “너, 진짜, 장난하지 마라.”

    화장지를 뜯어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닦은 임석영이 얄밉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콩알만 한 게 전투력만 높아서.”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리다가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웃은 뒤 눈을 내리고 어묵을 먹었다. 임석영은 왜 이렇게 태연한 걸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 같다.

    임석영과 내가 먹은 게 떡볶이 1인분, 김말이 튀김 두 개, 만득이 핫도그 한 개, 어묵꼬치 여섯 개였다. 만 2천 원이 나왔고, 사장님이 임석영에게 8천 원을 거슬러 줬다.

    포장마차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거리가 한산했다. 담벼락이 쭉 이어진 길을 걸었다. 가방끈을 잡고 걷다가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무슨 말?”

    “하트니 뭐니… 그런 말.”

    고개를 올려다보자 임석영이 턱을 문지르며 나를 보았다.

    “설마 아까 포장마차에서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래?”

    고개를 끄덕이자 임석영이 얕은 한숨을 뱉으며 미세하게 웃었다.

    “사장님이 소문이라도 낼까 봐?”

    “…모르는 일이지.”

    “심장도 콩알만 하네.”

    임석영이 엄지에 검지를 붙이더니 삐죽 튀어나온 엄지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네 심장이 이만하다, 이만큼 작다, 뭐 그런 뜻인 듯했다.

    저리 치워, 하며 임석영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자 손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임석영이 음? 이거? 하며 다시 내 앞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뭐야.”

    임석영이 바로 세우고 있던 손을 조금 비틀었다. 엄지가 시계 바늘처럼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이거, 이거 그거잖아.”

    임석영이 자세히 보라는 듯 손을 더 가까이 내밀었다. 눈을 내리고 임석영의 손을 살폈다. 어디서 봤더라, 생각하는데 무언가 떠올랐다. 이렇게 삐죽 튀어나온 엄지를 본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엿이나 먹어라, 하면서 엄지를 빼는 걸.

    “지금 나한테 욕하냐?”

    “뭐?”

    임석영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봤다. 이게 대체 어디를 봐서 욕이지, 하며 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더니 뭔가를 알아챘는지 헐, 하며 눈을 올렸다.

    “야, 그건 이거 아니거든?”

    “그럼 뭔데. 이런 모양이었거든?”

    분명 임석영이 내게 욕을 한 것이 틀림없다, 생각하며 손을 올렸다. 손가락 어디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그런 모양이었는데. 엄지가 어떻게 튀어 나왔더라.

    고심하며 손가락을 움직이자 임석영이 하지 말라는 듯 제 손 안에 내 손을 넣어 잡았다.

    “하트랑 욕도 구분 못 하고. 너를 어쩌면 좋냐.”

    “욕이었는데.”

    “하트였어.”

    그런가, 하며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다시 올리려고 하자 임석영이 힘을 주며 손을 잡아 내렸다.

    “하지 마.”

    응, 하고 손 모양 따라 하기를 포기했는데 임석영이 잡은 손을 안 놨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손을 뺐다. 임석영이 아쉬운 얼굴을 하고서 나를 본다.

    “아무도 없는데.”

    “안 돼.”

    단호하게 거절하고 홱 고개를 돌렸다.

    담 위로 장미 넝쿨이 넘어와 빨간 벽돌을 수놓았다. 초록색 잎에 빨갛게 꽃을 피운 모양이 예뻤다.

    “홍차, 내가 사진 찍어줄게. 벽에 붙어 서봐.”

    “갑자기?”

    임석영이 가방을 잡아끌고 가더니 나를 벽 앞에 세웠다. 내 어깨를 잡고 이리 옮겼다가 저리 옮겼다가 하며 위치를 잡았다. 눈동자를 옆으로 돌리니 귀 부분에 닿은 장미꽃이 보였다. 귀에 꽃을 꽂은 것처럼 보이게 내 자세를 잡아준 것 같았다.

    “자. 홍차는 여기를 보세요.”

    두 걸음 뒤로 물러난 임석영이 핸드폰을 들고 나를 조준했다.

    “아, 어색한데.”

    웃지도 못하고 임석영이 잡아준 자세 그대로 얼었다. 대부분의 사진 기사들은 고객님, 웃으세요, 스마일, 치즈, 김치, 하면서 미소를 유도할 텐데, 임석영은 그런 게 없었다. 찰칵하는 소리가 무자비하게 터졌다.

    찰칵하고 한 번만 터진 게 아니다. 찰칵, 차, 차, 차, 찰칵, 차, 찰, 찰, 차차찰, 찰, 찰칵, 하고 터졌다. 얼어서 어색하게 굳은 얼굴이 점점 무표정이 됐다. 사진을 찍는 게 아니고 따발총을 쏘는 줄 알았다.

    “그만 찍어.”

    자세를 틀며 걸어 나가려고 하자 임석영이 어어!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나랑 한 장 찍어야지.”

    “여기서?”

    성큼 다가온 임석영이 어깨를 붙이고 섰다. 아, 잠깐만, 여기 학교 담벼락 뒤잖아, 하며 바쁘게 고개를 돌렸다. 이거 누가 봐도 그림이 이상했다.

    불안한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다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 이쪽으로 걸어오는 같은 학교의 교복을 발견했다. 그리고 완전한 밤이 되지 않은 거리에서,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아이의 눈을 보았다.

    “어어어!”

    나도 모르게 두 팔로 있는 힘껏 임석영을 밀어냈다. 무방비 상태의 임석영이 휘청거리며 밀려났다. 핸드폰이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는지, 어정쩡한 자세로 핸드폰을 잡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봤다.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아이와 임석영을 번갈아 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폐가 잡혔다. 안도할 틈도 없이 지폐를 꺼내 임석영에게 건넸다.

    “이, 이거밖에 없어.”

    “어?”

    임석영이 자세를 고치며 눈을 찌푸렸다.

    “돈, 돈 이거밖에 없다고.”

    “뭐 해?”

    힐긋 눈을 돌렸다. 저만치에 있던 아이가 더 가까워졌다. 임석영의 손에 지폐를 구겨 넣고 슬금슬금 옆으로 물러났다.

    나도 지금 내가 왜 이런 상황극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괴롭혀….”

    “뭐 하는 거야.”

    임석영이 한 걸음 다가오고, 그런 임석영의 뒤로 아이가 지나가고, 나는 후다닥 달렸다. 길이 하나로 나 있는 바람에 멈출 수가 없었다. 뒤에 그 아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야, 홍차!”

    뒤에서 임석영이 쩌렁쩌렁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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