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41화 (41/70)
  • 제41화

    임석영의 품에서 벗어나 일어나 앉았다. 얼굴을 문질러 닦고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리하다가 열려 있는 서랍을 발견하고는 티 나지 않게 팔을 뻗어 서랍을 닫았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있던 임석영이 몸을 일으키더니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임석영은 무릎을 꿇고 앉으니 모양새가 묘하게 이상하다.

    누리야, 너 돈 좀 있냐…. 내가 보증을 잘 못 섰는데…. 이상한 상상이 들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말없이 서로 보기만 했다.

    “음….”

    목을 울리던 임석영이 눈썹을 문지른다. 살짝 기운 고개에 턱 선이 도드라졌다. 아직도 뺨이 불그스름한 게, 술기운이 도는 모양이다.

    달싹이는 입술을 가만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보였는데, 결국 아무런 말도 뱉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임석영의 입술을 보다가, 시선을 올려 낮은 곳을 바라보는 임석영의 눈을 보았다.

    정적 속에서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너는 대체 내 어디가 좋은 걸까. 왜 내가 좋은 걸까.

    “석영아.”

    눈썹을 문지르던 손가락 사이로 내게 올라오는 임석영의 눈동자가 보인다.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까?”

    아파트 단지 내에서 임석영과 우리 집 앞을 계속 오갔다.

    걸음이 임석영 집 앞에 다다르면, 임석영이 야, 너를 어떻게 혼자 보내냐, 하면서 다시 우리 집 앞까지 걸었고, 야, 그런데 내가 바래다준다고 했잖아, 하면서 다시 돌아갔다. 누가 보면 바보들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목적 없는 걸음이었다.

    야,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어? 하며 임석영과 함께 우리 집으로 향했다.

    나란히 걷다가 몇 번 어깨가 붙으며 팔이 스쳤다. 어쩌다 보니 우리 둘 다 반팔이었다. 맨살에 맨살이 닿는 느낌이 이상했다. 바람 때문인지도 모른다.

    낮엔 그렇게 덥더니, 어느새 더운 열기가 죽은 듯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불어오는 바람에 임석영과 나의 머리칼이 이따금씩 나부낀다.

    나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를 좋아했다. 무더운 기운이 사라지며 선선해지는 게 좋았다. 지금 불어오는 바람이 그와 비슷했다.

    기분이 좋아 고개를 들자 머리칼 사이로 바람이 스미는 임석영이 보였다. 머리칼이 이마 위에서 가볍게 나부꼈다. 흐트러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에 묘하게 시선을 뺏겼다. 임석영의 말간 얼굴에서 초여름 냄새가 난다.

    눈길을 느꼈는지 정면을 보고 걷던 임석영이 고개를 돌려 내려다본다. 탁, 큼지막한 손이 이마 위에 가볍게 앉았다. 임석영의 온기가 반듯한 이마로 옮겨 온다.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게, 기분이 이상하다.

    물끄러미 얼굴을 내려다보던 임석영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나랑 사귀자.”

    눈이 동그래졌다. 젖혔던 고개를 내리자 이마 위에 얹어져 있던 임석영의 손이 자연스레 이마를 쓸고 올라와 머리 위에 놓였다. 머리칼 사이를 헤집는 그의 손가락이 머리를 단단히 잡고 누르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사랑이 뭔지 몰라도 우선 만나봐야 돼. 나를.”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박거리자 걸음을 멈춘 임석영이 마주 보고 서서 반듯한 이마를 매만졌다. 내 얼굴이 퍽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는지 임석영이 초조한 얼굴을 하고 나를 본다. 괜히 마음이 흔들렸다.

    홍차연 대역이 끝나기 전까지 누군가를 사귈 일은 절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임석영이 답지 않게 떨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기만 하다. 네가 나 때문에 이런 낯을 하고 있다는 게.

    “누리야.”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도.

    “그래.”

    좋다는 답이 튀어 나간다. 자신감 없이 낮게 꺼지던 임석영의 낯에 순간 놀란 기색이 스친다. 동그래진 눈이 이내 살짝 접히며 웃는다. 입술을 꾹 말아 물었지만 호선을 그리는 게 보였다.

    “대신 나 이거 끝나면. 홍차연 대역 끝나서 학교도 그만 나가게 되면, 그때.”

    “알았어.”

    임석영이 웃으니 나도 웃음이 났다. 입술을 꾹 문 채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외줄을 타던 긴장감이 지나가자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는데 머리 위에서 헤헤, 하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숙인 채 픽, 웃음을 터트렸다.

    못 먹어도 고! 정적 속에서 왜 할머니의 음성이 들리는지 모를 일이다.

    *

    배달을 하고 돌아가는 길, 신호가 바뀌었다. 정지선에 맞추어 멈춰 섰다. 비가 오려는지 날이 흐렸다. 돌아가면 우비를 꺼내 놔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늘을 보다가 시선을 내린 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봤다.

    “김찬영?”

    길 한쪽에 오토바이 한 대가 멈춰 서 있고, 그 앞에 김찬영이 서 있었는데 특유의 무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오토바이에 올라타 앉아 있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 보였다. 친구인가. 눈을 못 떼고 둘의 모습을 보는데 언제 신호가 바뀌었는지 뒤에서 빵, 하고 경적을 울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다. 신호등을 밝히는 초록색이 보였다. 멈춰 있던 바퀴를 돌리며 정지선을 넘었다. 지나쳐 가다가 흘긋 뒤를 돌아봤다. 그냥 헬멧을 쓰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궁금했다.

    그런데 순간이었다. 남자가 김찬영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냈다. 어, 세상에. 속도를 올리다가 늦추고 바로 옆 차선으로 빠졌다. 길가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저 새끼 뭐지? 차마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오지랖인 줄 알면서도 오토바이에서 엉덩이를 떼고 내려왔다. 헬멧 바이저를 올리고 다가가는데 남자가 답답한 듯 헬멧을 벗었다. 멈칫 걸음이 섰다.

    “새끼야, 5만 원 필요하다고 했잖아. 아 시발, 진짜.”

    강은호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인상을 썼다.

    강은호의 손에 쥐어진 만 원짜리 지폐가 보였다. 몇 장 들고 있는 것 같았는데, 보아하니 김찬영에게 5만 원을 삥 뜯으려고 했는데 그보다 적은 액수를 건네받은 모양이었다.

    남의 돈 뜯어 가는 주제에 사람을 막 때리고. 강은호 저 새끼는 진짜 전생에 뭐였을까. 약탈을 일삼는 새끼가 확실한 것 같은데.

    탁, 소리가 나게 손을 올려 바이저를 내렸다. 얼굴 앞으로 가림막 하나가 내려오자 표정이 비장하게 변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가로수 아래 버려져 있는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었다. 흡사 학주가 들고 다니는 사랑의 매 느낌이 났다.

    성큼성큼 다가갔다. 학생, 왜 삥을 뜯나! 그렇게 말하면 어른인 줄 알고 가지 않을까, 하며 걸어가는데 바닥에 침을 뱉은 강은호가 헬멧을 썼다. 그러더니 휑하고 가버렸다.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접근한 나를, 혼자 남은 김찬영이 말없이 돌아봤다.

    “…….”

    다른 행성에 깃발을 꽂으러 가는 우주인의 모습이 이랬을까. 왠지 모르게 몸이 무게를 잃고 떠오르는 느낌이 들고, 김찬영이 헬멧을 투시하듯 나를 응시했다.

    나뭇가지를 검처럼 든 채 걸음을 돌렸다.

    “홍차연?”

    어, 어쩌지. 못 들은 척 직진할까, 고민하는데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김찬영이 다가와 앞을 가리고 섰다. 바이저 내리면 아무도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김찬영이 단번에 알아본 걸 보면 전력질주로 달려가면서 봐도 나인 모양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바이저를 올렸다.

    “어, 안녕.”

    나뭇가지를 한 손에 든 채 어색하게 인사하자 김찬영이 별로 놀랍지도 않은 듯 표정 없이 나를 본다.

    “어? 너 여기.”

    김찬영의 뺨을 가리켰다. 툭 불거진 광대에 작은 생채기가 보였다. 김찬영이 고개를 비스듬히 내리며 얼굴을 가린다. 순간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직감적으로 강은호가 한 짓이라는 걸 알았다. 눈치껏 뒷말을 삼켰다. 저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헬멧은 뭐야? 너 오토바이 타?”

    “아, 나, 그게….”

    뒤돌아 길가에 서 있는 중국집 오토바이를 가리켰다.

    “알바 해.”

    김찬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철가방에 써져 있는 상호를 봤다. 그러다 아는 곳인 듯 놀란 얼굴을 했다.

    “너 저기서 일해?”

    “응.”

    “누나 집 냉장고에 저기 스티커 모은 것만 50개가 넘던데.”

    그러고 보니 임석영이 김찬영 누나에게 과외를 받는다고 했다. 저번에 배달을 갔던 그 집이 김찬영 누나의 집인 모양이다.

    “대단하시다.”

    무미건조하게 튀어나간 목소리에 김찬영이 말없이 나를 봤다. 나 방금 너무 기계적으로 답했나.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몸을 틀어 오토바이를 가리켰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김찬영이 눈을 깜박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인데 말이 없기에 걸음을 돌렸다.

    “저기….”

    그와 동시에 김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돌아보자 김찬영이 또 말이 없다. 망설이는 모습이 뭔가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눈을 크게 떴다. 무엇이든 이야기해 보라는 듯.

    “나 카드랑 현금이 다 없어서 그러는데….”

    “응.”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크게 뜬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생각지도 못한 요구에 조금 당황했다. 김찬영이 민망한 듯 입술을 말아 물었다 뗀다.

    “차비가 없어서….”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까 강은호가 김찬영의 주머니를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탈탈 털어 갔나 보다.

    “응. 빌려줄 수 있어.”

    “고마워. 학교에서 꼭 줄게.”

    김찬영의 손바닥이 마주 보고 선 우리 둘 사이로 올라왔다. 손금이 쭉쭉 그어진 김찬영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런데 지금은 돈이 없어.”

    김찬영이 말없이 나를 본다. 빌려준다더니, 그러면서 고맙다는 인사도 받아먹은 주제에 지금 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개소리지, 하고 묻는 듯했다.

    “아, 그게… 지갑이 가게에 있어.”

    “…….”

    김찬영의 낯빛이 어둡게 꺼진다. 인중을 긁적이다가 뒤에 서 있는 오토바이를 보았다. 의자 아래에 헬멧이 하나 더 들어 있기는 했다.

    “같이 가자. 가게에 가서 줄게.”

    “어떻게 가. 차비가 없다니까.”

    멋쩍게 서 있다가 손에 든 나뭇가지로 오토바이를 가리켰다. 김찬영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로 향하고, 설마 아니지? 하는 얼굴로 나를 본다.

    아니야. 네 생각이 맞아. 그거야.

    “내, 내 뒤에 타면 되지.”

    가렵지도 않은데 괜히 민망해져 턱을 긁었다.

    “…….”

    빠라바라바라밤, 하는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 한 대가 도로를 쌩하고 가로지르며 지나갔다. 아득하게 멀어진 소리가 김찬영과 내 주위를 맴돌고, 어색해진 공기에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어, 얼른 가자.”

    성큼성큼 걸어 오토바이를 세워둔 곳으로 갔다. 의자를 열어 안에 있는 헬멧을 꺼냈다.

    김찬영은 낯을 가렸다. 나를 보는 표정이 매번 단조로워서 가끔은 쟤가 나를 싫어하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몇 마디 주고받지도 않는데 매번 같이 밥을 먹고 하교하는 게 조금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런 김찬영이 과연 내 뒤에 순순히 탈까, 생각하며 뒤를 돌았다.

    바로 뒤에 선 김찬영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시선이 헬멧으로 향한 걸 보니 순순히 탈 모양이었다.

    “여기.”

    김찬영에게 헬멧을 건넸다. 착실히 헬멧을 쓴 녀석이 오토바이를 쭉 훑는다.

    “어떻게 타?”

    “내 뒤에 앉아.”

    오토바이에 올라타 엉덩이를 살짝 앞으로 빼 공간을 만들었다. 다리를 몇 번 올렸다가 내린 김찬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체 어떻게 타? 하고 한 번 더 물었다.

    어떻게 타긴 뭘 어떻게 타. 그냥 다리 올리고 타면 되는 거지.

    처음엔 친절하게 그냥 타, 다리 올리고 타, 하던 말이 점점 거칠게 나갔다. 다리 올리고 뒤에 타는 게 대체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자꾸 실패하는지.

    “야, 그냥 타라고. 너 자전거 안 타봤어?”

    “타봤어. 아니, 그런데 이건 자리가 좀 좁은데.”

    김찬영이 내 엉덩이 뒤로 난 틈을 눈짓했다. 너를 뒤에 태움으로써 가슴 쫄려야 하는 건 나인데, 왜 네가 망설이는지 모를 일이네.

    “너 집에 가기 싫지?”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하자 김찬영이 아니, 하고 말하며 다시 다리를 올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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