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40화 (40/70)
  • 제40화

    임석영이 문을 닫고 들어간 집 안에서 몇 번의 크고 작은 비명이 들렸다. 임석영 쟤 괜찮은 건가, 점점 걱정이 되었다. 임석영도 걱정되었지만, 이따금씩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집의 상태도 걱정이 됐다.

    얼마 있다가 현관문이 열렸다. 고개를 빼꼼 내민 임석영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박멸.” 하고.

    집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야심차게 샀던 유통기한 임박 상품, 오렌지 주스를 개봉했다. 임박이지 아직 그 기한에 도달한 건 아니었다.

    머그컵 가득 따른 주스를 임석영에게 건넸다. 시원하게 마시라고 얼음도 두 개나 넣었는데 어째 만족하는 얼굴이 아니다. 임석영이 눈을 올려 나를 보았다.

    “물 주면 안 돼?”

    “…….”

    네. 석영 님 뜻이 그러시다면야.

    걸음을 돌려 다시 부엌으로 갔다. 오렌지 주스는 내가 마시면 된다. 냉수 한 잔을 따라 임석영에게 건넸다.

    벌레를 잡느라 고군분투를 한 탓인지, 술기운이 올라온 탓인지 임석영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었다. 냉수 한 잔을 깨끗하게 비운 임석영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불안한 시선으로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박멸했다지만 어디에선가 또 벌레가 날아올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 공포를 읽었는지 임석영이 피식 웃으며 내 뺨을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없어.”

    느슨하게 몸을 풀고 앉은 탓에 임석영의 얼굴이 나보다 더 낮은 곳에 있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왠지 낯설다. 항상 내가 올려다보고 임석영은 나를 내려다봤는데.

    물끄러미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정적이 내려앉은 공기가 묘하게 어색하고 긴장이 된다. 목이 바짝 타는 느낌에 마른 입술을 핥았다. 내 눈을 바라보던 임석영의 눈이 입술로 내려온 것을 보았다.

    덜컥, 갑자기 가슴이 내려앉는다.

    “김누리.”

    입술에 머물러 있던 임석영의 눈동자가 스르륵 뺨을 쓸며 내 눈으로 올라왔다.

    “너는 나를 보면 아무렇지도 않아?”

    임석영의 느린 음성이 낮고 부드럽게 울렸다. 바닥을 짚고 있던 손가락에 임석영의 손가락이 부딪치듯 닿았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내 가운뎃손가락의 손톱을 가볍게 누른다. 손가락 하나에 손가락 하나가 닿았을 뿐인데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는 것만 같다.

    임석영의 말을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새벽 특유의 고요한 바다 같은 느낌이었다. 무심한 낯으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 두 눈이 무언가에 거세게 흔들리는 듯 보였다.

    “조그마한 떨림도 없어?”

    “…….”

    툭, 집게손가락의 손톱 위로 임석영의 손가락이 하나 더 올라온다. 갑자기 숨이 막혔다.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온몸을 울리는 듯했다. 발끝에 힘이 들어가며, 고조된 긴장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차올랐다.

    무심한 듯 차분한 임석영의 눈을 보다가 급하게 바닥에서 일어났다. 잔을 들고 부엌으로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싱크대 앞에 서서 한 모금도 안 마신 오렌지 주스를 털어 넣듯 입 안으로 모조리 부었다.

    손에 쥔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다가 임석영의 손가락이 닿았던 손을 보았다. 가시가 박힌 것처럼 찌릿했다. 고요했던 바다에 바람이 휘몰아치는 느낌이었다. 맹렬한 기세로 물결이 너울거리는 바다. 그 바다가 내 안에서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임석영의 말을 끝으로 정적이 흐르는 것 같았지만, 그 고요가 무서운 기세로 공기를 흔들었다. 마음이 이상했다. 술을 마신 임석영이, 조금 위험하게 느껴졌다.

    컵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있던 임석영이 어느 사이에 TV 장식장 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의 손이 TV 장식장 서랍으로 향한다.

    남의 집을 잘도 뒤지네, 생각하는 순간 남윤수의 말보로 라이트가 생각났다.

    미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건 분명 내가 아닌 남윤수의 것이지만, 들켜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모든 게 어쩌다가, 어쩌다 보니, 실수로 그렇게 된 것이었는데 뭔가 복잡한 오해로 번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집으로 가져온 것도, 돌려주지도 버리지도 않은 채 서랍에 넣어둔 것도, 그냥 다 이상하잖아. 전리품처럼.

    임석영의 손을 따라 서랍이 열린다. 잽싸게 그의 몸을 밀어냈다. 반쯤 열린 서랍을 두고 임석영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뭔가가 부딪치며 텅, 하는 소리를 냈다.

    “…….”

    눈을 동그랗게 뜬 임석영의 얼굴이 내 아래에 있다. 어, 하는 소리와 함께 묘한 기류가 흘렀다. 임석영이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 나를 보았다. 동그란 눈이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당황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두 손으로 임석영의 어깨를 누른 채 내 아래에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심장이 빨리 뛰어서 그런지 호흡이 가빠졌다.

    “…아, 아니, 나, 남의 서랍을, 막 그렇게.”

    열면 안 되지, 라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왜 이렇게 숨이 차는지 모를 일이다.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거리던 임석영의 얼굴이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는다. 고부라지듯 휜 허리를 펴서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는데 임석영이 손을 올려 등을 감았다. 그러곤 제게서 멀리 떨어질 수 없게 힘을 주어 당겼다. 살짝 폈던 허리가 다시금 굽었다. 몸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고 해 팔에 힘을 주고 버텼다.

    이젠 내 두 눈이 방금 전의 임석영처럼 동그래졌다. 갑자기 등을 감싸니 놀라서이기도 했고,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너는 내가 만만한 거지? 아무리 나한테 마음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래?”

    입을 꾹 다물었다. 딸꾹질이 넘어올 것만 같다.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지금 심장이 세 번은 터졌어.”

    “…….”

    “돌겠다, 진짜.”

    “…아, 미, 미안.”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려고 하자 임석영이 등을 더 가까이 당긴다. 잔뜩 긴장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임석영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없다.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어?”

    임석영의 손이 등을 더 낮은 곳으로 누른다. 몸이 더 가깝게 밀착되었다. 알 수 없는 열감에 몸이 달아올랐다. 아랫배가 꼬이는 듯했다. 온몸이 가늘게 솟는 느낌이다.

    “이렇게 몸이 가까이 붙어도, 하나도 안 떨린다고? 진짜로?”

    “수, 술 냄새 나거든, 너.”

    고개를 뒤로 빼고 일어나려는데 휙 몸이 뒤집혔다. 등이 바닥에 붙었다. 내 아래에 있던 임석영이 위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순식간이었다.

    “나한테는 지금 네 냄새밖에 안 나.”

    감정이 요동쳤다. 나를 내려다보는 임석영의 눈이 열기로 가득 찼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내 안에서 흔들리던 물결이 임석영의 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결이 크게 일렁인다. 높은 파도가 밀려오고, 이내 부서진다. 그 부서지는 파도 속에서 무언가가 몸을 숨기지 못하고 밖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나는 지각한다. 무언가를 인식하게 된다.

    나는, 그러니까, 너를.

    임석영의 검은 눈동자가 어쩐지 처연하게 젖는다. 술기운에 어른어른해진 탓인가. 낮게 꺼진 임석영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누리야, 내가 싫으면 나한테 희망을 주지 마.”

    두 손을 주먹 쥐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정적이 위태롭게 외줄을 탔다. 언제 찢어질지 모르는 모양새로, 임석영과 나 사이를 배회했다.

    마른침이 넘어간다. 정신을 차린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갑자기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꾹 물었다.

    최근 마음이 무겁고 우울한 탓에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여기서 터지려는 것 같다. 죄책감, 부담감, 적나라한 현실과 잘못된 선택이 불러온 결과 같은 생각들에 발목이 잡혀 힘든 나날이었다.

    임석영의 옷자락을 그러잡았다. 울음이 몰려와서 뭐라도 쥐어 잡고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뭐야. 울어?”

    안에서 부푸는 울음에 얼굴이 일그러지기라도 했는지 임석영이 묻는다.

    “희망은, 네가, 네가 주잖아….”

    손에 쥔 임석영의 옷자락을 그대로 올려 눈가를 덮었다. 으흐엉, 하고 울음이 터졌다. 대체 왜 서러운 마음이 드는 건지 나도 알 수가 없다.

    임석영이 싫은 게 아니라 좋아하는데도 마음껏 표현할 수 없는 내 처지가 괴로웠던 거다. 모든 게 내 선택이 불러온 참담한 결과 같아서 수긍하다가도 용납이 되지 않고, 이 학교에 들어온 이후의 모든 시간이 후회로 물들어갔다. 나름 즐겁고 행복했던 그 순간들이.

    온전히 사랑할 수 없고 온전히 표현할 수 없으며 그 모든 것들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없다는 게 못내 서러웠다. 나는 어쩔 수가 없게도 홍차연이었고, 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남의 이름을 달고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점. 그러나 임석영에게는 내가 홍차연이 아니라 김누리인 점. 그 간극에서 오는 붕괴.

    벌써 열여덟 살이나 먹은 줄 알았는데 고작 열여덟 살이었다. 이 모든 게 버겁고 힘들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으나,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 혼자 앓는 날들이었는데, 돌아보면 늘 곁에 임석영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반복되다 보면 분명 임석영은 내가 싫어질 것이고, 결국 멀어지겠지. 그렇게 되면 빈자리를 채우는 건 오롯이 나의 외로움일 것이다. 희망이 꺾여 나가고, 행복이 부스러지는 마음.

    “아니, 지금 울고 싶은 사람은 난데. 왜 네가 울어?”

    “네가, 자꾸. 으엉.”

    “웃기는 콩알이네.”

    임석영의 손이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고 지나간다. 얼굴을 묻은 옷자락에서 비누 향이 짙게 맡아졌다. 어쩌면 자꾸 내게로 불어오는 너의 향기가 좋았던 게 아니라, 네가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

    “코는 풀면 안 된다. 먹어도 안 돼.”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들린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에 옷자락에서 눈을 못 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제 옷이 젖어 가는데도 임석영은 말이 없었다. 묵묵히 나를 기다려주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임석영의 낮은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아… 파, 팔 아파….”

    흘긋, 옷자락을 내리고 눈을 돌렸다. 두 팔로 바닥을 짚은 임석영의 얼굴이 조금 힘겨워 보였다.

    “다리도 저려. 감각이 없어.”

    임석영이 신음했다.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내가 그치기를 묵묵히 기다려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내가 봤을 땐, 충분히 울었어. 그만 울어.”

    꽤 힘겨운지 임석영의 미간이 좁아진다. 바닥에 누운 채 발을 올려 임석영의 종아리를 툭 건드렸다. 임석영이 얼굴을 찌푸리며 아악,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하지 마라.”

    임석영이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봤다. 괜한 오기가 일었다. 툭, 임석영의 종아리를 한 번 더 건드렸다. 괴로운지 임석영이 눈을 질끈 감는다.

    “하지… 하지 마. 가만 안 둔다. 장난 아니고, 진짜, 진짜 아프거든?”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임석영의 얼굴을 보다가 툭, 종아리를 건들자 임석영이 아오! 하며 무너져 내렸다.

    두 팔이 그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면서 중심이 아래로 쏠렸다. 임석영의 몸이 내 몸을 누르자 내 입에서도 비명이 터졌다. 컥, 하고 숨이 막혔다.

    “아악! 숨 막혀.”

    위에서 내 몸을 누르는 임석영의 무게가 엄청났다. 얼굴을 찌푸리고 몸을 꿈틀거리자 임석영이 흘러내리듯 옆으로 몸을 돌려 내려갔다.

    “아… 진짜, 다리, 다리 저리다고. 이 고통을, 네가 아냐고.”

    임석영이 두 팔로 내 머리를 꽉 안고서 힘겨운 음성을 뱉었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시야가 깜깜하다. 이거 좀 놔줄래, 하며 몸을 슬쩍 뒤로 비틀자 임석영이 힘주어 나를 안는다.

    “기다려.”

    “…뭐라고?”

    “다리 저려서 못 움직이니까.”

    이거, 진짜, 명령조가 입에 붙었다니까.

    눈물이 마른 눈가가 건조하게 당겼다. 뻑뻑해진 눈을 느리게 움직였다. 얼굴을 묻은 임석영의 가슴이 넓다.

    임석영의 다리가 멀쩡해지길 기다리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임석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누리야.”

    “어?”

    “왜 울었어?”

    “…어, 그건, 그냥….”

    “그냥 눈물이 났어?”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가 앞뒤로 움직이며 이마가 임석영의 가슴에 콩콩 닿는다.

    “그냥 내가 좋다는 거네.”

    좋다는 말은 안 했는데. 뾰로통한 얼굴로 눈을 올리자 임석영이 머리를 느슨하게 풀며 나와 눈을 맞췄다. 가만히 내 얼굴을 살피더니 일순 무표정해진다.

    “표정 뭐냐.”

    “뭐가.”

    “아니라고? 이렇게 울어놓고 아니라고?”

    “…….”

    “희망으으은, 뉘이가아, 쥬자나하아아, 하고 울었으면서.”

    “…하지 마.”

    “네가아, 자뀨우.”

    이상한 목소리로 내 울음을 따라 하는 임석영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렸다.

    “하지 말라고.”

    “넵.”

    얄밉게 입을 놀리던 임석영이 입을 쏙 다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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