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39화 (39/70)
  • 제39화

    임석영의 손에 의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을 때, 얼굴로 간지럽게 무언가가 닿았다. 얇고 가는 게 임석영의 머리카락인 것 같았다. 순간 비누 향이 확 끼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가슴이 잘잘하게 뛰었다. 묘한 상상이 머리를 스친 탓일까. 입술이 바짝 마르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간 손을 치우지 않고 있던 임석영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눈가를 쓸고 내려온 손이 한쪽 뺨에 닿았다. 손으로 눈을 누르고 있던 탓에 시야가 흐렸다. 눈을 깜박거리며 선명해지길 기다렸다. 끔벅끔벅, 감았다 뜬 눈에 임석영이 보인다.

    턱을 괸 채 고요한 시선을 보낸다. 말없이 내려 보다가, 느지막이 입술을 연다.

    “흥.”

    “흥?”

    “흥!”

    “흐으응??”

    갑자기 무슨 흥? 토라진 듯 눈을 가늘게 뜨는 모습에 입이 벌어졌다. 어이가 없다.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상체를 숙이고 있던 임석영이 몸을 뒤로 젖히며 멀어졌다.

    “뭔 갑자기 흥? 흥부와 놀부냐?”

    내 말에 임석영의 얼굴이 굳는다.

    “너 지금 설마 그게 웃기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

    “아닐 거야. 아니어야 되는데.”

    내 말을 재미없다고 딱 자른 임석영이 의자에서 일어나 보건실의 커튼을 살짝 걷었다. 틈이 벌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햇빛이 기다란 선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작은 틈새로 들어온 햇빛이 선을 이루고, 그 선을 경계로 임석영과 내가 마주 보고 섰다. 나는 햇빛이 들지 않는 그늘에, 임석영은 햇빛이 드는 창가 앞에.

    햇빛 안에서 먼지가 부유했다. 그 너머에 선 임석영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교복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압박 붕대 때문에 갈비뼈 언저리가 뻐근했다.

    샤워기를 고정하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았다. 머리를 때리며 아래로 쏟아진 물이 온몸을 적신다. 삽시간에 증기가 화장실 안을 가득 채우고 거울이 뿌옇게 됐다. 거품을 내서 몸을 박박 닦고 양치를 했다. 칫솔이 어금니를 쓸고 나오고, 멍하니 뿌연 거울을 보며 임석영을 생각했다.

    “지금의 너는 내 마음을 못 받아준다며. 지금이 아닌 다른 날에는 뭐가 조금 달라지냐고.”

    임석영이 했던 말이 자꾸 아른거렸다. 지금이 아닌 다른 날, 그 말이 마음속 어딘가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꾸 생각이 날 수 있나.

    칫솔질을 하며 홍차연 대역이 끝난 이후의 날을 상상해봤다. 도무지 감이 안 잡혀 고개를 작게 젓고 거품을 뱉었다. 입을 헹구고 고개를 들자 뿌연 거울로 희미하게 내 모습이 비쳤다.

    손바닥으로 거울을 닦는 대신 검지를 올렸다. 선을 그으며 글자를 적었다.

    임석영.

    거울에 임석영의 이름이 남았다. 이름을 따라 지워진 증기에 불완전한 내가 반사됐다. 물방울이 맺힌 쇄골과 턱이 보인다. 완전하지 않은 모습이 꼭 내 마음 같다.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불투명한 마음. 무엇이 나를 이렇게 흐리게 만들었을까.

    얼마간 그 이름을 멍하니 보다가 속옷과 옷을 꿰어 입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 꽉 막혀 있던 증기가 쏟아져 나가고 바깥 공기가 밀려들었다.

    허리를 숙인 채 짧은 머리칼을 마구 헝클며 남은 물기를 털어내는데 살며시 뜬 눈으로 무언가 보였다. 검고, 동그란, 무언가가 긴 더듬이를 가지고 있는데. 어, 시발, 저게 뭐야, 하는 순간 움직였다.

    “엄마!”

    세상에 있지도 않은 엄마를 연신 외치며 뛰었다. 손에 든 수건을 냅다 던지고 화장지를 손에 돌돌 말았다. 그 모습이 꼭 전에 임석영이 손에 감았던 붕대와 비슷했다.

    움직이던 바퀴벌레가 부엌 근처에서 멈췄다.

    “제발 움직이지 마… 제발….”

    조심스레 다가가 상체를 뒤로 젖히고 팔을 길게 뻗었다.

    나는, 나는 너를 한 번에, 한 번에 잡아 죽일 것이다.

    조심조심 다가가는데 그 검은 것이 움직였다. 심지어 날았다. 미친, 세상아.

    “으으어어어!”

    손에 감은 화장지를 던지다시피 버리고 핸드폰을 챙겨 집을 뛰쳐나갔다. 그러곤 울상이 되어 현관문을 보았다.

    어쩌자고 나왔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내가 먹고 자는 집인데 꼭 남의 집을 몰래 염탐하는 느낌이었다.

    똑똑, 실례합니다. 좋은 말씀 전하려고 왔습니다. 물 한 잔만 마실 수 있을까요?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리는데 이젠 벽을 기어가고 있는 검은 형체가 보인다.

    “…미쳤다.”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았다. 철컥, 하며 현관문이 닫혔다.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었다.

    “…어떡하지.”

    말리지 않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어떻게 아파트에 바퀴벌레가 있을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생각하며 계단에 앉아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벌레였다. 귀신 따위는 믿지 않았다. 무서운 영화도 곧잘 봤고 어깨를 움찔 떨며 놀라기는 해도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많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버스 카드를 찍었는데 잔액이 부족합니다, 하고 말하는 단말기의 음성이 귀신보다 열 배는 더 무서웠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계단에 대체 얼마나 앉아 있던 건지, 밤 10시가 넘었다.

    “아, 나 진짜 어떻게 하냐고.”

    망연자실이란 게 이런 걸까. 우울한 심정으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길게 뱉은 숨이 오므려 붙인 허벅지로 닿았다. 센서 등이 꺼진 어둠 속에서 가장 가까이 사는 사람 한 명이 생각났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게 무슨 민폐야. 벌레 잡아달라고 부르는 건 민폐다, 민폐야, 생각하다가 핸드폰 버튼을 눌러 시간을 봤다. 그사이에 10분이 지났다.

    잘근잘근 입술을 물어뜯다가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석영…]

    대화창을 나가지 않은 채 1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보낸 지 1분도 되지 않아 임석영이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내 마음 안 받아주는 김누리 아니야?]

    답장이 오자마자 임석영에게 연락한 걸 후회했다. 입을 꾹 다문 채 숨을 뱉었다. 마음 같아서는 장난하느냐고 따지고 싶은데 지금 집에도 못 들어가고 아쉬운 사람은 나다.

    [뭐 하고 있어?]

    [나 아빠랑 이야기하는 중인데 너무너무 재미가 없다]

    집에 벌레가 있어서 못 들어가는 와중에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별 이야기도 아닌데 거실 소파나 부엌 식탁 앞에 앉아 부친과 재미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임석영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핸드폰이 진동하며 임석영의 말풍선이 떠올랐다.

    [너는 뭐 해?]

    나는 지금 불 꺼진 계단에 앉아서 집에 있는 벌레가 스스로 소멸하기를 기다리고 있어.

    [나… 집에 못 들어가고 있는데…]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없고 무슨 벌레가 있어… 너 벌레 잘 잡니…?]

    내가 보낸 메시지 옆에 붙어 있던 1이 곧바로 사라졌다. 읽었을 텐데 답장이 안 왔다. 임석영도 벌레를 무서워하나. 답장 안 하다가 내일 야, 미안하다, 아빠랑 이야기하다가 답장을 못 했다, 하려나.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파닥파닥 날지만 않으면 어떻게 책이라도 던져 잡아 보겠는데, 검고 동그란 게 더듬이 달고 비행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못 먹어도 고, 할머니의 좌우명이 왜 지금 떠오르는지. 못 잡아도 고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야. 못 잡으면 안 돼. 무조건 잡아야 돼.

    어흑, 소리를 내며 계단에서 일어났다. 몸을 움직이자 센서 등에 불이 들어왔다. 마음을 다잡고 집으로 진입하려는데 핸드폰이 진동한다.

    [1588-1119]

    숫자 여덟 개였다. 누가 봐도 고객센터 번호인데, 다른 사람한테 보낼 걸 잘못 보낸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인터넷에 번호를 검색해봤다. 세스코가 떴다.

    “…이 새끼 진짜.”

    장난해? 라고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는데 임석영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임석영 세스코 출동]

    계단을 밟고 내려가다가 멈칫했다. 임석영이 오는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뱉었다. 이상하게 안정이 됐다. 엉덩이를 뗀 계단에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임석영을 태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20분쯤 흘렀을까, 띵, 하고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양옆으로 밀려나며 열리고 엘리베이터 내부의 빛이 어둠을 몰아내며 쏟아졌다. 빛과 함께 임석영이 등장했다.

    꽤나 비장한 얼굴로 양손에 뭔가를 바리바리 챙겨 든 모습이었는데 그것이 무언가 하고 보니 바퀴벌레 퇴치를 위한 것들이었다. 뿌리는 약, 바르는 약, 붙이는 약, 벌레 퇴치 문구가 붙은 건 모조리 쓸어 온 모양이다.

    계단에 앉아 있는 나를 본 임석영이 툭 웃음을 터트린다.

    “김누리 집 뺏겼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일어났다.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내게 넘긴 임석영이 무기를 고르는 사람처럼 신중하게 퇴치 약을 살폈다. 그러더니 결심한 듯 스프레이를 든다.

    가까이 붙어 선 임석영에게서 낯선 냄새가 났다. 고개를 올리고 까치발을 들어 킁킁거렸다.

    “야, 너 술 마셨어?”

    “어? 냄새나?”

    “응.”

    “아빠가 줬어.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라면서.”

    장난스럽게 얼굴을 들이민 임석영이 입으로 바람을 불었다. 술 냄새가 코를 찌른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얼굴을 찌푸리자 임석영이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다.

    “너희 집 쳐들어온 새끼랑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나오기 전에 한 잔 더 마셨는데.”

    임석영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취했나 봐.”

    이제 보니 뺨도 불그스름했다. 눈동자도 조금 흐릿하고, 눈을 감았다 뜨는 모양새도 조금 굼떴다. 이래가지고 대체 벌레를 어떻게 잡는다는 건지 걱정되는 것도 잠시, 임석영이 내 머리통에 코를 박았다. 두 손에 임석영이 사 들고 온 것들을 들고 있어 그의 몸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었다.

    “야, 너, 너 뭐 해?”

    임석영의 너른 가슴이 얼굴을 가렸다. 눈을 올려도 그의 얼굴이 안 보여 바쁘게 눈을 깜박거렸다. 갑자기 머리통에 얼굴을 박은 임석영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내가 까치발을 들고 임석영의 냄새를 맡고자 킁킁거렸던 것처럼 임석영이 내 머리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포도 냄새 나.”

    “…샤워해서 그래. 바디 워시가….”

    바디 워시가 포도 향이야, 라고 하려는데 임석영이 뒷말을 채 간다.

    “나 포도 좋아하는데.”

    아니, 그런데, 바디 워시가 포도 향이라고. 샴푸는 포도 향이 아닌데, 왜 머리에 얼굴을 박고 냄새를 맡는지 모를 일이다.

    몸을 틀어 물러나려고 하자 임석영이 갑자기 입을 벌려 머리를 가볍게 물었다. 악! 하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갔다. 상체를 뒤로 빼고 그의 얼굴을 노려봤다.

    “야! 머리를 왜 물어?”

    “짜증 나.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해.”

    어이가 없다. 포도 좋아하는 거 지금 네가 말해서 알았는데. 내가 언제 골라 했다고.

    심지어 이 바디 워시는 내가 고른 것도 아니었다. 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사장님이 미쳤어요, 하는 현수막과 함께 폭탄 세일을 하고 있어서 산 거였다. 고른 게 아니고, 그냥 이거 하나 있었다고.

    황당하다는 눈으로 노려보자 임석영이 흥, 하며 등을 돌렸다. 머리를 문지르고 싶은데 남아나는 손이 없어 얼굴만 찌푸렸다.

    현관문 앞에 선 임석영이 도어락을 톡톡 두드린다.

    “비밀번호 뭐야?”

    알려주기 싫은데, 남아나는 손은 없고. 잠깐 고민하다가 비밀번호를 술술 불었다. 물어봐서 알려준 건데 임석영의 얼굴이 뚱하게 굳는다.

    “바꿔. 번호.”

    띠띠띠, 번호 누르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마지막으로 별을 누르자 잠금이 풀렸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임석영이 말했다.

    “사귀지도 않는데 그렇게 알려주면 안 돼.”

    임석영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 현관문이 느리게 움직이며 닫혔다. 멍하니 현관문만 바라보고 있자 센서 등이 꺼졌다.

    어, 뭐지. 임석영의 입에서 ‘사귀다’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건 처음이었다. 그 단어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건가. 갑자기 가슴이 둥둥, 크게 뛰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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