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36화 (36/70)
  • 제 36화

    ,학교가 끝나고 후문 뒤에 있는 포장마차로 향했다. 임석영과 함께 교실을 나섰는데 복도에서 만난 남윤수, 김찬영도 걸음을 같이하게 됐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던 남윤수는 동관을 벗어나서는 노골적으로 나를 쳐다봤다.

    “왜.”

    계속 노려보다가는 눈이 가늘어지다 못해 찢어질 것 같기에 물었다. 남윤수가 가까이 붙어 섰다.

    “대체 나 몰래 너희 셋이 뭐 하고 다니는 거냐.”

    “셋?”

    의아한 얼굴로 앞을 보았다. 임석영과 김찬영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남윤수가 말한 셋이 앞에 가는 두 사람과 나인가.

    “그, 뭐냐, 나는, 그…. 다 이해하거든?”

    뭘 이해하기에 말까지 더듬니.

    “나는, 어? 다 이해한다고.”

    그러니까, 대체 뭘 이해하냐고.

    “단지 나는 그, 뭐랄까. 너무 가까운 곳에서 나도 모르게, 그런 감정이 오갔다는 게… 그냥 조금 당황스러웠을 뿐인데. 뭐, 사랑이란 게 원래 자기도 모르게 싹트는 감정 아니겠어?”

    사랑이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임석영의 고백이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난 것인가.

    “기침과 사랑은 못 숨긴다고 하잖아.”

    어디서 보고 외운 것 같은 말을 툭 뱉은 남윤수가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래서 너는 둘 중 누구야?”

    “어?”

    “아, 아직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린 건가?”

    “무슨 개소리야.”

    “뭐,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는 너를, 아니 너희를 응원한다.”

    남윤수가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하더니 휘적휘적 걸음을 빨리하며 앞서 나갔다. 뒷말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먹었다.

    뭐지, 저 거대한 벽은?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는 길에 서서 팔을 쓸었다. 뭔가 깊은 오해가 남윤수 안에서 싹튼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든다.

    후문 앞에 있는 포장마차 앞에 섰다. 전에 임석영과 담에 붙어 서서 만득이 핫도그를 사 먹었던 그 포장마차였다. 떡볶이와 순대, 핫도그와 닭꼬치, 닭강정과 피자만두를 거의 쓸어 먹었다.

    어묵을 베어 먹으며 너무 잘 먹는 남윤수와 조금 잘 먹는 김찬영을 보았다. 고개를 돌려 옆에 선 임석영을 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임석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왜? 뭐 줘?”

    “아니, 네 친구들 분식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남윤수가 떡볶이 떡 세 개를 입에 욱여넣으며 개소리! 하고 소리쳤다.

    “떡볶이 없는 세상은 생각도 하기 싫구만, 뭔 소리래.”

    “남윤수 개명하는 게 꿈인 거 모르는구나. 남떡볶으로. 그럼 사람들이 떡볶이, 하고 불러주니까.”

    김찬영이 거들었다. 개명을 꿈꿀 정도로 좋아한단 말인가. 분명 임석영이 제 친구들은 분식을 안 좋아해서 나보고 분식 메이트가 되어달라고 했었는데.

    고개를 올려다보자 임석영이 싱긋 웃는다. 그거 구라야, 하는 얼굴로.

    늘 지갑을 꽁꽁 숨기던 남윤수가 기분이다! 하며 계산을 했다. 나는 어쩐지 남윤수가 이상한 곳에서 기분을 내고 있다고 생각했고, 임석영은 네가 제일 많이 먹었는데 계산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했다. 김찬영은 잘 먹었어, 하며 입을 닦았다.

    포장마차를 기준으로 아이들과 찢어졌다. 남윤수와 김찬영이 오른쪽 길로 갔고 임석영과 내가 왼쪽 길로 갔다.

    멀어지는 와중에 남윤수가 잔돈으로 받은 지폐를 손수건처럼 흔들며 아! 나 알아버렸다! 알아버렸어! 너의 선택을! 하고 소리쳤다.

    김찬영이 남윤수를 길에 둔 채 그냥 가버렸고, 임석영은 관심 주지 말라며 나를 끌어당겼다.

    나란히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학기 초 신발도 없이 앉아 있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참 추웠는데, 어느새 날이 더워져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가까이 앉은 임석영에게서 비누 향이 난다. 교복에 밴 냄새인 건가.

    “너한테 비누 냄새 나.”

    내 말에 가방 안을 뒤적이던 임석영이 고개를 돌린다.

    “나한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집 냄새인가.”

    “집에서 비누 냄새 나는 게 어디 있냐.”

    “그럼 향수야?”

    “나 향수 안 쓰는데.”

    “그럼 섬유유연제인가. 되게 좋아.”

    가방에서 임석영이 꺼낸 건 이어폰이었다. 핸드폰에 이어폰을 연결하면서 고개를 숙이더니 작게 웃는다. 왼쪽 뺨에 보조개가 살짝 파였다.

    “그런 말 하지 마.”

    “왜?”

    “설레잖아.”

    “…….”

    괜히 했다,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을 보는데 불쑥 임석영이 이어폰을 건넨다.

    “됐어. 나도 있어.”

    주머니에서 엠피스리를 꺼냈다. 이어폰 두 쪽을 귀에 꽂자 임석영이 허, 하고 웃으며 내게 내밀었던 이어폰을 거두어 갔다. 그러더니 꺼냈던 이어폰을 가방 안에 다시 집어넣고 지퍼를 올렸다.

    왜 도로 넣지, 생각하는데 내 귀에 있는 이어폰 한쪽을 빼 제 귀에 꽂았다.

    “뭐야?”

    “같이 듣자.”

    같이 안 듣는 게 좋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임석영의 얼굴이 굳었다. 배따라기의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가 재생되고 있었다.

    “넌 요즘 노래 안 들어?”

    “응.”

    “아이돌 안 좋아해?”

    “응.”

    “이건 누군데.”

    “배따라기.”

    가만 나를 바라보던 임석영이 고개를 돌리고 정면을 보았다. 소방차 노래를 들을 걸 그랬나. 나도 고개를 돌렸다.

    해가 넘어가는 하늘이 붉게 타올랐다. 해가 넘어가는 쪽은 붉게 타고, 그 언저리는 분홍빛으로 물든 풍경, 정류장엔 둘뿐이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이 가까워지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앉아 있자 오늘 옥상에서 임석영이 내게 한 말이 생각났다.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은 적이 있긴 했지만, 사귀자는 말 없이 네가 좋아, 그런 말만 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 말 때문에 어색해진 건 아니었지만 조금 궁금해졌다.

    “야, 석영아.”

    말없이 고개를 돌린 임석영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왜 좋아?”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나를 좋아할 만한 이유가 없는 거 같아서.”

    느리게 움직이며 눈동자를 감췄다가 드러내는 눈꺼풀을 보았다.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임석영의 눈동자가 검고 깊다. 노을로 얼룩진 하늘이 그의 눈에 비친 것도 같다.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나.”

    “있지. 이유 없는 게 어디 있어.”

    “있었겠지. 처음에는. 지금은 그런 거 다 잊어버렸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임석영의 눈빛이 얼핏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빨리 뛰어. 얼마나 미친 듯이 뛰는지 넌 모를 거다.”

    임석영의 시선이 정면으로 돌아갔다. 건너편을 보는지, 하늘을 보는지 모를 그의 시선이 오랜 시간 고정됐다.

    “너도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임석영을 따라 정면을 응시하고 있을 때, 그 말소리가 넘어왔다. 해가 조금 더 낮은 곳으로 이동했는지 하늘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 너 나쁘게 생각 안 해.”

    임석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머리칼을 마구 헤집은 손이 부드럽게 내려와 이마에 잠시 머무른다.

    “친구로 좋아해 달라는 거 아닌데, 콩알아.”

    이마로 그의 체온이 옮겨 왔다. 손을 거둔 임석영이 소리 없이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가슴이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뛰었다.

    *

    집에서 나오자 밖에 서 있는 임석영이 보였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있던 임석영이 웃는 얼굴로 두 팔을 벌린다. 자동문이 열리고, 두 손으로 가방끈을 당겨 잡고서 임석영을 휑하니 지나쳤다.

    다리가 긴 임석영이 금방 따라붙었다.

    “뭐야. 왜 무시하고 지나가지?”

    “타이타닉도 아니고 팔은 왜 벌려?”

    “타이타닉이 뭔데.”

    “…….”

    임석영은 이 유명한 영화를 모르는 모양이다.

    “안기라고 벌린 건데.”

    임석영은 내게 고백을 한 이후로 막힘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처럼 거침이 없었다. 이제 남의 눈치 따위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학교 가는 길이잖아, 하고 낮게 말하며 쏘아보자 임석영이 입을 다문다.

    “손 내밀어봐.”

    “뭔데?”

    “사탕.”

    손바닥을 올렸다. 손바닥 위로 임석영의 주먹이 내려온다 싶더니 사탕을 놓고 자연스레 깍지를 낀다. 임석영과 마주 잡은 손바닥 안에서 사탕 봉지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급하게 손을 빼고 임석영의 팔을 때렸다.

    “아침부터 맞아볼래?”

    “이미 때려놓고 맞아볼래래. 가만 보면 깡패가 따로 없어.”

    임석영이 맞은 곳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오늘따라 버스에 사람이 많았다. 빈자리가 없어 서서 가는데 버스가 조금 난폭하게 굴러갔다.

    끄응! 소리를 내며 손잡이를 구명줄처럼 붙잡는데 임석영이 주위를 살피다가 내 뒤에 와 섰다. 그 이후로 서서 가는 게 한결 수월했다. 느슨하게 손잡이를 잡고 있다가 눈을 올려 뒤에 선 임석영을 보았다. 이를 악다물고 버티고 있었다.

    풉, 웃음이 터졌다.

    “와, 나 힘줄 봐.”

    임석영이 손잡이를 잡은 제 팔을 눈짓했다. 내가 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점심을 먹고 임석영과 함께 옥상으로 갔다. 책상 두 개를 붙이고 나란히 앉아 학교 전경을 내려다봤다. 매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날이 더워져서 그런지 녹는 속도가 빨랐다. 그 탓에 괜히 먹는 속도도 빨라졌다. 녹아서 흐르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임석영은 메로나를 먹었고 나는 스크류바를 먹었다. 입이 큰 건지, 뭔지 메로나가 금방 동났다.

    “야, 너 진짜 빨리 먹는다.”

    빈 막대를 입에 물고 임석영이 어깨만 으쓱인다.

    아이스크림을 베어 먹다가 빨아 먹기를 반복하는데 막대를 잡은 손가락 위로 녹은 아이스크림이 뚝 떨어졌다. 아이스크림이 떨어진 손 위로 임석영과 나의 시선이 동시에 향했다.

    “다 흘리고 먹네. 흘리고 먹어.”

    임석영이 혀를 차며 손을 잡아당겼다. 입에 아이스크림을 문 채 손을 내어줬다. 고개를 숙인 임석영이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 위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쪽, 입술로 훔쳐 닦았다.

    “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당겨 가져가자 임석영이 의아한 얼굴로 눈을 올렸다.

    “왜?”

    “야, 너, 방금, 무슨.”

    절단기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말이 토막토막 잘려 나간다.

    “닦을 게 없어서 그런 건데.”

    “아니, 그래도, 무슨, 그렇게.”

    버벅거리는 말에 임석영이 미소 짓는다.

    “왜? 좋았나 봐?”

    “아니, 아니거든! 내가, 무슨!”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버벅대는 사이 더운 열기에 녹은 아이스크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상체를 길게 빼고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욱여넣었다. 입 안으로 잔뜩 들어온 냉기에 이가 시리다.

    “흐으, 어, 어.”

    입을 다물었다가 벌리기를 반복하며 몸을 떨자 임석영이 손에 든 막대를 가져가며 피식 웃는다.

    “입 밖으로 흘리기만 해.”

    헐, 하는 소리를 뱉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입구 봉쇄 같은 느낌으로.

    이가 너무 시려 눈을 찡그렸다. 그래도 입만은 벌리지 않았다. 입술을 꼭 붙이고 으으, 으, 하고 신음하는 모습에 임석영이 숨도 안 쉬고 웃었다.

    학교가 끝났다. 임석영과 티격태격하며 교문을 나서는데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검은 세단 한 대가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차다, 생각하는데 익숙한 얼굴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검은색 슈트를 말끔하게 입은 남자. 사모님의 운전기사였다.

    걸음을 멈춘 나를 임석영이 내려다보더니 내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홍차연 집행 급행열차가 올 줄이야.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이쪽저쪽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영아, 너 먼저 가.”

    “왜? 누군데?”

    “…….”

    “저 사람 누군데.”

    말을 안 하자 임석영의 얼굴이 점점 굳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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