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35화 (35/70)

제 35화

임석영이 티가 나게 김찬영과 내 사이로 끼어들며 교환되는 시선을 막았다.

“김찬영, 옐로카드 한 장.”

그 말에 김찬영이 가볍게 웃는다.

“야, 웃지 마. 한 경기에서 옐로카드 두 장이면 퇴장이거든?”

“아, 그래?”

“응. 그래.”

김찬영과 나 사이에 낀 임석영은 계단을 오르는 순간에도 그 대열을 유지했다. 계단을 오르자 1반 교실이 나타났다. 김찬영이 제 교실을 찾아가며 목소리를 흘렸다.

“내 말 맞지?”

그 소리에 교실로 들어가려다 걸음을 멈칫했다. 임석영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교실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멀어지는 김찬영의 모습을 확인했다. 김찬영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뭐. 왜. 김찬영이 뭐라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임석영이 매우 궁금하다는 얼굴로, 조금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나를 보고 있다. 손을 올려 나를 내려다보는 임석영의 얼굴을 쭉 밀어냈다.

“오버 좀 하지 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로 가 앉았다. 임석영이 제 책상 위에 가방을 툭 던져 올리고선 내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너 나랑 한 약속 안 잊었지?”

“무슨 약속?”

“아, 그, 김찬영.”

이로써 삼각형이 얼추 완성되는 듯했다. 임석영이 생각한 삼각은 나, 김찬영, 그리고 자신이 맞는 듯하다.

그렇게 생각이 들다가도 뭔가 이상한 조합에 대체 이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졌다. 혹시 김찬영이 나를 좋아하나? 그런데 김찬영은 내가 여자인 걸 모르니까, 뭐, 그런….

거기까지 생각하고 말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

낮과 밤의 온도 차가 온탕과 냉탕 수준으로 널을 뛰었다. 낮에는 후덥지근해서 강당이 아닌 운동장에서 체육이라도 하는 날이면 겨드랑이가 통곡을 했고 해가 저물고 학교를 나설 때면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임석영과 둘이 급식을 먹는 날도 있었고 남윤수, 김찬영과 함께 급식을 먹는 날도 있었는데, 체육 대회를 기점으로 임석영은 내 주위에 김찬영이 있는 꼴을 못 봤다.

김찬영이 식판을 들고 내 옆이나 앞에라도 앉으면, 숟가락을 내려놓고 퇴식구로 가는 순간까지 김찬영의 얼굴에서 눈을 안 뗐는데 그게 꼭 감시자의 눈빛 같았다. 대체 김찬영과 나 사이에서 나를 경계하는 건지, 김찬영을 경계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야, 찬영이 얼굴에 뭐 묻었냐? 아주 몇 날 며칠 뒈지게 쳐다보네. 구멍 나겠다.”

보다 못한 남윤수가 임석영 앞으로 손을 휘휘 흔들며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이야. 나 저기 뒤에 보고 있었는데.”

임석영이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기며 급식실 출구를 살피는 척했다.

“너는 할리우드는 못 가겠다. 연기 같은 거 할 생각 말고 공부 열심히 해라.”

남윤수가 덧붙이는 말에 말없이 밥을 먹던 김찬영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식판에 얼굴을 고정한 채 테이블 아래에서 임석영의 발을 툭 때렸다. 출구를 보던 임석영이 고개를 돌린다. 쳐다보지 않은 채 수저질을 하자 임석영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남아 학교나 한 바퀴 돌 생각으로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혼자 휘적휘적 걸을 생각이었는데 임석영이 따라왔다. 녹음이 우거진 교내가 푸르렀다. 햇살이 뜨거운데 그늘진 곳은 또 선선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옷깃에 스몄다.

본관 앞을 지나가다가 저번에 임석영의 머리를 후려쳤던 선생과 마주쳤다. 청소 잘하고 있냐, 대충 했다가는 한 달 더 늘린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선생에게 임석영은 진짜 너무 깨끗해서 눈이 부시다며 능청을 떨었다.

“조만간 검사하러 갈 거야.”

선생이 임석영의 머리를 헝클어트린 뒤 멀어졌다. 머리를 후려칠 때와는 다른 온도였다.

“저 쌤이 너 되게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내 말에 임석영이 어깨를 으쓱인다.

“내가 어디 가서 또 미움 받는 캐릭터는 아니지.”

뻔뻔한 말에 대꾸 없이 걸음을 뗐다.

동관 뒤 화단으로 가자 그늘이 펼쳐졌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민들레 줄기가 흔들거렸다. 바람에 날린 민들레 홀씨가 점점이 허공을 부유했다. 그게 먼지 같기도 하고 눈송이 같기도 했다.

학교를 한 바퀴 돌았는데도 시간이 남아 임석영과 함께 옥상으로 갔다. 학교 전경을 내려다보며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들었다.

나는 운동장을 보고, 임석영은 나를 봤다. 그 시선이 너무 끈질겨서 모른 척하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왜? 뭐 묻었냐.”

“응.”

“뭐?”

손을 올려 얼굴을 더듬었다. 급식에 제육볶음이 나왔는데. 양념이라도 묻었나. 입가를 문질러 닦자 임석영이 고개를 젓는다.

“거기 말고.”

손의 위치를 옮겼다. 오전 수업 때 한참 동안 잤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선생의 모습을 끝으로 기억이 없으니, 4교시 내내 잔 거였다. 설마 하며 눈가를 문질렀다. 손가락 끝으로 눈 안쪽을 꾹꾹 누르며 임석영을 보았다.

“됐어?”

임석영이 또 고개를 저었다.

“아, 뭔데. 네가 닦아주든가.”

손을 떼고 몸을 돌려 임석영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가 묻었는지는 몰라도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는 모양새가 놀리는 게 분명해 보였다.

애먼 곳만 찾아다니며 닦는 내 손가락이 웃겼겠지. 또 엉뚱한 곳을 찌르느니 얼굴을 내어주는 게 나았다. 임석영이 아무 말 없이 제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나를 봤다.

“왜? 뭐 침이라도 발라야 돼?”

아무것도 안 하고 보고만 있기에 물었다. 저도 어쩔 수 없을 만큼 대참사가 일어나 있는 건가.

답답한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검은 액정을 거울 삼아 얼굴을 비추어 봤다. 아무리 얼굴을 돌려봐도 딱히 뭐가 묻었다 할 만한 게 안 보였다.

설마? 너의 아름다움이 묻었어,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사색이 되어 눈을 가늘게 뜨고 임석영을 보았다.

“설마 예쁨, 뭐 그런 건 아니지?”

임석영이 답이 없다. 헐, 하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진짜? 진짜 그거야? 야, 그런 말 하지 말아줄래?”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그러게. 너 아무 말도 안 했네. 괜히 머쓱해져 고개를 돌렸다.

“너 머리에 민들레 홀씨 붙었어.”

“…….”

“예쁨이 묻은 줄 알았어?”

“…….”

“이야, 설마 너 볼 때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가.”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

구름이 태양을 가려 그늘이 졌는데도 얼굴이 뜨거웠다. 손을 올려 정수리를 털었다. 거친 손짓에 머리칼이 마구 헝클어졌다.

“안 떨어졌어.”

내렸던 손을 다시 올려 머리를 더 세게 털었다. 이번에도 안 떨어지면 저 소리를 또 들을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그 모습이 웃겼는지 임석영이 소리 내 웃었다.

고개를 들자 임석영의 손이 올라왔다. 그의 손에 하얀 민들레 홀씨 하나가 잡혀 나온다. 진작 떼어줄 것이지.

임석영이 손에 잡은 민들레 홀씨를 내 앞으로 내밀며 말한다.

“예전에 벽돌 틈 사이에 핀 민들레를 봤거든? 그 좁은 틈을 뚫고 올라온 노란 꽃을 보는데, 뭔가 이상하더라.”

임석영이 손바닥 위에 홀씨를 놓고 후, 바람을 불어 날렸다.

“그런 거 보면 조금 슬프지 않냐?”

난간 너머로 점처럼 멀어지는 홀씨를 보며 내가 물었다.

“뭐. 민들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는 날아가고 있는 홀씨를 보면 왠지 모르게 조금 먹먹해져. 어딘가를 향해 가고는 있는데, 자기들도 그걸 모르잖아. 바람에 쓸려 갈 뿐.”

때마침 작게 바람이 인다. 앞머리가 가볍게 나부꼈다.

“그래서 먼지처럼 날아가는 홀씨를 볼 때마다 쟤들이 좋은 곳에 안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차가운 시멘트 사이, 벽돌 틈이 아니라, 다른 꽃들도 많이 피어 있는 화단 같은 곳에.”

난간 위에 두 팔을 올리고 턱을 댔다. 멀어지는 홀씨를 눈으로 좇았다.

“뿌리 내리고 눈을 떴는데, 벽돌 틈 사이에 혼자 있으면 좀 외롭잖아. 슬플 것 같아, 그런 거.”

어디에서부턴가 홀씨가 안 보였다.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다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임석영이 조금 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민들레한테 감정 이입하는 게 황당하냐?”

조용히 보더니 고개를 젓는다. 몸을 돌리고 나와 같은 모양새로 난간 위에 팔을 올리더니 허리를 숙여 턱을 댄다.

잠시 적막해졌다. 말없이 학교 전경을 응시했다. 한 차례 바람이 머리칼을 쓸고 지나갔을 때, 임석영의 말이 바람처럼 불어들었다.

“나 너한테 화단 같은, 그런 거 되고 싶어.”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애들을 보고 있었다. 깜박, 움직이는 눈에 순간 초점을 잃었다.

임석영은 종종 오해하기 쉬운 말들을 하곤 했다. 귀엽다느니 하는 그런 말들. 그럴 때마다 혹시 나를 좋아하나? 생각했다. 임석영의 인스타만 몰랐어도 분명 그렇게 확신했을 거다. 댓글 요정 희진이. 그게 자꾸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신경 쓰였다.

남고라서 눈에 보이지 않아 그렇지. 임석영은 원래 누구에게나 이러는 게 아닐까.

눈을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쳐다만 봤다. 붉게 색이 오른 임석영의 귀가 보였다. 임석영이 난간 위에 올린 팔을 풀지 않은 채 나를 본다. 그러다 팔 위에 한쪽 얼굴을 비스듬히 묻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외롭지 않게 꽃도 많이 심어놓을 수 있는데.”

귀에서부터 시작된 붉은 빛이 임석영의 뺨을 물들였다. 답지 않게 얼굴에 홍조를 띠더니 고개를 돌려 팔에 얼굴을 아예 묻어버린다.

“나한테 안착하면 안 될까?”

두 팔 안에서 임석영의 목소리가 분명하지 않게 울린다.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얼굴을 푹 파묻고 있던 임석영이 흘긋 눈을 돌려 나를 본다. 살짝 드러난 얼굴이 홍조를 띠다 못해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야, 이런 장난 하지 마.”

“장난?”

“그래. 이러면 네가 나 좋아한다고 오해하게 되잖아. 이런 건 진짜 네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하라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이러는 건 나쁜 버릇이다.”

“내가 또 누구한테 그랬는데?”

“아니, 나도 이름은 잘 모르겠고…. 남윤수가 그러던데? 너, 뭐 그런 애 있다고.”

댓글 요정 오희진. 심지어 성도 알면서 기억이 안 나는 척 눈동자를 굴렸다.

“그런 애?”

“뭐냐. 네 인스타에 댓글 많이 다는 애라고 하던데….”

“오희진?”

“아, 그래. 너 걔랑 뭐 있는 거 아니었어?”

괜히 민망해 앞머리를 쓸어내렸다.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져 눈을 돌리니 임석영이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뭐, 왜.”

“나 오희진 안 좋아하는데.”

나란히 난간에 기댄 채 서로를 보았다. 시선이 부딪치는 사이, 덜컥 오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 너 좋아해.”

놀란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임석영이 말했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말도 너한테만 하는 건데. 내가 오희진한테도 그러는 줄 알았어?”

임석영의 고백에 놀라는 것도 잠시,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석영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기 때문이다.

“신경 쓰였어? 내가 너 말고 다른 애한테도 이러고 다니는 것 같아서?”

“아니, 아닌데.”

“맞는 거 같은데.”

“야, 덥다. 내려가자.”

난간에서 몸을 떼자 임석영이 손목을 잡는다. 보니 웃는 낯을 하고 있다.

“김누리가 왜 오희진이랑 내 사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봐, 누리야.”

“아, 좀 놓으세요!”

팔을 당겨도 임석영이 안 놔준다. 몸을 뒤로 빼며 힘을 주자 임석영이 팔을 놓지 않은 채 웃는다.

“너 걔 신경 쓴 거지? 어?”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댓글 요정이 날개를 흔들며 날아갔다. 내내 마음에 걸리던 것이 소화되었다. 이 손 좀 놓으라며 몸부림을 치는데도 자꾸만 웃음이 나와 참기가 힘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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