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34화 (34/70)

제34화

“거기 친구, 쓰레기를 막 그렇게 버리면 안 되지 않을까아?!”

‘학교 폭력 근절’이라는 표어가 박힌 띠를 어깨에 두른 임석영이 한 손에는 쓰레기봉투를, 한 손에는 집게를 들고 소리쳤다. 바닥에 요구르트 병을 버린 애가 민망한 듯 잽싸게 도로 주운 뒤 달려갔다.

체육 대회 날 강은호를 때린 일로 임석영은 교내 봉사 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저기, 차연아.”

반장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더니 작게 속삭였다.

“석영이, 학폭위 열릴 수도 있대.”

체육 대회 날 운동장에서 동급생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징계 조치에 대한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반장에게 전해 듣고 기함했다. 아무리 임석영이 먼저 선빵을 날렸다지만 강은호에게는 안 열리는 학폭위가 임석영에게 열리는 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미친 거 아니야? 선생님들은 걔가 왜 처맞은 줄은 알고 그러는 거래?”

열을 올리자 반장이 나를 진정시켰다. 담임이 아닌 다른 반 선생이 체육 대회 날 아이들이 다 보는 데에서 일어났으니 학교폭력위원회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고 언급했을 뿐이지 확정된 건 아니라고 했다.

“그날 네가 너무 안 와서 석영이랑 찾으러 나갔거든. 그런데 그렇게 갔던 애가 돌아오자마자 걔를 때렸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반장이 은근슬쩍 나를 떠봤다. 아무래도 같은 반 친구에게 억울한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당황스럽고 동시에 절망적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망설이다가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전했다. 김찬영의 이름을 꺼내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지나가다가 강은호가 다른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걸 목격했다, 로 시작했다.

“야, 나서지 마.”

임석영이 그렇게 말한 건 내가 이 일에 대해 진술하겠다고 반장에게 뜻을 전달한 후였다. 반장에게 비밀 지켜달라고 했는데 그걸 고새 말했나 보다.

“일이 커질 수도 있어. 학교에서 막 너한테 부모님 모셔 오라고 할 수도 있잖아.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고,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징계 때리면 그냥 먹지.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런데 좀처럼 마음이 쉬운 쪽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임석영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흐름이 잘못되었으면, 그것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제대로 잡히지 않더라도 침묵보다는 나으니까.

학기 초부터 학교 구석구석에서 폭력을 행사하던 강은호에게는 왜 학폭위가 열리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모두가 침묵한 탓인 것 같았다. 강은호의 폭력은 사각지대에 숨어 있었으니까.

학교 내에서 숨어만 지내기를 원했던 내게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긴 했다. 아마도 내 주변에 머물게 된 이들이 내 선 안에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부모님 모셔 오라고 하면 모시고 오지. 그게 뭐 대수라고.”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학교에서 부모님을 호출하면 “선생님, 저는 그저 목격자인데 저희 부모님이 꼭 오셔야 할까요?” 하고 말할 생각이었다. 사모님에게 학교 좀 오셔야겠습니다, 라는 말을 꺼낼 생각만 해도 속이 요란해졌다.

“떨지나 말고 말해.”

“나, 안 떨었어.”

목소리에 힘을 줬지만 어쩐지 염소가 된 기분이었다.

임석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담임과 함께 상담실에 앉았다. 체육 대회 날 임석영과 강은호를 데리고 갔던 선생도 함께였다. 그날 목격한 것만 진술하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야기가 3월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급식실에서 멱살을 잡혀 위협당한 이야기, 가방과 신발을 강탈당한 이야기, 강은호가 억지로 내 입에 담배를 물린 이야기. 목격자만 되려고 했는데 어느새 피해자 자리에 앉게 되었다.

마주 보고 앉은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팔을 길게 뻗어 손을 뒤집어 폈다. 구부리고 있던 손가락 너머에 숨어 있던 화상 자국이 거뭇하게 드러났다.

“석영이가 이걸 보고 강은호를 찾아갔어요. 저는 그 자리에 뒤늦게 가서 어떻게 주먹이 오고 갔는지는 못 봤어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 강은호가 뻔뻔하게 굴었을 것 같긴 한데… 뭐, 그렇다고 폭력이 정당화될 순 없죠.”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사각사각, 앞에서 메모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석영이 아니었으면 그날 있었던 일은 저랑 강은호 빼고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아무도 묻지 않는다면 대개 그런 일들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가라앉잖아요.”

아니지, 그런 일은 당연 선생님들에게 알려야지, 하며 담임이 목소리를 냈다. 침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발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생각하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그날 운동장에서 일어났던 일로 인해서 석영이에게 학폭위가 열리게 된다면… 이제 다시는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고개를 들자 담임과 다른 반 선생이 나를 보고 있었다. 긴장이 되어 자꾸 엄지손톱을 문질렀다.

담임이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떨어트렸다. 순간 힘이 풀린 것 같았다. 툭 떨어진 펜이 테이블 위를 데구루루 굴렀다.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는 줄 몰랐구나.”

담임이 뒤늦게 펜을 주우며 말했다.

“석영이 걱정은 안 해도 돼. 학교폭력위원회까지 소집되진 않을 거고, 반성문 몇 장이랑 교내 봉사 활동 같은 걸로 끝나게 될 거야.”

흠, 하고 한숨을 내쉰 담임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선생을 보았다.

“아, 차연이 너는 나가봐도 좋아. 말해줘서 고맙구나.”

꾸벅 고개를 숙이고 상담실 문을 열었다.

“강은호 걔는 문제가 많네.”

닫히는 문틈으로 담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 계단에서 반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터덜터덜 올라오는 나를 발견하곤 반장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다가왔다.

“어떻게 됐어? 말은 잘 했어?”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에 힘이 다 빠졌다. 기운이 털린다는 게 이런 건가.

“야, 그런데 임석영이 다 알고 있더라? 그냥 학교에 벽보를 붙이지 그랬냐. 2학년 1반 홍차연 학교 폭력 진술 예정이라고.”

내 말에 반장이 머리를 긁적인다.

“아…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석영이가 자꾸 너랑 무슨 이야기 했냐고 캐물어서.”

“임석영이?”

“응. 둘이 쉬는 시간마다 몰래 사라지는 거 다 봤다고, 무슨 작당 모의라도 하냐고 추궁해서….”

반장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진술에 있어서 익명 보장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는 반장의 말을 따라 아이들이 없는 곳을 찾아다녔다. 거기에서 반장과 함께 어떤 식으로 말하는 게 좋은지, 어느 선까지 진술해야 하는지 등을 토의했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거 아무도 모를 거야, 하고 반장과 고개를 크게 끄덕인 게 어제인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교실로 돌아가자 김윤환이 은근슬쩍 다가와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왜?”

빤히 쳐다보기에 물었더니 상체를 숙이고 속삭였다.

“야, 너도 혹시 강은호 일로 담임 만나고 왔냐?”

반장 이 새끼, 입이 깃털이었네.

아무 말도 안 하고 눈만 끔벅이자 김윤환이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고 속삭였다.

“아니, 나도 저번에 그 새끼가 내 지갑 훔쳐 가서 내놓으라고 했다가 쌍코피 터졌거든. 누가 익명으로 제보를 했다면서 담임이 아까 나 불러가지고 물어보더라고. 그런데 너도 담임 만나고 온 것 같길래.”

김윤환이 나팔을 치우곤 나를 본다. 아마 익명의 제보자는 반장이겠지. 대답이 없자 김윤환은 아닌가? 괜히 내 치부만 드러냈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내가 쌍코피 터진 건 비밀이야.”

비밀이라면서 정작 이 말은 손나팔도 없이 했다.

그렇게 하나둘 눈에 보이지 않던 사실들이 드러나게 됐다. 모아놓고 보니 강은호가 학교 내에서 도둑질한 것만으로 잡화점을 차려도 될 정도였다.

가해 학생인 강은호에 대해서는 경미한 폭력이라는 결론이 났다. 학폭위는 열리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청소를 다니는 임석영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교실에 들어왔다.

“미친, 화장실 갈 시간도 없네.”

어깨에 두른 띠를 벗어 던진 임석영이 책상 위에 퍼져 누웠다. 길게 내뻗은 팔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너 때문에 한 달간 학교의 노예야.”

“그게 왜 나 때문이냐.”

“얼레?”

“내가 사람 때리라고 너한테 사주한 건 아니잖아. 내 탓 하지 마.”

“매도 맞았어. 좋냐.”

“누가 좋대?”

“그럼 싫어?”

뭐지, 이 대화는. 뭔가 이상한 흐름에 눈을 찌푸리자 임석영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한 번을 안 넘어오네.”

뭘 어떻게 넘어간다는 건지. 시작종이 울려 시선을 돌렸다.

*

등굣길, 교문을 지나가는데 학주가 임석영의 이름을 불렀다. 임석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상 순진한 얼굴로 “아니, 학생주임 선생님, 무슨 일이신가요?” 하고 말했고, 학주가 임석영의 옷깃 가운데를 손에 든 사랑의 매로 툭 찔렀다.

“타이는 어디다 팔아먹었죠?”

“네?”

임석영이 휑한 자신의 셔츠를 매만진다.

“엿 바꿔 먹었나요?”

“아, 아니, 오다가 떨어졌나?”

너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부터 타이 안 매고 있었는데, 석영아.

임석영이 타이를 찾는 척 제가 걸어온 길을 살폈다. 나도 임석영도 앞에 선 학주도 그의 타이가 어디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집에 있겠지. 집에.”

학주가 바닥을 두리번거리는 임석영의 귀를 잡아 올렸다.

“너 자꾸 타이 안 매고 오지? 어?”

“아! 선생님! 아픕니다!”

뒤에서 임석영이 목에 박제하겠습니다! 보내주세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절박한 소리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웃는 낯을 하고 걷는데 동관으로 걸어오는 김찬영이 보였다. 어, 김찬영이다, 생각하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안녕.”

김찬영이 먼저 인사하기에 손을 들고 흔들었다.

“어, 안녕.”

날이 조금 더워져서 그런지 김찬영의 교복이 춘추복에서 하복으로 바뀌었다.

“하복 입었네.”

“응. 더워서.”

어쩌다 보니 김찬영과 나란히 걷게 됐다. 짤막한 대화가 오갔다. 뭔가 토막 난 느낌이 들었지만, 단둘이서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 임석영 카톡 프사에 있는 강아지 너희 집 강아지라며?” 하고 묻는데 김찬영이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뭐지. 지금 나한테서 한 걸음 떨어진 거 같은데. 멀어진 김찬영을 보자 김찬영이 교문을 눈짓한다.

“너랑 단둘이 붙어 있으면 저 새끼가 질투해.”

그 새끼가 교문에 있는 모양이었다. 김찬영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거라고는 학주에게 귀를 잡힌 채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임석영뿐이었다.

“임석영이 질투를 왜 하냐?”

참 황당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투로 허허 웃었다. 김찬영이 무심한 낯으로 나를 본다. 아침 햇살이 머리 위로 부서진다. 우거진 나무의 그늘이 김찬영을 다 덮지 못하고 발끝에 머물렀다. 말없이 나를 보던 김찬영이 느지막하게 입을 연다.

“볼래?”

김찬영이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갑자기 정면에서 사라진 얼굴에 자연스레 시선이 내려갔다.

김찬영이 풀어 헤쳐진 신발 끈을 잡았다. 매듭이 풀린 줄도 몰랐는데, 그걸 발견했던 모양이다. 내 아래에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김찬영이 운동화 끈을 묶어주었다.

“아, 아니… 내가 해도 되는데.”

발을 조금 뒤로 빼자 김찬영이 끈을 당기며 붙잡는다. 매듭을 당겨 묶은 김찬영이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어느 사이에 임석영이 우거진 나무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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