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33화 (33/70)
  • 제33화

    잠깐 어디 간 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경기를 기다리기 위해 계단에 앉았다. 티셔츠를 끌어다가 이마를 닦고 김누리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째 시간이 계속 가는데도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계주에서 체육 선생이 미션을 줬다. 반에서 제일 키 작은 친구 업고 달리기였다.

    아, 선생님 말도 없이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툴툴대는 것도 잠시, 다른 아이들이 제 반으로 잽싸게 달려갔다. 아, 젠장.

    반 아이들이 몰려 있는 계단으로 뛰어갔다. 반에서 키 작은 애는 김윤환 아니면 김누리다.

    “홍차연은?”

    어떻게 된 애들이 김누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미션을 들은 반장이 김윤환의 등을 떠밀었다. 옆 반에서는 이미 한 명을 등에 업었다. 반장이 발을 동동 굴렸다.

    “윤환이 업고 뛰어!”

    “홍차 어디 있냐고.”

    “아, 아까 화장실 간다고 갔어. 얼른 뛰어!”

    우선 김윤환을 등에 업고 달렸다. 김윤환이 등 뒤에서 미친 듯이 소리쳤다.

    “아악! 무서워! 좀 천천히 달려!”

    야, 천천히 달릴 거면 뭐 한다고 계주를 나왔겠니. 공원 산책이나 하지.

    김윤환이 징그럽게 두 팔로 목을 꽉 감았다. 오른쪽 귀로 김윤환의 더운 숨이 닿았다. 아, 우승이고 뭐고 던져버릴까, 생각하며 달렸다.

    조금 늦게 출발한 탓에 2등으로 들어왔다. 반장은 그 등수도 마음에 드는 듯 박수를 쳤다.

    두리번거리며 찾아도 김누리가 안 나타났다. 아까 핸드폰 사물함에 넣은 거 봤는데, 혹시 교실에 있는 거면 받을까 해서 걸어봤으나 계속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반장.”

    “어?”

    옆구리에 생수병을 끼우고 여기저기 나눠 주던 반장이 눈을 맞춘다.

    “홍차연 화장실 간다고 나간 거 언제야?”

    “농구 끝나고 봤으니까….”

    반장이 생수를 반대쪽 옆구리로 옮기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다. 그러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시간도 더 됐네? 어디 갔지? 내가 한번 찾아볼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찰나, 옆으로 강은호의 친구들이 걸어가는 게 보였다.

    “야.”

    그중 한 명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강은호는 어디 있냐.”

    “덥다고 교실 갔는데.”

    “언제.”

    “아까. 좀 됐는데.”

    그 애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 동관을 향해 달렸다.

    다들 체육 대회 때문에 운동장에 나가 있어서 그런지 텅 비어 있는 복도며 교실이 고요했다. 바깥과 다르게 조금 서늘한 복도를 가르며 교실로 향했다. 저번처럼 화장지가 없지 않는 한 이렇게 오랜 시간 화장실에 있지는 않을 테니까.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간 교실에 아무도 없다. 비어 있는 김누리의 책걸상을 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옥상에 올라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학교가 텅 빌 수가 있나.

    계단을 빠르게 밟고 내려와 김누리가 자주 이용하는 화장실부터 살폈다. 화장실이란 화장실은 다 뒤지는데 어째 김누리가 안 보였다. 그럴수록 마음이 점점 초조해졌다.

    “아, 진짜, 어디 있냐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 화장실 칸막이를 하나하나 다 열었다. 그러다 굳게 닫혀 있는 칸 하나를 찾았다.

    창문으로 들어찬 햇빛이 길게 사선을 그으며 들어왔다. 덜컹거릴 만큼 문을 흔드는데도 칸 안에서 아무런 소리도 안 넘어왔다. 안에 누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쥐 죽은 듯한 묵음에 이상하게 가슴이 벅찼다.

    문을 두드렸다. 숨을 고르고 말을 뱉었다.

    “혹시 여기 있냐.”

    “…임석영?”

    “하….”

    벅찼던 숨이 흩어지듯 새어 나온다.

    “뭐 해. 거기서.”

    “일 봐….”

    “나와. 빨리.”

    “아, 아직 멀었어.”

    “아닌 거 알아.”

    “아니야, 맞아….”

    “장난해? 너 두 시간 가까이 자리 비웠어. 여기 이렇게 짱 박혀 있으면서 전화도 안 받고 어디 간다고 애들한테 말도 안 하고. 진짜… 왜 그러냐.”

    “…미안.”

    “됐고, 빨리 나와. 반장도 너 찾으러 갔어.”

    “먼저 가. 나도 곧 갈게.”

    “문 부순다.”

    “…….”

    “진짜 부숴.”

    상대가 침묵했다. 그러자 화장실 안으로 정적이 감돈다. 조용히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안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잠금이 풀렸다.

    벌컥 문을 잡아 열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눈을 올리는 김누리가 보인다.

    눈이 마주쳤다. 대롱대롱, 속눈썹에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큰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벌겠다.

    얼굴이 일순 굳는다.

    “울었어?”

    “아, 아니. 안 울었는데.”

    “그런데 눈이 왜….”

    그러다 시선이 눈을 가리는 김누리의 손으로 향했다. 손바닥에 검붉은 흉터가 있었다.

    “뭐야? 손 왜 이래?”

    김누리의 손을 낚아채듯 잡아 바닥을 올렸다.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에 화상 자국이 있었다.

    “왜 이러냐고.”

    “…….”

    “누가 그랬어?”

    김누리가 눈을 내리깐 채 입을 꾹 다문다. 갑자기 안에서부터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말을 해야 알지. 누구야? 학교 다 뒤질까? 네가 말 안 해도 나가서 개지랄 떨면 10분 안에 찾아.”

    “…….”

    “강은호야? 걔가 그랬어? 대답 안 하면 그 새끼한테 가서 물어본다.”

    “…….”

    가방이랑 신발 다 뺏긴 채로 집에 돌아가면서도 누가 그랬는지 말을 안 하던 김누리다. 분명 강은호 그 새끼겠지. 누구인지 말하는 걸 기대하느니 가서 묻는 게 낫다.

    걸음을 돌리자 김누리가 옷을 붙잡는다.

    “아니, 가서 뭐 어쩌게.”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다. 상황이 이렇게 되는 게 꽤나 당혹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울어서 부어오른 눈밖에 안 보였다.

    “…맞네, 시발.”

    그대로 화장실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찾는 데 시간이 걸리면 어쩌나 했는데 운동장 한쪽에 떡하니 서 있는 강은호가 보였다. 눈이 마주칠 새도 없이 강은호에게 달려들었다. 주먹을 그대로 얼굴에 꽂았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느낌이었다.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다.

    강은호의 얼굴로 주먹을 날릴 때마다 엉뚱하던 김누리가, 맑게 웃던 김누리가 떠올랐다. 안에서부터 무언가가 크게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집어삼키는 기분이 들었다.

    “네가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애가 아니라고.”

    강은호의 멱살을 들어 올리며 혼잣말처럼 뱉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아 주먹에 더 힘을 주었다.

    *

    교내 봉사 활동 한 달로 강은호 얼굴에 주먹을 날린 일이 마무리됐다.

    강은호가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요, 하면 그땐 안 터진 왼쪽 뺨을 갈겨줄 생각이었는데 다신 안 싸울게요, 하며 일이 빨리 마무리되는 쪽으로 대답을 했다.

    옥상에 누워 하늘을 봤다. 푸르른 게 청명하기만 하다. 딱 이 자리에 누워서 김누리가 노래를 불렀었다. 옥상가왕 김누리가 보았을 그날의 하늘이 겹쳐지는 것만 같다.

    너는 그날 무슨 기분으로 옥상에 왔을까.

    그러다 처절하게 노래를 부르던 그 목소리가 생각나 픽 웃음이 터졌다. 터진 입술에 피딱지가 졌는지 따끔하다.

    “아… 아프네.”

    뒤늦게 웃음을 거두며 입술을 더듬었다.

    한쪽 팔을 눈 위에 올린 채 가만히 있었다. 아무도 없고 운동장 소리가 아득하게 밀려드는 게 꽤 마음에 들었다. 눈을 가리니 새까만 어둠만 가득했다. 그런데 그 어둠 속을 김누리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 어떻게 된 게 다 네 생각뿐이냐.

    미간을 찌푸리는데 인기척이 났다. 팔을 내리고 보자 빛이 내리쬐는 옥상에 누군가 있다.

    “…….”

    김누리다. 김찬영에게 체육복을 빌려 입고, 또 김찬영과 함께 우산을 쓰고 집에 갔던 김누리. 괴롭힘 당하고도 혼자 끙끙 앓아서 사람 돌아버리게 만드는 김누리.

    “야, 임석영.”

    무시하고 팔을 올리자 귀에 있는 이어폰을 쑥 빼 간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김누리가 뚱한 얼굴로 조곤조곤 말을 뱉는다.

    “축구 우리 반 차례래. 너 데려오라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김누리를 보았다. 누리 또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봤다.

    너한테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괜히 심통이 났는데. 네가 이렇게 나를 찾아오니 바보같이 기분이 좋다.

    “너 김찬영 좋아해?”

    김누리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봤다.

    “좋아해?”

    “…아니?”

    말없이 눈을 맞췄다. 혹시나 좋아한다는 답이 나올까 봐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아니라고 하니 절로 긴장이 풀렸다.

    물끄러미 얼굴을 바라보다가 김누리의 새끼손가락을 쥐었다. 김누리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본다.

    “나랑 약속해.”

    “어? 무슨 약속?”

    “김찬영 안 좋아하기로.”

    두근두근, 가슴이 미친 듯 뛰었다. 그 심장 박동이 가슴에서 팔로, 팔에서 손으로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내 손이 닿은 김누리의 손에도 이 떨림이 전해질까.

    김누리의 눈이 깜박거린다. 조금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자꾸만 내 전화를 받지 않고 김찬영과 같이 우산을 쓰고 가던 뒷모습이 생각났다.

    모르는 일이잖아. 없던 감정이 그날 생겼을지 누가 알아.

    “찬영이는 안 돼. 좋아하면, 진짜 안 돼.”

    “안 좋아한다니까?”

    “그러니까, 계속 안 좋아해야 해. 자, 약속.”

    “이런 약속을 왜 해야 하는데?”

    순간 고민이 됐다. 김누리 눈치를 밥 말아 먹었나.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걸 아직도 모르나.

    고백을 했는데 김누리가 받지 않는다. 그 앞날이 빤히 그려졌다. 분명 전처럼 또 자신을 티가 나게 피해 다닐 것이다. 그건 조금 곤란한데.

    입술을 말아 물다가 김누리의 손을 겹쳐 잡았다.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김누리가 인상을 쓴다.

    “내가 삼각관계를 별로 안 좋아해.”

    김누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동그란 눈에서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안 했는지 따위는 안 읽혔다.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줄곧 모든 행동이 너를 좋아해서였는데, 역시나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건가.

    김누리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눈을 깜박거리며 멍한 게, 삼각관계의 삼각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다.

    이것도 돌려서 한 고백인데. 김누리 이거 완전 바보네.

    “교실에서 네 이름 말했던 거, 미안해. 나도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네가 너무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해서… 잠깐 돌았었나 봐.”

    눈썹 끝을 매만지며 뒷말을 이었다.

    “장난감 같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 그런데 진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너를 가지고 논다고?”

    “…….”

    “가지고 놀 생각도 없지만, 가진 적도 없잖아. 내가 너 가졌어?”

    “내가 물건이냐.”

    “그러니까. 너는 물건이 아니지.”

    말을 하다 보니 돌려서 한 고백이 점점 직설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말을 대충 얼버무리기 위해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축구 시작했을까?”

    “어, 글쎄. 다음이 우리 순서라고 그랬는데.”

    “가보자. 반장 기다리겠다.”

    옥상을 나가려는데 김누리가 내 옷자락을 잡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한참 뜸을 들이던 김누리의 입이 몇 박자나 늦게 열린다.

    “그래서, 우리는….”

    답지 않게 의기소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조용히 뒷말을 기다렸다.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던 김누리가 내 옷자락을 슬쩍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에 걸음이 김누리 가까이 옮겨 갔다.

    “다시 전처럼 지내는 거야?”

    가만히 김누리를 내려다보았다. 사과 머리를 한다고 올려 묶은 앞머리에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그 반들반들한 이마에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든다.

    다시 전처럼 지내야겠지. 친한 친구로.

    위에서 햇빛이 부서졌다. 나를 올려다보는 김누리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꼿꼿하게 난 눈썹이 찌푸려지는 모양새가 왜 귀여운지.

    아무 말 없이 내려 보다가 김누리의 이마에 손을 올려 차광막을 만들었다.

    “나랑 그러고 싶어?”

    조금 망설이던 김누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너랑 전보다 더 잘 지내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며 엷게 웃었다. 아무래도 나는 너를 친구로만 대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햇살이 부서졌다. 그 반짝이는 빛이 김누리의 머리 위에 걸렸다. 까만 머리가 빛에 뜨겁게 타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너를 보는 내 몸은 점점 뜨거워지고, 그게 옥상으로 미친 듯 쏟아지는 햇살 때문인지, 도통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이는 너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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