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32화 (32/70)

제32화

“아, 맞아. 체육복 없어서 김찬영한테 빌렸어.”

“나도 있는데 왜 거기까지 갔어?”

“뭐, 그때 네가 교실에 없었나 보지?”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김누리의 시선이 향하기에 고개를 돌렸다. 김찬영의 머리가 물기를 머금고 축 처져 있다. 순간 기분이 엉망이 됐다.

“너 나랑 체육복 바뀌었다. 아까 네 거 체육복이랑 같이 들고 있어서 섞였나 봐. 이게 네 건데.”

“…….”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불쾌했다. 배신감, 그런 게 느껴졌는데 정확히 누구에게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나도 모르게 둘 사이에 눈치 없이 낀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너희 둘이 내게 숨기는 건 뭘까.

짧은 순간 별생각이 다 든다.

“어어… 내가 다시 벗어서 줄게.”

기분은 엉망이 됐는데, 둘을 보낼 수가 없어서 김누리의 손목을 잡았다.

“…안 되지 않아?”

“어?”

“어디 가서 어떻게 바꿔 입게?”

“그야, 화장실 가서.”

“간다고? 둘이? 옷을 바꿔 입으러?”

언제부터 김누리가 김찬영을 이렇게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그런 생각에 속이 꽉 막혔다.

김누리가 제 손목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떨어트렸다. 그러더니 얼굴을 찌푸린다.

“야, 어차피 칸 안에 들어가서 옷만 넘겨받는 건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 알아서 몸 사리고 있거든? 방금 찬영이가 뭐라고 생각했겠냐. 완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걸? 괜히 내 심장이 다 쫄린다고.”

나를 탓하는 듯한 목소리에 시선을 올렸다. 지금 이 순간 김누리에게 나는 안중에 없고 김찬영만 있는 것 같아 심기가 뒤틀린다.

“신경 쓰여?”

“뭐?”

“찬영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게 그렇게 신경이 쓰이냐고.”

“이상하잖아. 네가 나한테 이러는 게.”

가슴이 크게 뛰었다. 선을 긋고 관계를 규율 짓는 말이 매몰차게 박혔다. 아까는 투덜거리는 듯하더니, 이제는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본다.

“그럼 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던 중 물었다.

고백하자면, 김누리에게 내가 어느 정도 특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쩌면 믿었다. 유일하게 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특별함이 좋았다. 계속 그렇게 남고 싶었는데, 순간 그런 기대가 무너진 것이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신경 안 쓰여?”

“지금 이게 상황이랄 게 있어?”

날 선 목소리가 날아든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모든 게 서늘해졌다. 무언가 툭 끊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네. 김누리.”

누리의 이름을 부른 건, 어쩌면 반은 충동적이었다. 내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너에게, 내가 유일하다고.

김누리가 교실을 나서는 순간 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엉망으로 무너지는 관계에 허탈해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유일해질 수 없다는 것을.

*

비가 내렸다. 우중충한 하늘이 기분 나쁘게 어둡고 음울해 보였다. 그런 날씨와 교실의 분위기가 비슷했다. 전등을 켰어도 어딘지 어둑하게 느껴졌다.

턱을 괴고 책을 보다가 흘긋 옆을 보았다. 교실 한쪽에서 아이들과 떠들고 있는 김누리가 보였다. 이상하게 속이 시끄러웠다. 화가 나는 건지, 사과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기분.

“아… 이런 기분 딱 질색인데….”

작게 내뱉은 목소리에 고저가 없다. 뒤이어 한숨이 샜다. 답답한 숨이었다.

담임이 종례를 하는 시간, 의자에 등을 기대고 느슨하게 앉은 채 상체를 살짝 뒤로 뺐다. 그러자 옆에 앉은 김누리보다 몸의 위치가 뒤로 간다.

의자를 까닥까닥, 뒤로 밀어내며 김누리를 보았다. 정면을 바라보는 머리통이 작고 동글동글했다. 젖은 머리가 늦게 마른 탓에 차분하지 않고 조금 붕 떠 있었다. 그 모습이 쓸데없이 귀여워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대체 저 동그란 머리에 나는 어떤 놈으로 들어가 있는 걸까….

종례가 끝났다.

김누리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섭섭해서 기분이 나쁘다가도, 이렇게 서로 냉랭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남윤수나 김찬영과 사소한 일로 다퉈도 하루를 넘기지 않았으니까.

그에 그냥 먼저 사과를 하자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김누리를 보았다. 그런데 창가에 널어두었던 제 교복을 모조리 걷어 오더니 나를 보지도 않은 채 가방에 넣는다.

“….”

그 모습을 계속 응시했다. 이렇게 보면 눈이 마주치긴 하겠지. 그런데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가방을 챙겨서 나가버렸다.

“허….”

조금 황당해서 한 박자 늦게 김누리가 나간 교실 뒷문을 돌아보았다.

지금 나랑 계속 이런 사이로 지내겠다는 건가.

“어이, 임쓱영. 오늘 피시방 고? 재철이도 간다던데.”

남윤수가 방정맞게 떠들며 교실로 들어왔다.

“어, 그런데 차연이는?”

교실을 쭉 훑은 남윤수가 묻는다.

“먼저 갔어.”

“왜? 바쁘대? 아, 다 같이 피시방 가려고 했는데.”

남윤수가 아쉽다는 투로 말하고, 그 옆에 조용히 서 있던 김찬영이 먼저 간다고 한다.

“왜? 같이 안 가?”

“비 오잖아. 집에 갈래, 그냥. 나는 재철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일 보자.”

김찬영이 인사를 하고는 교실을 벗어났다.

“아… 뭐야…. 최종 보스가 빠지네. 쓱영, 너는 갈 거지? 나랑 놀 거지?”

남윤수가 아직 가방걸이에 걸려 있는 내 가방을 대신 챙겨 들며 떠들었다.

자리에 그대로 앉아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창가로 향했다. 김누리의 교복이 걸려 있던 위치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 물기를 슥 닦아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시끄럽게 떠들며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반 아이들이 보였고, 그 뒤로 우산을 같이 쓰고 가는 김찬영과 김누리가 보였다.

“…….”

말없이 두 사람을 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김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이어지고, 핸드폰을 꺼내 보는 김누리가 보였다. 내내 이어지던 연결음이 부재중으로 넘어간다.

허탈한 웃음이 샜다. 전화가 온 줄 알고도 안 받는 건 뭐지.

“임석영, 안 가?”

교실 뒷문에 선 남윤수가 말했다.

“가.”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며 돌아서 걸었다.

*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혼자 기분이 나빠져서 욕도 못 하고 애먼 풍경만 노려보다가 김찬영을 찾아갔다. 교실 창가 쪽에 남윤수와 함께 있는 김찬영이 보였다.

“김찬영.”

“어어! 임쓱여엉!”

김찬영을 불렀는데 남윤수가 대꾸했다. 원래 같으면 웃으며 받아줄 만도 한데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이 이상했는지 남윤수가 고개를 기울였고, 촉이 좋은 김찬영이 눈치를 챘는지 말없이 교실에서 나왔다.

“뭔데! 나도 같이 가!”

따라오려는 남윤수에게 아, 너는 가라고, 가라고, 하다가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들을 것 같아 따라오면 죽는다, 라고 했더니 헐, 상처, 하며 돌아갔다.

동관 뒤쪽에 있는 화단에 나란히 앉았다.

홍차연이 홍차연이 아니고 김누리다, 하는 건 나만 아는 건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려고 김찬영을 불렀을까, 뒤늦게 후회가 됐다. 쉽게 이야기를 못 꺼내고 이마를 문지르는데 김찬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체육복 때문에?”

“어?”

너무 정확히 짚어낸 요점에 나도 모르게 눈이 동그래졌다.

귀신같은 놈. 뭐지. 내 얼굴에 써져 있기라도 한가. 존나 빡쳤음, 이라고?

“그래서 온 거 아니야?”

맞는데. 완전 맞는데. 뭐라고 해야 되나. 맞다고 해도 웃기고, 아니라고 해도 웃기고.

말없이 눈을 깜박거리자 김찬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 새끼는 표정이 없어서 속을 알 수 없다.

“그, 너는 모르겠지만, 내가, 홍차 걔를 좀 각별하게 생각하거든?”

“….”

“같은 반 친구로 좀 특별하단 말이야.”

안 굴러가는 머리를 애써 굴리며 말을 만들었다. 김찬영이 말없이 듣기만 했다.

“그러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김찬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 알 수 없는 시선에 굴러가던 머리가 딱 멈췄다.

“단둘이 있지 말라고.”

“….”

“걔랑 단둘이 있지 마. 둘이 뭘 하지도 말고. 서로의 체육복을 바꿔 입는 일은 더더욱 안 했으면 좋겠다.”

미친. 어쩌려고 이런 말을.

애써 난감한 표정을 숨기며 눈을 마주 보자 듣기만 하던 김찬영이 입을 열었다.

“왜?”

“뭐?”

“걔가 여자라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띵했다. 얼굴이 완전 굳었다가, 이러면 수긍하는 것 같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미쳤냐? 뭔 소리를 하는 줄은 알고 해?”

“너도 알고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나한테 이러는 거잖아. 걔 비밀 들킬까 봐.”

이번에는 머리를 세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뭐야. 김찬영이 어떻게 알아? 김누리가 말했나? 그럴 리가.

“….”

난감한 시간이 흘러갔다. 김찬영이 시선을 먼저 돌렸고, 김찬영의 옆모습을 얼마간 보다가 나도 시선을 돌렸다.

“나 걔 봤어.”

“…언제?”

“누나 가게에 머리 자르러 왔었어. 개학 전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김찬영에게 누나가 두 명이 있었는데 첫째 누나가 집 근처에서 미용실을 했다. 김누리가 배달 알바를 하는 중국집이 있는 동네이기도 했다.

김누리 비밀을 아는 사람이 여기 한 사람 더 있었다니. 심지어 나보다 먼저 알았다니. 동공 지진이란 게 이런 것인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여자애가 긴 머리를 싹둑 자르다 못해 이발기로 싹싹 밀어서 기억했어. 그날 걔 엄청 울었거든. 누나 가게가 걔 때문에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어.”

나는 모르는 날의 김누리에 대한 이야기에 귀가 쫑긋 섰다. 긴 머리의 김누리라니. 그걸 김찬영이 봤다니. 그 모습이 너무 궁금해서 더 묻고 더 듣고 싶은 것과 별개로 입이 굳게 다물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걔 비밀 말하고 다닐 생각 없어. 그러니까 날 좀 그만 세워.”

김찬영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징, 하고 진동하는 핸드폰 액정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남윤수에게서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응. 윤수야. 아, 알았어. 지금 갈게.”

통화를 끝낸 김찬영이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육 대회 예선 준비한다고 오라는데.”

걸음을 떼려던 김찬영이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는 나를 보았다.

“너는 안 가?”

“먼저 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찬영이 나를 보다가 느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걸음을 뗀 김찬영이 천천히 멀어졌다. 원래 학교에서 이렇게 새 소리가 잘 들렸던가. 햇살이 부서지고 내 위로 그늘이 뒤덮인 공간 안에서 새가 맑은 소리로 울었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

멍하니 동관 건물의 벽을 바라보았다. 누가 내 안에 퍼즐을 털어 부은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조각들이 속을 꽉 채웠다. 퍼즐의 그림이 뭔지, 도통 감이 안 잡히는 게 불안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에 왠지 모르게 속이 타들어갔다.

*

체육 대회 날이 되었다.

김누리와 어색한 와중에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교실에 처박혀 있으면 곁눈질로 무표정한 김누리 얼굴만 보게 되니까.

누가 봐도 흥미 없는 얼굴로 김누리가 응원 봉을 두드리고 있었다. 두 뺨에 빨간색 스티커를 붙이고 사과 머리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성이 난 어린애 같아 보인다.

“뭐야, 존나 귀엽네….”

운동장에 서서 혼자 그런 말을 뱉었다.

그러다 반 아이들 사이에서 김누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씨름 경기를 위해 운동장에 나가 있을 때였다. 경기를 끝내고 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왔다. 반장이 건넨 생수를 병째 물고 들이켠 뒤 주변을 둘러봤다.

“홍차는?”

“몰라?”

스티커를 얼굴 이상한 곳에 붙이며 놀고 있던 김윤환이 어깨를 으쓱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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