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28화 (28/70)
  • 제28화

    입 안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맴돌았다. 반장이 축구에 너 없으면 안 된다고 그랬어. 너 계주도 나가야 된다고 하던데. 반장 되게 열정적으로 움직이고 있어.

    그런데, 넌 왜 지금 이렇게 화가 났는데.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가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았다. 임석영이 말없이 시선을 돌린다. 가만 앉아 임석영의 얼굴을 보았다. 몰랐는데 입술이 터져 있다. 강은호가 그런 건가.

    빨갛게 터진 입술로 가만 손가락을 올렸다. 따끔했는지 임석영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린다.

    “아, 아팠어? 미안. 너 입술이 터져 있어서….”

    긴 숨을 뱉으며 임석영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고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내게 시선을 준다.

    “왜.”

    “어?”

    “입술 터진 게 왜. 너랑 상관없잖아.”

    “…그거, 아까 싸우다가 그렇게 된 거 아니야?”

    임석영이 말없이 나를 본다. 옥상이 적막해졌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기운이 맴돈다. 우리는 지금 말다툼을 했던 것의 연장선에 서 있었다.

    임석영의 시선이 내게 계속 머무르자 그날 홧김에 뱉은 말들이 떠올랐다. 왠지 지금이 아니면 마음 한구석을 계속 짓누르던 이야기를 꺼낼 수 없을 것 같아 입을 열었다.

    “그날은… 네가 내 이름을 부른 게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임석영이 내 이름을 부른 것에 대해서 마음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고, 실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숨어 있는 나를 임석영이 찾았다. 거기다 나를 괴롭혔다는 이유로 강은호를 때렸다. 그게 응징의 개념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나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하니 날 섰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어쩌면 임석영이 먼저 내게 와주기를 기다렸던 건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임석영이 없는 일상이 조금은 공허했다.

    “네가 내 비밀을 약점 잡아서 이용한다고 생각했어. 아닌 걸 아는데, 그땐 그런 생각밖에 안 들어서, 말이 그렇게 나갔어. 너… 안 싫어. 미안해.”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못 들었다. 나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쉬운 사람이 숙이고 들어가는 거 아닌가. 당장은 내가 아쉬우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너 김찬영 좋아해?”

    네?

    너무 뜬금없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고개를 들고 보자 임석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건너다본다.

    “좋아해?”

    “…아니?”

    대체 무슨 연유로 그런 질문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어 멍했다.

    임석영이 말없이 눈을 맞췄다. 사나운 기운이 조금 꺾인 듯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물끄러미 나를 보던 임석영이 갑자기 내 새끼손가락을 쥐었다. 눈을 내리고 손가락 하나를 감은 임석영의 주먹을 보았다. 비스듬히 붙은 주먹에 손등의 크기가 확연히 비교됐다. 손등에서부터 팔목으로 이어지는 선이 매끄럽다.

    왜 새끼손가락을 잡고 난리지. 시선을 올려 임석영을 보았다.

    “나랑 약속해.”

    “어? 무슨 약속?”

    “김찬영 안 좋아하기로.”

    황당한 말에 눈썹을 올렸다. 방금 아니라고 했는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찬영이는 안 돼. 좋아하면, 진짜 안 돼.”

    “안 좋아한다니까?”

    “그러니까, 계속 안 좋아해야 해. 자, 약속.”

    “이런 약속을 왜 해야 하는데?”

    가만히 올려다보자 임석영이 말을 삼켰다. 뭐지. 새끼손가락을 쥔 임석영의 손바닥이 뜨겁다.

    물끄러미 눈을 맞추던 임석영이 손가락을 잡고 있던 손을 펴 손등을 덮는다. 임석영의 손안으로 내 손이 숨었다.

    왜 이래. 눈썹을 찌푸리자 임석영이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나를 보았다.

    “내가 삼각관계를 별로 안 좋아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았다. 임석영의 두 눈동자가 얼핏 긴장감으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손등으로 뜨거운 체온이 넘어온다.

    삼각관계? 그 삼각형을 어떻게 이루는데? 나랑 김찬영? 다른 꼭짓점에 있는 사람은 임석영인가 남윤수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임석영이 말한다.

    “교실에서 네 이름 말했던 거, 미안해. 나도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네가 너무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해서… 잠깐 돌았었나 봐.”

    입술을 말아 물고 달싹이던 임석영이 눈썹 끝을 매만진다.

    “장난감 같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

    장난감? 눈을 찌푸리자 임석영이 네가 한 말, 하며 기억을 되짚어준다.

    “내가 너 하라는 대로 다 하니까 가지고 노는 게 재밌어? 가방 들라면 들고, 오라면 오고, 내가 네 장난감 같지?”

    아, 하고 목을 울리자 임석영이 말을 잇는다.

    “그런데 진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너를 가지고 논다고?”

    그것 역시 홧김에 뱉은 말이었다. 왜 말을 그딴 식으로 뱉었지, 이제 와 후회가 됐다.

    “가지고 놀 생각도 없지만, 가진 적도 없잖아. 내가 너 가졌어?”

    “내가 물건이냐.”

    “그러니까. 너는 물건이 아니지.”

    눈썹을 올리자 임석영이 무릎을 펴고 일어난다.

    “축구 시작했을까?”

    “어, 글쎄. 다음이 우리 순서라고 그랬는데.”

    “가보자. 반장 기다리겠다.”

    뛸 생각 없다더니, 임석영이 걸음을 뗀다. 나를 지나쳐 가는 임석영의 옷자락을 급하게 잡았다. 뒤돌아 늘어난 옷자락을 확인한 임석영이 눈을 올려 나를 본다. 옥상을 내려가기 전, 정확하게 매듭짓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상하게 의기소침해졌다. 치고받고 싸우면 다신 안 보는 게 나였다. 애초에 싸울 일이 그런 사람이랑만 생겼다. 죽을 때까지 안 봐도 상관없는.

    그런데 임석영은 그렇지 않으니까. 평생일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곁에 있어주면 좋겠으니까.

    손에 잡힌 옷자락을 구기며 슬쩍 당겼다. 임석영의 걸음이 쉽게 옷자락에 딸려 온다.

    “다시 전처럼 지내는 거야?”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던 임석영이 내 이마에 손을 붙이며 차광막을 만든다.

    “나랑 그러고 싶어?”

    뭔가 낯간지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아쉬운 사람이 숙이고 들어가는 거다, 생각하며.

    “나는 너랑 전보다 더 잘 지내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며 임석영이 조금 웃는다. 그 얼굴에 왠지 모를 안도가 찾아왔다.

    햇살이 아무런 가림막도 없는 옥상으로 미친 듯이 부서져 내렸다.

    *

    운동장에 나타난 임석영과 나를 보는 반장의 표정이 흡사 단두대에 서 있는 집행자와 같은 표정이었다. 우리 반 축구 예선이 시작된 것이다.

    반장이 툴툴거리며 임석영에게 빨간색 조끼를 내밀었다.

    “아, 난 파란색이 좋은데.”

    조끼에 팔을 꿰어 넣으며 툴툴거리는 임석영을 보며 반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묵사발 아니고 죽사발 됐어.”

    “개 발렸다는 소리네?”

    늦게 온 주제에 헤실헤실 웃는 임석영을 보며 반장이 주먹을 꾹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진짜 미친 척 때려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상태로 보아서는 네가 때려도 그냥 웃을 것 같긴 한데.

    조끼를 입은 임석영이 반장과 함께 체육 선생이 있는 곳으로 갔다. 선수 교체를 할 모양이었다.

    반 아이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계단으로 갔다. 한산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바닥에 놓인 제기를 들었다. 아까 제기차기 예선에 나간 놈이 저도 모르게 이걸 신발에 달고 온 거였다.

    제기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며 운동장을 보는데 몸을 푸는 임석영과 눈이 마주쳤다. 멀뚱히 임석영을 보다가 그가 입술을 늘여 웃는 통에 순간 가슴이 두근 뛰었다. 뭐지.

    굳은 얼굴로 보다가 손에 든 제기를 어설프게 흔들었다. 안녕이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응원한다, 뭐 그런 뜻이기도 했다.

    “어떻게 3 대 0일 수가 있냐.”

    아직 전반전인데 상대 팀이 우리 반 골대를 세 번이나 흔들었단다. 임석영 저거 하나 들어간다고 우리 반이 이길까.

    “이길 수 있을까.”

    뒤에서 누군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다른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석영이 성격에 지는 꼴 못 볼걸.”

    그 말에 애들이 깔깔 웃었다.

    “지금 운동장에 있는 애들은 임석영이 저승사자처럼 보이겠지?”

    “지옥 가는 거야, 이제.”

    호각 소리가 운동장을 크게 울렸고, 임석영이 운동장 중앙으로 뛰어 들어갔다. 활짝 웃으면서.

    빨간 조끼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아이들이 가쁜 숨을 내뱉으며 임석영을 보았다. 임석영이 박수를 짝짝 치며 이기자! 하고 소리쳤다.

    잠시 멈췄던 공이 다시 굴렀다. 바닥을 구르고 허공을 가르고 여기저기 발에 차이며 날아다녔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도 생각했다. 임석영, 저건 진짜 이중인격이 맞다고.

    “시발! 이쪽으로 날려야지!”

    웃으면서 들어가더니, 왜 화를 내고 있어.

    골을 넣으면 웃고, 애들이 공을 엉뚱한 곳으로 차올리면 열을 내던 임석영은 혼자서 그 큰 운동장을 거의 날아다니는 것처럼 뛰어다녔다. 땡볕에 힘들지도 않은가.

    호각 소리가 울렸다. 후반전이 끝났다. 반장이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3 대 4. 우리 반이 한 골 더 넣어 이겼다. 임석영이 들어간 이후로 상대 팀은 한 골도 못 넣었고, 이게 미친 이야기 같지만 임석영이 네 골을 다 넣었다.

    다른 반이 축구 예선을 하는 동안 담임이 사준 쭈쭈바를 입에 물고 계단에 앉아 있었다. 반장이 임석영 것도 내 손에 쥐여주고 간 탓에 두 손에 쭈쭈바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어디 가서 안 와,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운동장 너머에 있는 개수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방금 축구를 뛰었던 우리 반 아이들이다.

    키가 큰 임석영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입고 있는 티셔츠를 훌러덩 벗더니 바닥에 엎드려뻗쳤다. 다른 아이가 그의 등으로 물을 쏟아 부었다.

    “어, 세상에.”

    입 안에서 아이스크림이 차갑게 녹았다. 그늘에 있어도 뜨거운 햇볕이 그대로 느껴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열기가 섞여 있다.

    바닥에서 일어난 임석영이 수도꼭지 아래 머리를 들이밀고 물에 적셨다.

    사방으로 물방울이 튀기는 모습이, 쏟아지는 햇빛이,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그 모든 풍경이 아주 잠시 느리게 눈에 담겼다. 아이들과 함께 뭐라고 떠들며 웃는 임석영의 얼굴이 햇살만큼이나 눈이 부시다.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정면을 보았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축구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게 꼭 작은 콩알처럼 보여 잠시 멍했다. 김누리가 쏘아 올린 작은 콩알이 아니고, 임석영이 쏘아 올린 무언가가 나를 향해, 긴 포물선을 그리며, 그렇게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김누리 골키퍼, 이 공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쭈쭈바를 입에 문 내 얼굴이 어쩐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아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잘근잘근 쭈쭈바 튜브를 씹고 있는데 젖은 머리를 하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임석영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갈아입었네.”

    “응. 땀 냄새 나서.”

    손에 들고 있는 임석영의 쭈쭈바를 건넸다.

    “너 먹지.”

    “두 개 먹으면 배탈 나.”

    그 말에 임석영이 피식 웃는다.

    쭈쭈바 튜브에 후 바람을 불어 넣어 쭈글쭈글해진 것을 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 안으로 탈탈 털어 넣었다. 느리게 튜브를 타고 내려온 아이스크림이 입 안으로 뚝뚝 떨어졌다.

    입을 벌리고 아이스크림을 받아먹는데 시선이 느껴져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임석영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내가 좀 너무 처절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나.

    “야, 홍차.”

    고개를 내리고 입에 든 것을 삼켰다.

    “응?”

    “넌 왜 이렇게 귀여워?”

    눈을 깜박이다가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 아이들이 없어서 망정이지,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런 말을 하는지.

    사색이 되어 임석영을 보았다.

    “야, 입조심해. 귀엽긴 뭐가 귀여워.”

    “귀여워. 졸라 귀여워, 너.”

    “….”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야, 조용히 하라고.”

    “진짜인데.”

    임석영이 왜 그걸 모르냐는 얼굴로 시선을 돌리더니 쭈쭈바를 무릎에 훅 찍어 비닐 포장을 터트렸다.

    빵,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내 마음속에서도 뭔가가 빵 터졌다. 뭐가 터진 줄은 모른다. 그냥, 뭔가가 터졌다.

    다 먹은 쭈쭈바를 입에 물고 운동장을 바라봤다. 빨간색 조끼를 입은 아이들과 파란색 조끼를 입은 아이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운동장 너머에 키가 큰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서 있었다. 울창한 그 풍경이 너무 푸르러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평범한 어느 날, 찢겨 나가는 달력의 일부가 갑자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마도 홍차가 된 지금이 특별해졌기 때문일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그 나뭇가지에 매달려 흔들리는 나뭇잎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계절만큼이나, 이 시절이 찰나라는 것을 알기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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