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25화 (25/70)
  • 제25화

    뚝뚝, 물방울을 떨어트리며 서 있자 김찬영이 말을 잇는다.

    “다음에는 내가 얻어터지고 있어도 그냥 무시하고 가. 걔 완전 꼴통이라서 수틀리면 너도 괜히 피곤해지니까.”

    그 말이 괜히 서운했다. 이렇게 된 건 미안하지만, 잘잘못을 따지자면 고의로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강은호가 잘못된 것 같은데.

    “너는 친구가 그러고 있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

    “…친구?”

    무표정하게 친구라고 되묻는 김찬영의 모습에 조금 민망해졌다. 얘는 나를 친구라고 생각 안 하는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난 너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치, 친하지 않아? 오늘 밥도 같이 먹었고, 어, 아닌가? 뭐,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아무튼 그래. 나는 아까 그 상황에 끼어든 거 후회 안 해. 비 맞은 생쥐 꼴이 된 게 내 탓이면 미안하긴 한데….”

    말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뒷말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미간이 찡그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말은 하나밖에 없어서.

    “미안해. 우리 꼴이 말이 아니다.”

    그렇게 덧붙였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김찬영이 묻는다.

    “체육복 있어?”

    “어? 응. 교실에.”

    “본관 옆에 도서관 있는데 오늘은 아마 사람 없을 거야. 거기 화장실에 가 있으면 내가 체육복 가지고 갈게. 아무래도 젖은 차림으로 교실 들어가면 좀 그렇잖아. 애들이 자꾸 무슨 일이냐고 묻고.”

    “…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앞에 선 김찬영의 교복을 눈짓했다. 저도 나처럼 젖은 주제에.

    고개를 숙여 제 교복을 훑은 김찬영이 어깨를 으쓱인다.

    “난 전에도 한번 이런 적 있어서 상관없어.”

    “헐. 그 새끼가 전에도 그랬어? 걔 진짜 학교폭력위원회 이런 거 안 열리냐?”

    갑자기 열을 내는 내 모습을 김찬영이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도서관 어디 있는지 알지?”

    어, 알긴 알지. 고개를 끄덕이자 김찬영이 걸음을 돌려 멀어졌다.

    멀어지는 김찬영을 보았다. 뚝, 앞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속눈썹에 걸렸다. 얼굴을 문질러 닦고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쫄딱 젖은 옷이 물을 먹어 무겁게 느껴졌다. 길을 오르다가 옷소매를 잡아 주먹 쥐자 주르륵 물이 쏟아진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김찬영의 말대로 도서관 건물에는 사서 선생님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게 왠지 민망해 문 앞에 서서 김찬영을 기다렸다.

    몇 분 지났을까, 저만치서 김찬영이 걸어왔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너희 교실 가서 체육복 챙기고 내 체육복 챙겨서 나오다가, 굳이 여기서 같이 갈아입을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 나는 먼저 갈아입었어.”

    김찬영이 제 손에 있는 체육복을 내밀었다.

    “고마워.”

    “나는 먼저 가봐도 되지?”

    체육복을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로 들어가려는데 김찬영이 머뭇거리며 안 떠났다. 쳐다보자 멋쩍게 서 있던 김찬영이 묻는다.

    “어… 아니면 여기서 기다려줄까?”

    빤히 시선이 닿았다. 싫다, 좋다, 대답도 안 했는데 김찬영이 그럴 필요는 없겠다, 하며 걸음을 돌렸다. 그러곤 쏜살같이 사라졌다. 참으로 빠른 걸음이었다. 쟤가 원래 저렇게 빨랐었나.

    화장실로 들어가 칸막이를 걸어 잠갔다. 물에 젖은 교복을 벗는 몸이 삐걱거리는 로봇 같다. 좁은 곳에서 옷을 갈아입느라 진땀을 뺐다.

    벗어서 문에 걸어둔 바지에서 웅, 웅, 하고 핸드폰이 진동했는데 받지 못했다. 양말을 벗고 맨발로 슬리퍼를 신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교복을 손에 들고 화장실을 나섰다.

    아까부터 계속 우는 핸드폰을 꺼냈다. 임석영의 전화다.

    “여보세요?”

    ― 빨리도 받는다. 왜 전화를 안 받아? 걱정했잖아.

    “아, 미안. 무슨 일인데?”

    ― 어디야? 나갔다 왔더니 또 사라지고 없네. 은근 혼자 빨빨거리며 잘 다닌다니까.

    “청소 시간이잖아. 쓰레기 버리러 갔어.”

    ― 혼자?

    “응.”

    ― 알았어. 아이스크림 사 왔으니까 빨리 와.

    요즘 부쩍 임석영은 매점에서 이것저것 사 들고 와서 어미 새처럼 나를 먹였다. 할머니가 왜 밥 잘 먹을 때 예뻐 죽겠다고 했는지 알 것 같다며 두 뺨 가득 먹을 것을 욱여넣고 씹는 나를 흐뭇한 얼굴로 보고는 했다.

    대체 왜 이래, 하고 생각했지만 내가 좀 잘 먹기는 하지, 하며 빠르게 이해했다.

    동관 건물 현관으로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는다. 교실에 들어가자 핸드폰을 보고 있는 임석영이 보였다. 그를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창가로 가 교복을 널었다.

    의자를 뒤로 빼고 앉자 그제야 임석영이 눈을 올린다.

    “왔어? 그런데 너 머리가 왜 그래?”

    “어? 아, 별거 아니야.”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물기를 털어냈다. 임석영의 책상 위에 통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더니. 이건 매점에서도 안 파는 건데?

    “야, 너 나갔다 왔어?”

    그렇게 묻는데 임석영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간다. 눈을 깜박거리자 임석영이 눈썹 끝을 매만진다.

    의자를 끌어당기고 아이스크림 뚜껑을 열었다.

    “이런 건 밥숟가락으로 팍팍 떠먹어야 맛있는데.”

    일회용 숟가락을 들고 임석영을 바라봤다. 갑자기 뭔가 언짢아진 표정에 아이스크림도 못 먹고 숟가락만 빨았다.

    뭐지. 갑자기 어디서 기분이 상한 거지. 내가 너무 늦게 왔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임석영이 낮게 묻는다.

    “왜 찬영이 체육복을 입고 있어?”

    “응? 아닌데. 내 체육복인데.”

    “그거 찬영이 건데.”

    임석영이 오른쪽 어깨를 가리킨다.

    “여기 별, 이거 내가 그린 거거든. 김찬영 체육복에.”

    눈을 내려 어깨를 살폈다. 임석영이 그렸다는 별이 잘 안 보여 체육복 소매를 잡아 죽 늘리자 얼핏 뾰족한 선들이 보였다.

    “어, 진짜네.”

    “찬영이한테 체육복 빌렸어?”

    “아니, 빌린 건 아닌데.”

    임석영이 물끄러미 나를 보며 눈썹을 올린다.

    강은호와 맞닥트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김찬영을 보게 된 것부터 말해야 하는데, 그건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까.

    “아, 맞아. 체육복 없어서 김찬영한테 빌렸어.”

    “나도 있는데 왜 거기까지 갔어?”

    “뭐, 그때 네가 교실에 없었나 보지?”

    순간 교실 뒷문으로 김찬영이 들어왔다. 내가 먼저 김찬영을 발견했고, 내 시선이 향한 곳으로 임석영이 고개를 돌렸다.

    덜 마른 김찬영의 머리가 물기를 머금고 축 처져 있었다.

    “너 나랑 체육복 바뀌었다. 아까 네 거 체육복이랑 같이 들고 있어서 섞였나 봐. 이게 네 건데.”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뭔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해 뒷골이 서늘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난감할 수가.

    곁눈질하자 역시나 임석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다. 거짓말을 하자마자 빛의 속도로 들통이 났다. 이럴 수가 있나.

    우선 이 망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자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어… 내가 다시 벗어서 줄게.”

    교실을 나가려는데 손목이 잡혔다. 임석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본다.

    “…안 되지 않아?”

    낮은 목소리가 왠지 냉하다.

    “어?”

    영문을 몰라 묻자 임석영이 손에 힘을 준다.

    “어디 가서 어떻게 바꿔 입게?”

    “그야, 화장실 가서.”

    “간다고? 둘이? 옷을 바꿔 입으러?”

    묘한 기류가 흘렀다. 얘 왜 이래. 김찬영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몸을 돌려 김찬영을 등졌다. 자리에 앉아 있는 임석영을 내려다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너 왜 이상한 소리를 해? 하고 입을 벙긋거리자 임석영이 손목을 잡아당기며 안 돼, 하고 낮게 말한다.

    “어차피 입은 거 그냥 있어. 등판에 이름 적힌 것도 아닌데 상관없잖아.”

    그 말에 김찬영이 제 등을 보여준다. 체육복 상의 뒤쪽에 홍차연 이름이 크게 써져 있다.

    “그래도 그냥 입어.”

    대답을 요하듯 임석영이 김찬영을 보며 어? 하고 묻는다. 김찬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임석영과 눈을 맞췄다. 그러다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래.”

    김찬영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그러곤 말없이 교실을 나섰다.

    어어, 뭐지. 이 이상한 느낌은.

    손목을 확 잡아 빼며 얼굴을 찌푸렸다.

    “야, 어차피 칸 안에 들어가서 옷만 넘겨받는 건데.”

    임석영이 고개를 기울이고 이마를 문지른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 알아서 몸 사리고 있거든? 방금 찬영이가 뭐라고 생각했겠냐. 완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걸? 괜히 내 심장이 다 쫄린다고.”

    이마를 매만지던 임석영이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든다.

    “신경 쓰여?”

    “뭐?”

    “찬영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게 그렇게 신경이 쓰이냐고.”

    “이상하잖아. 네가 나한테 이러는 게.”

    분위기가 어쩐지 딱딱하게 굳는다.

    임석영과 가까이 지내면서 신경 쓰이는 부분 중 하나였다. 임석영은 내가 여자인 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은연중 괜한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하고는 했다.

    아마 임석영이 나에게 했던 행동을 남윤수가 저한테 똑같이 했다면 멱살부터 잡았을 것이다. 저도 그런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제가 한 행동이 남한테 이상하게 보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건가.

    “그럼 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던 중 임석영이 물어왔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신경 안 쓰여?”

    “지금 이게 상황이랄 게 있어?”

    목소리가 조금 날이 섰다. 자연스레 입이 다물렸다. 나를 보는 임석영의 얼굴이 조금 사나워진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네. 김누리.”

    순간 튀어나온 이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색이 되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까운 거리에 아이들이 없었다.

    “미쳤어?”

    임석영이 무표정한 낯으로, 조금 차가워진 기색으로 나를 본다.

    “너 때문에 미치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진짜 이럴 줄은 몰랐어.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해?”

    허, 하고 어이없는 숨이 튀어나간다. 순간 불린 이름 때문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너 지금 내가 체육복 빌려 입은 거라고 한 거 때문에 이러는 거야?”

    빨리 뛰는 심장 때문인지 목소리가 떨렸다. 흥분한 나와는 다르게 어쩐지 임석영의 모습은 무서우리만치 차분하다.

    “혼자 쓰레기 버리러 갔다 왔다는 애가 교복은 다 젖어 있고, 머리카락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김찬영이랑 같이 체육복을 갈아입었어. 애들 피해서 화장실도 꼭대기로 올라가서 쓰는 네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하잖아.”

    “뭐가 이상해? 그게 너랑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임석영이 입을 다문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안에서부터 무언가 뜨겁게 끓는 것 같은데, 어딘지 차게 식는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상관없다고 쳐. 그런데 이유를 물을 순 있는 거잖아. 네가 말한 거랑 상황이 다르니까.”

    “이유만 물은 게 아니잖아. 네가 지금 여기서 이름을 부른 거, 그게 협박 아니면 뭐야?”

    “이게 협박으로 들려?”

    “그럼 아니야? 유일하게 다 아는 네가 그러는 건… 아니지 않아?”

    “…….”

    “너 같은 새끼한테… 내가 뭘 믿고.”

    “너 같은 새끼?”

    “항상 다 네 멋대로 굴잖아. 내가 너 하라는 대로 다 하니까 가지고 노는 게 재밌어? 가방 들라면 들고, 오라면 오고, 내가 네 장난감 같지?”

    빠르게 내뱉은 말에 숨을 씨근거렸다. 임석영이 느지막하게 입을 연다.

    “…말을 왜 그렇게 해?”

    “네가 먼저 말을 이런 식으로 했잖아!”

    조금 크게 나간 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여기서 이렇게 싸우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너 진짜, 너무 싫어.”

    도저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어 교실을 달려 나갔다.

    현재 나의 가장 큰 약점은 내가 홍차연이 아니라는 것, 심지어 남자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필사적으로 숨겨야 하는 것이었고, 늘 나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약점 잡아 나를 휘두르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누리, 그 이름이 교실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비참하게 느껴졌다. 내 이름 세 글자에 벌벌 떨어야 하는 내 처지를 직면하게 됐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게 가장 마음 아팠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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