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24화 (24/70)

제24화

담임을 따라 강당으로 갔다. 이제 막 검사를 마친 1학년들이 강당을 벗어나고 있었다. 신체검사를 먼저 하고 체력검사를 한다고 했다. 신체검사는 키와 몸무게를 재고 시력을 검사하는 순서였다.

번호대로 줄을 서는데 임석영이 내 뒤에 줄을 섰다. 전학생이라 내가 가장 뒷번호인데 왜 임석영이 제일 뒤에 서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야, 너 19번이잖아.”

“그런데?”

“너 저기 앞에 서야 돼.”

“싫은데?”

임석영이 그만 말하라는 듯 두 손으로 내 머리를 잡아 앞으로 돌렸다. 야, 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임석영의 힘에 의해 반도 못 돌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내 차례가 됐다. 슬리퍼를 벗고 신장체중계 위에 올라갔다. 뒤꿈치와 등을 붙이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헤드 바가 머리를 탁 찍고 올라갔다.

옆에 서 있던 임석영이 성큼 앞으로 다가와 측정 결과를 확인한다.

“아, 저리 가라고!”

몸무게를 들킬까 잽싸게 바닥으로 내려와 임석영을 밀어냈다. 두 손을 쭉 뻗어 얼굴을 가리자 임석영이 아, 안 볼게, 안 봐! 하며 웃었다.

다음 학생 올라오라는 말에 임석영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내 팔목을 잡아 내렸다.

“야, 내 차례야.”

눈을 흘기며 옆으로 물러났다. 팔목을 놓고 걸음을 뗀 임석영이 슬리퍼를 벗으며 혼잣말을 했다.

“167.”

하고.

안 본다더니. 다 봤어. 이 새끼.

시력검사 줄로 이동하려다가 내 키와 몸무게만 털린 게 억울해서 임석영의 측정 결과를 기다렸다. 신장체중계 앞에 서서 LCD 화면을 노려봤다. 임석영의 머리를 찍은 헤드 바가 올라가며 키와 몸무게가 떴다.

키 184, 몸무게 76.

뭔, 놀릴 게 있어야 놀리지.

슬리퍼를 신고 내 옆에 선 임석영이 제 결과를 확인했다.

“작년보다 키가 컸네.”

흠잡을 것 없는 결과에 말없이 걸음을 돌렸다. 졸졸 뒤를 따라온 임석영이 어깨에 팔을 올리고 섰다.

“그런데 너 많이 좀 먹어야겠다. 너무 말랐다.”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올리자 임석영이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쉬는 시간마다 매점 가자.”

머리를 쓸고 지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그 묵직하고 따뜻한 느낌이.

정면을 보던 임석영이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고 나를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임석영의 얼굴을 보는데 마음이 말랑말랑한 게, 건드리면 툭 터질 것만 같았다.

아까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웃던 얼굴이 생각났다. 임석영은 모두에게 이렇게 다정한 건가. 내게 주는 이 따스함이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섭섭한 마음이 든다.

나를 보며 임석영이 매점에 있는 건 내가 다 사줄게, 하고 말한다.

“안 먹어.”

괜히 투덜거리며 줄을 옮겼다. 안에서 무언가 이상한 게 싹트는 느낌이었다.

점심시간, 남윤수가 심각한 얼굴로 제 식판 위에 있는 도넛을 바라봤다.

“그냥 먹어.”

“나 살쪘어….”

“먹고 운동을 해.”

“운동이라니. 차라리 내게 죽음을 달라.”

꽤나 비장한 어투에 임석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식판을 놓고 앉자마자 신체검사 결과를 공유했다. 검사 결과 남윤수의 키는 179, 김찬영의 키는 175였다. 남윤수는 살이 쪘다며 우울해했고 김찬영은 키가 작년과 같다고 했으나 개의치 않아 했다.

“홍차연, 이거 먹고 키 커라.”

남윤수가 인심 쓴다는 듯 도넛을 내 식판 위에 올렸다. 그리고 마치 제 소중한 아이를 떠나보낸 듯 울상을 지었다.

“잘 가, 도넛아. 홍차연 안에서 평화를 찾아라.”

“이거 먹는다고 키 크겠냐.”

내 말에 김찬영이 고개를 저었다.

“안 커. 살만 찌지.”

촌철살인이네. 무심하게 말을 던진 김찬영이 묵묵히 밥을 먹었다.

젓가락으로 도넛을 쿡 찌르자 임석영이 슬쩍 몸을 붙이고 다가와 속삭였다.

“많이 먹어, 콩알. 무럭무럭 자라서 대박 큰 콩알 되어야지.”

“…….”

대박 큰 콩알? 도넛을 입에 물고 눈을 돌려 임석영을 보았다. 웃는 낯을 보자니 아까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임석영이 원래 웃음이 좀 헤펐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그 웃음을 여기저기 나눈다고 생각하니 쪼잔하게 굴게 됐다. 그냥 뭐랄까, 싫었다.

남윤수와 대화를 하며 웃는 임석영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마음이 모나지지 않았다. 아까는 왜 그랬을까, 이유를 몰랐다.

도넛을 베어 먹으며 눈을 돌리는데 앞에 앉아 있는 김찬영과 눈이 마주쳤다.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표정이 얼었다.

“어….”

꽤 길게 눈이 마주쳤다. 왜 빤히 보는 건지 몰라 입을 떼려는 순간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던 김찬영이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 뭐 묻었나? 손을 올려 뺨을 쓰는데 옆에서 튀어나온 손이 입가를 쓱 문질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자 임석영이 엄지에 묻은 설탕 알갱이를 무심하게 털어낸다.

“다 묻히고 먹냐.”

그리고 놀란 게 나뿐만은 아닌 듯 남윤수가 얼굴을 찌푸린 채,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으로 나와 임석영을 보았다.

“설탕에 입술 박으면 난리 나겠네.”

남윤수가 말했다. 괜한 오해를 받을까 나는 초조한데, 임석영은 대수롭지 않은 듯 뭐래, 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찬영아, 설탕 다 털고 먹어라.”

“어?”

“설탕 다 털고 먹어. 너 그거 입술에 묻히고 먹으면 큰일 난다. 주먹 쥐게 될지도 몰라.”

영문을 모르는 김찬영이 머리를 갸웃하고, 임석영은 웃으며 밥을 먹고, 남윤수는 저 홀로 심각해졌다. 나는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먼 산… 언저리마다…. 그런 가사가 왜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점심을 먹은 뒤 교실로 돌아가자 먼저 돌아온 아이들이 제 구역을 청소하고 있었다. 급하게 양치를 끝내고 청소를 시작했다. 가득 찬 쓰레기봉투를 발로 꾹꾹 눌러 밟아 부피를 줄인 뒤 봉투를 묶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서는데 분리수거함 뒤쪽이 어수선했다. 뭐지. 무슨 일인지 봐볼까, 하다가 학교가 어수선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보면 뭐 하나 싶어 걸음을 돌렸다.

몇 걸음 걸었을까, 슬리퍼 한 짝이 내 앞으로 날아들었다. 탁, 소리를 내며 바닥을 치고 튕겨 나간 슬리퍼를 놀란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위에서 떨어졌나 하며 올려다본 곳에 내다보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었다. 분리수거함 뒤쪽에서 살벌하게 욕지거리가 오고 갔다.

그냥 두고 가면 될 일인데, 무슨 오지랖이 발동했는지 슬리퍼 한 짝을 들고 조심스레 동관 벽에 붙어 모퉁이 너머를 훔쳐봤다.

아이들 서너 명이 담배를 피우며 서 있었고, 바닥에 한 명이 구르고 있었다. 거기에 아는 얼굴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에 입이 벌어졌다.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강은호가 김찬영의 머리통을 세게 후려쳤다.

“도둑놈 새끼야, 까라면 그냥 까는 거지 어디서 눈을 흘겨.”

김찬영이 흙먼지 묻은 교복을 털며 매무새를 정리했다.

“담배 빌려 피운 게 그렇게 꼽냐?”

“아니.”

강은호가 뻑뻑 담배를 빨아댔다. 그러더니 앞에 선 김찬영의 얼굴에 연기를 뱉어내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맛도 더럽게 없다. 내가 저번에 이거 맛없다고 다른 걸로 사서 피우라고 했잖아. 하여튼, 말 더럽게 안 들어.”

연거푸 김찬영 얼굴로 쏟아지는 연기에 내 속이 다 타들어갔다.

저 새끼 뭐야, 진짜. 전생에 남의 나라 약탈하고 다녔을 새끼가 틀림없다. 아, 세상에. 어쩌지.

벽 뒤에서 다리를 덜덜 떨었다. 4 대 1이면 정당한 싸움도 아니고 일방적인 건데, 또 꼴에 김찬영과 밥을 몇 번 먹었다고 가만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보고만 있지 않을 거면 어쩔 건데. 나가서 싸우게? 그럼 이제 4 대 2로 얻어터지는 풍경이 되겠지. 강은호 집에 샌드백 하나 더 놔주는 꼴이 되는 거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어, 기, 김찬영.”

벽 뒤에서 튀어나와 김찬영을 불렀다. 아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힌다. 억, 쓰바, 전부 다 명중이요!

“다, 담임이 지금 오라는데?”

말은 왜 더듬고 그래. 울상이 되려는 걸 눈을 부릅뜨며 막았다.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낸 강은호가 입꼬리를 불쾌하게 올리며 나를 노려본다.

“원래 거슬리던 새끼에 요즘 거슬리는 새끼까지, 아주 지랄의 쌍두마차네.”

바닥에 담배꽁초를 떨어트리고 발로 비벼 끈 강은호가 주먹 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김찬영의 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몇 개비 안 남았더라. 멀쩡하려나 모르겠다.”

탁, 그의 어깨를 무겁게 때린 강은호가 눈을 흘기며 지나갔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나도 모르게 두 손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또 얻어터지는 줄 알았네. 저 새끼 뭐야? 뭔데 저렇게 화가 많아?

고개를 돌려 강은호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후다닥 김찬영에게로 달려갔다.

“야, 괜찮아?”

올려다본 얼굴이 말짱했다. 다행히 얻어터지진 않았나 보다.

시선을 내리자 슬리퍼를 한 짝만 신은 김찬영의 발이 보였다. 강은호에게 뭔가를 뺏겼다는 점에서 어떤 동질감이 생겨났다. 허리를 숙여 김찬영 발 앞에 슬리퍼를 놓았다.

“아니, 나 지나가고 있는데 날아왔더라고. 주인 찾아주려고 했는데, 네가 주인 같네.”

혹여 김찬영이 민망해할까 싶어 말을 주절주절 떠들었다. 김찬영이 말없이 슬리퍼에 발을 꿰어 넣고 눈을 맞춘다.

“너 나랑 다른 반이잖아.”

“어? 응.”

“우리 담임, 너네 담임?”

“어?”

“담임이 불렀다며.”

“아….”

아무도 안 불렀어. 아무도.

누구의 담임인지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이자 어깨를 털던 김찬영이 나를 본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물끄러미 얼굴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린다.

“안 불렀구나.”

“…….”

“오늘 일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김찬영이 빤히 눈을 맞춘다.

비밀인 건가. 이유가 궁금했지만 물어도 말해줄 것 같지 않아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거 유치하긴 한데.”

김찬영이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비밀 지켜.”

피의 맹세 아니고 약속해줘, 정도 되는 건가. 김찬영의 새끼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었다.

“알았어. 말 안 할게.”

김찬영이 먼저 걸음을 뗐다. 혼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나도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갈 생각이 없는 듯 김찬영이 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 걸었다.

뒤에서 바라본 김찬영은 임석영과 다르게 몸이 조금 왜소했다. 김찬영이 앞서 걷는 탓에 그의 행동을 자연스레 눈에 담았다.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더니 쓰레기통에 넣었다.

말없이 김찬영의 뒤를 밟았다. 김찬영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었고 방향이 같았다. 나도 교실로 가는 길이었으니까.

김찬영을 앞서가지도, 옆에 서지도 않은 채 뒤꽁무니를 쫓아가는데 갑자기 위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어? 하고 올려다보는 순간 물이 쏟아졌다. 촤아악, 하는 소리가 시원하게 귀를 때렸다. 질끈 감은 눈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손이 닿은 얼굴도, 얼굴에 닿는 손도 물이 묻어 축축했다.

“허, 이게….”

대체 무슨.

어안이 벙벙했다. 고개를 올리자 양동이를 붙든 채 창밖을 보고 있던 인영이 빠르게 사라졌다. 훅, 밖에 나와 있다가 안으로 사라지는 양동이만 정확하게 보였다. 어떤 개망나니 같은 새끼가 창밖으로 물을 쏟은 것이다.

막 물을 맞았을 때는 당황스러웠는데, 그게 사고가 아니라는 생각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미, 미친. 진짜.”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자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발이 보였다. 내가 아까 주워준 슬리퍼를 신고 있는 발이.

시선을 올리자 나와 같은 모양새로 쫄딱 젖은 김찬영이 보였다.

“당황스럽네.”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김찬영이 말했다.

“네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강은호가 빡 쳤던 거 같은데.”

아, 이게 갑자기 내 탓이 되는 건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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