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정류장에 앉아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임석영이 정류장으로 들어온 건 타야 할 버스가 막 떠난 후였다.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냥 걸어오지. 어차피 버스 갔는데.”
“내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알까? 어?”
정류장 의자에 앉은 임석영이 숨을 골랐다.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내려앉는 게 보였다.
“혹시라도 늦게 왔다고 가버릴까 봐 달렸지.”
하아, 하고 숨을 크게 내뱉더니 벌린 다리 위에 팔을 얹고는 상체를 숙인다.
“내가 설마 그러겠냐.”
더운 열기가 느껴져 손부채질을 해줬다. 임석영의 머리 옆에서 파닥파닥 손바닥을 움직였다.
임석영이 숙이고 있던 상체를 일으켜 정류장에 등을 기댄다. 앞머리를 헤집어 쓸어 넘기더니 나를 본다.
“너는 내가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그냥 가버릴 거 같아.”
파닥파닥 움직이며 부채질하던 손으로 임석영의 이마를 딱, 소리가 나게 때렸다.
“나 그렇게 막무가내 아니거든?”
임석영이 어쭈, 하며 제 이마를 문지른다.
나란히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무슨 게임을 했는지, 남윤수가 얼마나 개망나니처럼 게임을 했는지, 그것 때문에 평소에 욕을 안 하는 김찬영이 작게 시발, 한 것을 임석영이 말해줬다.
그런 이야기를 하던 와중 임석영이 불쑥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까 그 형은 누구야? 꽤 친해 보이던데.”
“어? 아, 재민 오빠?”
“오빠?”
임석영이 반문한다. 그러더니 쿵, 소리가 나게 정류장에 몸을 기대며 투덜거린다.
“우리 형보다 더 듣기 싫네.”
물어볼 때는 언제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임석영이 느슨하게 몸을 빼고 앉은 채 말을 이었다.
“아니, 그래서 친해?”
친하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임석영이 고개를 돌려버린다.
뭐지, 얘?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듯한 임석영의 얼굴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져 시선을 거뒀다.
재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만일의 일을 대비해서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학교 이름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알려줘도 되는 걸까, 망설이며 엄지를 까닥이고 있을 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져 고개를 올렸다. 임석영의 머리가 잽싸게 멀어진다.
“야, 왜 남의 핸드폰을 봐?”
“안 봤어.”
퍽이나 안 봤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재민에게 답장을 적기 위해 키패드를 두드렸다.
“그 형이랑 나보다 더 친해?”
임석영이 그렇게 물은 건 학교 이름을 적은 메시지의 전송 버튼을 누른 직후였다. 대화창으로 올라간 말풍선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너보다 더 오래 알고 지내긴 했지.”
“오래 알고 지내면 친한 거야? 시간으로 따져봐.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붙어 지내잖아. 기간이 아니고 시간으로 따지면 내가 더 길걸? 그럼 나랑 더 친한 거 아니야?”
“그런데 왜 물어.”
“어?”
“알면서 왜 묻냐고.”
“…….”
임석영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었다. 귓바퀴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시선을 돌리고 저 혼자 뺨을 문지르더니 툭, 제 발로 내 운동화를 쳤다.
“말로 해봐. 몰라서 물은 거니까.”
“뭐를?”
“방금 그거.”
눈썹을 찌푸리자 임석영이 말한다.
“그 형보다 내가 더 친하다고 말로 해보라고.”
잠시 적막해진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버스가 들어왔다. 검지를 머리 옆에 두고 빙글빙글 돌린 뒤 의자에서 일어나자, 임석영이 어? 왜 부정하지? 어? 하며 따라왔다.
임석영의 말을 무시한 채 버스 카드를 꺼냈다. 카드를 찍고 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임석영이 제 말을 따라 할 것을 강요했으나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빈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버스가 출발하고 집으로 가는 풍경이 길게 이어진 그림처럼 지나갔다. 엠피스리도 없이 집에 가는 길이 조용하지 않은 게 퍽 마음에 든다.
한 그루, 두 그루,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를 보며 입술을 꾹 문 채 웃음을 참았다.
*
자습 시간, 임석영이 책상을 붙여 왔다. 야, 저리 가줄래? 하고 말했지만 듣는 척도 안 했다.
책상을 붙이기에 조잘조잘 떠들며 놀 줄 알았는데, 임석영은 근현대사 책을 펴더니 연도와 사건을 달달달 외웠다.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사각사각, 책에 밑줄을 긋고 노트에 내용을 요약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하게 턱을 괴고 책을 보는 모습이 왠지 낯설다.
임석영의 첫인상은 정말이지 양아치, 딱 그거였는데. 나름 반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고 누구를 딱히 괴롭히지도 않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게 가장 놀라웠다. 나는 이게 선입견이라는 걸 알면서도 잘 정리된 임석영의 노트를 볼 때면 생소한 기분이 들어 괜히 팔을 쓸었다.
임석영이 옆에서 한 마디 말도 없이 공부에 집중하는 바람에 멍하니 책상만 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대충 손에 잡히는 책과 노트를 펴고 필사했다. 그러다 금방 심심해져서 엠피스리를 꺼냈다. 이어폰 두 쪽을 귀에 꽂고 음악을 재생했다.
[look forward to ~를 기대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필사를 하는데 음악이 너무 신났다. 이지연의 ‘바람아 멈추어다오’가 재생됐다. 자연스레 고개가 박자를 탄다. 좌로 우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움직였다.
콧노래가 나오려는 걸 여긴 교실이야, 교실이라고, 입 열면 안 돼, 하고 세뇌하며 막았다.
다음 곡으로 이지연의 ‘난 사랑을 아직 몰라’가 나왔다. 탁, 하고 책상을 쳤다. 이거 정말 명곡이지.
음, 음, 하는 소리를 죽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몸속 어떤 장기에 금영 노래방이 설치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노래를 들을 때마다 따라 부르지 못하면 몸이 근질거릴 수가 있단 말인가.
숙어를 필사하던 노트에 노래 가사를 줄줄 적어나갔다.
[나는 사랑을 아직 몰라 조금 더 기다려 진짜 사랑한다면 조금 더 참아주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연필을 빙글 돌리는데 손가락에서 비껴 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손으로 책상을 잡고 허리를 숙여 팔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연필을 내 쪽으로 툭 쳐서 굴리는데 책상 위에 두었던 손이 쭉 미끄러진다.
연필을 잡은 동시에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손이 미끄러진 줄 알았는데 노트가 밀려나간 거였다. 내 노트가 임석영 책상으로 아슬아슬하게 넘어가 있다.
턱을 괸 임석영이 빤히 노트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표정 없이 노트를 보던 얼굴이 일순 굳는다. 갑자기 노트를 밀어 제 책상을 침범하고 공부를 방해한 게 그렇게 못마땅한가.
손을 뻗어 노트를 가져왔다. 한 장 뒤로 넘겨 다시 숙어를 필사했다. 슥슥 연필을 움직이는데 임석영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야, 나도 몰라.”
낮고 작은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임석영이 턱을 괸 자세 그대로 나를 보고 있었다. 책상을 붙여 앉은 탓에 거리가 가깝다. 몸을 슬쩍 뒤로 빼려다 말고 가만 눈을 맞췄다.
뜬금없이 뭐라고 하는 거지. 말없이 보고만 있자 임석영이 곤란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네가 나는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 같아서.”
뭔 소리래.
끔벅끔벅, 말없이 임석영의 얼굴을 보다가 책상 위를 보았다. 임석영의 책상으로 넘어갔다가 돌아온 노트에 휘갈겨 적은 숙어가 보였다.
내가 이거 뭐냐고 물어본 줄 아는 건가. 아닌데.
“아…. 열심히 하길래 다 아는 줄 알았지.”
그런 거 아닌데, 라고 답하면 됐는데, 임석영에게 너 공부 열심히 하는 거 내가 안다, 뭐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싶어서 대충 둘러댔다. 둘러댄 말에 임석영의 입이 벌어진다.
“열심히? 내가 열심히 했다고?”
어이없다는 듯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친다. 그냥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닌데, 라고 답할걸. 바로 후회했다. 어, 하고 말을 끌다가 아니, 내 말은, 하고 입을 떼는데 임석영이 말을 채 간다.
“나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어?”
“시작도 안 했다고.”
아, 그러냐. 주말에도 도서관 가서 공부하더니, 시작도 안 한 거였냐.
교실 창으로 쏟아진 햇빛이 임석영의 머리 위에 걸린다.
언제 흥분했냐는 듯 차분해진 임석영이 손에 쥔 연필 뒷부분으로 내 이마를 쿡 찔렀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찌푸리며 이마를 쓸었다.
“참는다, 내가.”
허?
내가 뭘 잘못했다고 네가 참기를 참아.
이마를 문지르며 쏘아보자 임석영이 연필 뒷부분이 아닌 심으로 손등을 쿡 찌른다.
“아!”
이번엔 좀 더 큰 소리가 새어 나갔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손등을 문질렀다. 연필이라 짙진 않았지만 그래도 자국이 남았다.
“죽을래?”
“점찍은 거야.”
“뭔, 진짜.”
“침 바를 순 없으니까.”
침을 왜 발라. 더러운 소리를 하고 있네. 자국이 난 곳을 문지르며 입을 내밀었다.
어떻게 된 게 오른팔 셔틀이 끝났는데도 임석영의 굴레에서 못 벗어나는 느낌이다. 놀리면 재밌나.
“괴롭히지 마.”
“안 괴로우면서.”
이 새끼, 이거 진짜, 말 따박따박 다 받지?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보자 임석영이 피식 웃는다. 그 웃음이 괜히 비웃음처럼 보여 홱 고개를 돌렸다.
[look forward to]
책에 있는 숙어를 베껴 썼다. 불쑥 옆에서 임석영의 손이 튀어나왔다. 왼손으로 연필을 쥐고 내 노트에 뭔가를 적었다. 온점을 눌러 찍는 것을 끝으로 임석영의 손이 물러갔다.
쪽지를 주고받을 때처럼 내가 무슨 답을 적기를 기다릴 줄 알았는데, 제 앞에 있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숙이고 임석영이 남긴 흔적을 보았다. 내가 적은 숙어 앞뒤로 뭔가가 덧붙여져 있었다.
[I’m looking forward to the day when you realize your love]
알파벳 수가 많아지자 속이 울렁거렸다. 아, 세상에. 저는 영어가 싫어요.
곁눈질로 임석영을 보았다. 턱을 괴고 밑줄을 쭉쭉 그으며 책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뭔데 내 노트에 낙서하고 가냐고. 눈을 돌려 다시 노트를 보았다. 하얀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자로다. 나는… 기대한다…. 거기까지 해석하는 순간 끝종이 울렸다. 타이밍 봐라.
잽싸게 노트를 덮고 책상을 정리했다. 후다닥 교실을 나갔다. 다행히도 교실을 뛰어나가는 나를 임석영이 붙잡지는 않았다.
4층 화장실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 복도 창가에 기대서 있는 임석영과 남윤수, 김찬영이 보였다. 왜 남윤수와 김찬영 교실은 계단 앞에 있어서, 지나쳐야 하는 관문이 되는 것인가.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려는데 임석영이 쿵, 하고 창문에 머리를 박았다. 그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눈을 흘긋 돌렸다.
“아….”
임석영이 괴로운 신음을 흘리고.
“이 새끼가 자꾸 왜 이래.”
“괴롭다….”
“찬영아, 나 얘 조금 무서워지려고 해.”
제가 하는 말에 헛소리만 해대는 임석영을 손가락질하며 남윤수가 말했다.
쿵, 임석영이 다시 창문에 머리를 박는다. 느리게 고개를 돌리더니 남윤수를 보고 묻는다.
“나 정도면 괜찮지 않냐?”
그 소리에 남윤수가 얼굴을 찌푸린다.
“갑자기?”
“늘 괜찮았던 거 같은데.”
“너 뭐 누구한테 고백이라도 받았냐?”
“고백을 받은 게 아니라 한 거 같은데.”
남윤수의 말에 핸드폰 게임을 하는 듯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던 김찬영이 무심하게 답했다.
“헐? 진짜로? 야, 너 좋아하는 사람 있었어?”
남윤수가 짝, 소리가 나게 임석영의 등을 때렸다.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던 임석영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다.
“야, 너 희진이지! 뭣도 없는 네 인스타에 게시물 올라올 때마다 댓글 다는 게 이상하다 했어!”
“너 막 사람 때리네? 어?”
임석영이 장난스럽게 남윤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간지러운지 남윤수가 자지러지게 웃으며 희진이, 끅, 악, 희진이 맞네, 꺅, 하고 방정맞은 소리를 흘렸다.
내가 이걸 왜 계속 보고 있지, 생각이 드는 순간 김찬영과 눈이 마주쳤다. 핸드폰을 두 손에 든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
김찬영의 입이 벌어졌다. 순간 나도 모르게 벽 뒤로 숨어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왜 피했지, 모양새가 이상하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석영이 고백을 했다고? 학교를 오가며 최근 자주 붙어 다닌 탓에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다. 더군다나, 요즘 들어 툭툭 이상한 말을 뱉어서 사람을 심란하게 만들더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교실로 돌아가는 길,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뭐지.
천 원만 넣으려고 생각했던 헌금 봉투에 모르고 5천 원을 넣은 기분이랄까.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움 같은 거.
마지막에 먹으려고 일부러 남겨뒀던 김밥 꽁다리를 다른 애가 와서 날름 먹어버렸을 때의 짜증 같은 것도.
아닌가. 그게 아닌 건가.
마음이 알 수 없이 낮게 꺼지고 복잡해졌다. 뭔가 조금 수틀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