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21화 (21/70)

제21화

아이들을 등지고 후다닥 재민에게로 달려갔다. 재민을 바라보며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내 이름 부르지 마! 부르지 마! 하는 신호였다.

“엇, 안녕하십니까. 차연이 형님 되십니까? 저희는 차연이 친구들입니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남윤수가 꾸벅 재민을 향해 인사를 했다.

재민이 아이들을 보다가 눈을 내려 나를 보았다. 얼굴을 보더니 입고 있는 교복을 훑는다. 그러다 그의 눈이 명찰에 고정된다. 마주 본 재민의 얼굴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제발, 하는 심정으로 울상을 지어 보였다. 재민이 상체를 낮게 숙이고 귓속말을 했다.

“너 지금 위험한 상황인 거야? 쟤들 모르는 애들이야?”

입술을 말아 물고 고개를 작게 저었다. 재민의 옷자락을 잡았다. 제발, 제발 아무런 말도 하지 마, 그런 신호였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가만히 보고만 있던 재민이 뒤늦게 미소 지으며 아이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와, 그런데 차연이랑 하나도 안 닮았네요. 형님한테 유전자가 몰빵 됐나 봐요.”

“아, 저는 그냥 친한… 형이에요.”

형이라는 단어가 영 어색한지 재민의 입에서 뒷말이 작게 새어 나온다.

검은색 티셔츠에 체크무늬 재킷을 입은 재민의 손목에 꽤 비싼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남윤수의 시선이 시계로 향하더니 오, 하고 입을 벌리며 나를 봤다. 너 되게 돈 많은 형을 두었구나, 그런 표정이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더 방정맞게 느껴진다.

재민이 내 어깨 위에 손을 얹더니 앞에 선 세 명의 얼굴을 쭉 살펴본다.

“아, 그런데 다 같이 어디 가요?”

“아, 피시방이요. 시험 끝난 기념으로 가는 겁니다.”

“아… 너도 가?”

재민이 눈을 내려 나를 본다. 여전히 어깨 위에 손을 둔 채였다.

“가는 길이긴 했는데, 어….”

뒷말을 흐리자 재민이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하며 싱긋 웃는다. 그 웃음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시간 좀 내줘.”

부드러운 목소리에 왜 노기가 어린 것만 같은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아, 나는 먼저 갈게.”

“왜? 피시방 안 가?”

남윤수의 눈이 휘어 내려갔다. 다 같이 가지 못하게 되자 못내 아쉬운 기색이었다.

“응. 나는 형이랑 어디 좀….”

임석영이 의아한 얼굴로 나와 재민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러곤 뭔가 복잡한 얼굴을 했다.

“형이라고?”

임석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혀엉?”

믿을 수 없다는 듯 임석영이 말을 늘린다. 눈치껏 넘어가주지, 그걸 꼭 저렇게 걸고넘어지지.

“어. 우리 형이야. 피는 안 나눴지만 친형이나 다름없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나보다 키가 큰 재민의 어깨에 팔을 올리자 임석영의 얼굴이 영 못마땅하게 굳는다.

“우리 형씩이나?”

그러곤 빈정대는 듯 말꼬리를 올린다. 초면인 사람을 앞에 두고 건방지게 구는 임석영을 김찬영과 남윤수가 이상하게 쳐다봤다.

“왜 그래, 새끼야.”

눈치를 보던 남윤수가 눈을 모나게 뜨고 있는 임석영의 옆구리를 툭 쳤다.

“나랑 같이 안 갈 거야?”

재민의 옆에 서 있는 나를 보며 임석영이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재민이 어깨에 팔을 두르며 꽉 붙든다.

“아무래도 친구들끼리 가야 할 것 같은데요.”

임석영의 시선이 재민에게로 향한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꽃이 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우리끼리 가자.”

조용히 지켜보던 김찬영이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뗐다. 남윤수가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형님, 안녕히 가세요. 차연아, 내일 보자.”

인사를 하지도 시선을 거두지도 않는 임석영의 팔을 남윤수가 잡아끌었다. 가만 서서 인상을 쓰고 있던 임석영이 입을 댓 발 내밀고는 돌아섰다.

어색하게 재민과 발을 맞춰 걸었다. 모퉁이를 돌아서고 잽싸게 재민과 떨어졌다. 사과가 반으로 갈라지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아, 식은땀 났네. 진짜.

두 손으로 머리를 싹 빗어 넘기는데 재민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에 의문이 가득한 것이, 아마도 해명이 필요한 듯했다.

“누리야.”

“…엉?”

“설명이 필요하지 않아?”

재민은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늘 자상하고 신경질 한번 부린 적이 없는데, 가끔 이렇게 냉랭한 표정으로 나를 취조할 때가 있었다. 아마도 내 사정을 다 알고 있어서, 걱정되어 그러는 것이리라.

“말해봐. 내가 왜 오빠에서 형이 된 건데?”

“…….”

“할머니께 여쭤볼까?”

그리고 그걸 늘 아이템처럼 이렇게 써먹곤 했다. 할머니 카드. 만능 카드. 할머니한테 말한다? 라고 하면 술술 모든 비밀을 털어놓게 되는 마법의 주문.

“듣고 화내지 마.”

그 말에 흠칫, 재민의 얼굴이 굳는 것 같았으나, 바로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언제 화내는 거 봤어?”

재민과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갔다. 구석진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홍차연의 오토바이 사고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러곤 10분 후.

“누리야, 너 미쳤어?!”

재민이 불같이 화를 냈다. 화 안 낸다며…. 고함을 잘만 지르네.

“아무리 그 집에서 부탁해도 그렇지.”

“…….”

“너 그거 얼마나 위험한 줄은 알아? 위장 전학도 전학인데, 여자애가 남장을 하고 남고라니!”

눈동자를 도르르 굴려 주변을 살폈다. 학교 근처이니 혹시 아는 얼굴이 있을까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교복을 입은 아이들은 없었다.

비밀을 털어놓은 건데, 아주 동네방네 소문 낼 일 있나. 목소리가 너무 크다. 재민을 보며 주의를 줬다.

“목소리 좀 줄여.”

허, 하고 한숨을 뱉은 재민이 이마를 짚는다. 괜히 말했나.

“그 아줌마 정말 나쁘다. 남학생 득실대는 곳에 너를 보내고.”

“뭐, 사모님은 제안만 하고 내가 수락한 건데.”

“그래도….”

“걱정하지 마. 조용히 다녀서 들킬 일은 없어. 오래 다니는 것도 아니고.”

“아까 그 아이들은? 같은 반 애들이야?”

“어? 아, 응.”

“학교 끝나고 매번 이렇게 같이 다녀?”

“아, 그건 아닌데.”

긴 한숨이 재민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재민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데, 이걸 할머니가 아는 순간 한숨으로 돌풍을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리야, 그러다 진짜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게 될 거야.”

“어?”

“아무와도 친하게 지내지 마. 말도 섞지 말고.”

그렇게까지?

정작 말을 뱉은 사람은 태연하게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혹시라도 학교에서 다른 애들이 막 괴롭히거나 치근대면, 무조건 나한테 말해.”

“어, 뭐….”

이미 괴롭힘을 당하기는 했지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자 재민이 나보다 더 답답한 심정이라는 듯 한숨을 길게 뱉었다.

“오빠, 한숨 그만 쉬어. 괜찮으니까.”

걱정을 덜어주고자 씩 웃었다. 그 웃음에 재민이 작게 미소 지었다.

입에 문 빨대에서 소리가 났다. 긴장한 탓에 연신 빨대를 빨았더니 음료가 동났다. 의자 팔걸이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재민이 하나 더 마실래? 하고 물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 후 재민이 음료를 들고 돌아왔다. 휘핑크림이 크게 올라간 자바칩 프라푸치노다.

“잘 마실게용.”

재민의 걱정을 덜어주고자 말꼬리를 귀엽게 뭉갰다. 되지도 않는 애교였지만 가끔 재민에게 먹혀들 때가 있었다. 역시나, 재민이 입술을 늘여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카톡.

카톡.

카, 카, 카톡.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뭐지, 갑자기 쏟아지는 이 카톡 폭탄은. 급하게 핸드폰을 진동으로 바꾸고 내용을 확인했다.

[ㅇㄷ?]

[ㅇㄷㅇㄷ]

[ㅇ]

[ㄷ]

[ㅇ]

모두 임석영이 보낸 거였다. 내가 확인한 걸 알았는지 이응을 끝으로 대화창이 잠잠했다. 모음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전부 자음뿐이다.

추측하건대 어디? 어디어디? 어디야? 하고 묻는 것 같다. 테이블 아래로 핸드폰을 내리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ㅅㅂ]

고개를 들자 재민이 나를 물끄러미 건너다보고 있었다. 소리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누군데?”

“어? 아, 같은 반 친구.”

“아까 걔들?”

어, 하고 목을 울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낀 재민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맑은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재민의 전화였다. 팔짱을 푼 재민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응. 도착했어?”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나를 발견했다고 했다. 아마 지금 온 전화가 만나기로 한 사람인 듯하다. 미안하다는 말과 금방 간다는 말을 서너 번 뱉은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낸 재민이 난감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너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빈 의자에 내려두었던 가방을 챙겨 들며 손을 저었다.

“됐어. 내가 무슨 애야? 집에 충분히 혼자 갈 수 있어.”

다 마신 컵을 정리하고 트레이를 들자, 자리에서 일어난 재민이 트레이를 뺏어 들며 미소 지었다.

문 앞에 서서 재민을 기다리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알았다….]

임석영이 답지 않게 말줄임표를 썼다. 의기소침해 보이는 게 이상할 정도다.

트레이를 반납한 재민이 돌아왔다. 유리문을 열고 카페를 나섰다. 큰길로 나와 걸음을 멈추고는 마주 보고 섰다. 인사를 하고 헤어질 차례였다.

“가, 오빠.”

“응. 누리야, 진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말해야 돼. 알았지?”

“할게. 꼭 할게.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아까도 쉴 새 없이 뱉던 한숨을 재민이 다시 한 번 더 뱉는다.

나보다 키가 큰 재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정말로 걱정할 것 없다는 뜻이었다. 재민이 엷게 웃은 뒤 걸음을 돌렸다.

아이고야, 힘 다 빠졌네.

온몸의 힘이 다 털린 느낌이었다. 비밀 하나 털어놨을 뿐인데, 이 정도의 에너지를 소모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재민이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정류장을 향해 걷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아까 알았다는 임석영의 메시지에는 답장을 안 보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네]

[나도 상처 받거든]

[나한테 좀 잘해주면 안 되냐]

[김누리 나빠]

“잉?”

연달아 네 개나 들어온 메시지 내용이 도통 이해가 안 됐다. 어디냐고 물어서 대답해 줬는데, 내가 뭘 잘못했나. 임석영이 모음을 다 날려 먹었기에 똑같이 날렸는데.

[뭔 소리야?]

답장을 바로 확인했는지 곧바로 말풍선이 올라왔다.

[알려주기 싫으면 싫다고 하지 왜 욕을 하고 그래]

[욕쟁이]

[욕쟁이 김누리]

욕쟁이라니. 주고받은 메시지를 슥슥 위로 올려봤다. 자음이 난무하는 곳에서 픽 웃음이 터졌다.

[바보야 스벅이라고ㅋㅋ]

바로 메시지 옆에 달린 1이 사라졌다. 임석영이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는 거였다.

메시지를 총알 쏘듯 보낼 때는 언제고 대화창이 조용했다. 내가 보낸 메시지가 마지막으로 남은 대화창을 응시했다. 말풍선 하나가 위로 올라온다.

[ㅅㅌㅂㅅ라고 했어야지….]

[그래서 피는 안 나눴지만 친형이나 다름없는 우리 형이랑 뭐 하는데?]

길을 걸으며 답장을 적어 보냈다.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이야]

전송하자마자 임석영이 메시지를 읽었다. 그러곤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어, 왜?”

― 어디야? 버스 탔어?

“아니. 아직.”

― 그럼 기다려. 같이 가자.

“지금? 너 게임 하는 거 아니야?”

옆에서 시끄럽게 남윤수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뭔가가 터지고 깨지는 소리도 함께였다.

― 아, 임석영! 시바! 갑자기 마우스를 놓으면 어떻게 하냐고!

수화기 너머로 선명하게 넘어온 목소리는 남윤수의 것이었다.

“야, 그냥 게임 해.”

― 아니야. 재미도 없어. 정류장에서 기다려. 버스 왔다고 타고 가면 안 돼. 금방 갈게.

뚝, 전화가 끊어졌다. 혼자 가도 되는데, 하는 말을 입에 머금고 있었는데 뱉지 못했다. 입술을 이로 잘근 씹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개를 들었다. 길을 찾기 위해 들어 올린 시야에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들어왔다. 갑작스레 마주한 웃는 낯이 너무 낯설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임석영 때문에 웃고 있는 건가.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혼자 민망해져 웃음기를 지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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