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19화 (19/70)

제19화

임석영의 체육복 상의를 빨래했다. 비누 향 폴폴 나던 임석영의 체육복에 향기 없이 물 냄새만 날까 싶어 인심 써서 섬유유연제도 팍팍 넣어 헹궜다.

목이 늘어나지 않게 조심스레 옷걸이를 넣은 뒤 건조대에 걸었다. 한 걸음 물러나 건조대에 걸린 체육복 상의를 보았다.

상의를 보고 있자니 뜬금없이 상의를 탈의하고 들어왔던 임석영의 몸뚱이가 떠오른다.

뭐야, 내 머리에서 꺼져!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으면 저을수록 복근이 왜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정신 차리라는 듯 이마를 탁탁 때렸다.

햇빛에 바짝 마르라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 방충망을 밀어내고 난간에 기대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파트 단지 내에 벚나무가 줄줄이 심어져 있어 내려다본 바닥이 온통 분홍빛이었다. 선선하게 불어와 피부에 스며드는 바람이 좋다.

“좋구만.”

쏟아지는 햇살, 불어오는 바람. 그 모든 게 기분이 좋아 난간에 팔을 올리고 턱을 댔다.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풍경을 눈에 담는데 낯익은 형체가 풍경 속을 걷고 있었다.

“임석영?”

주말인데 가방을 메고 한 팔 안에 두툼한 책을 안고 가는 모양새가 공부하러 독서실이나 학원에 가는 듯했다.

턱으로 손등을 꾹꾹 누르며 길을 가로지르는 임석영을 보았다.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에 검은색 후드 티를 입은 모양새가 꽃길을 걷는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부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들으면 듣는 거고 말면 마는 거다 싶은 마음으로 불러봤다.

“야, 임석영.”

그렇게 크게 소리를 내지른 것도 아닌데 길을 걷던 임석영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올렸다.

막상 부르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없다. 어디 가냐고 물을까? 공부하러 가는 거 같은데. 그럼 공부하러 가냐고 물을까? 별로 안 궁금한데. 왜 불렀을까, 도대체.

입을 다문 채 손을 흔들었다. 안녕이라는 뜻이기도 했고 잘 가라는 인사이기도 했다. 만남과 동시에 이별이 이런 것인가.

임석영이 손을 들더니 콕, 콕, 콕, 허공을 찍었다. 흔들던 손을 내리고 가만 보았다. 허공을 찍은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며 멈췄다.

뭐지. 손을 내린 임석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내려와.”

“어?”

“내려오라고.”

나 머리도 안 감았는데.

“싫은데?”

가만 멈춰 서서 나를 올려다보던 임석영이 걸음을 옮겼다. 바로 아래에 있는 캐노피로 모습을 감추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세대 호출음이 울린다.

헐? 후다닥 거실로 가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으로 보이는 거라곤 ‘영어 독해’ 네 글자였다.

“뭐야.”

― 층수 다 셌다.

“…….”

― 내려오세요.

처음부터 느낀 거지만, 이 새끼는 명령조가 입에 붙었어.

대충 후드를 올려 쓰고 집을 나섰다. 1층을 누르고 후드 끈을 꽉 조여 묶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밖에 서 있는 임석영이 보인다. 자동문이 열리고 슬리퍼를 찍찍 끌며 발을 옮겼다. 임석영이 내게 줬던 그 슬리퍼다.

“왜.”

임석영 앞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물었다. 고개를 숙인 임석영이 뒤꿈치 뒤로 여백이 낙낙한 슬리퍼를 보더니 픽 웃는다.

“왜 웃냐.”

뚱한 얼굴로 묻자 임석영이 입술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이더니 웃는 낯을 하고 눈을 맞춘다.

“미치겠다, 진짜.”

“뭐가?”

자기가 줬던 슬리퍼를 신고 있는 게 웃긴 건가. 네가 돌려주면 죽는다고 그래서 내가 꾸역꾸역 신는 건데.

“그냥. 내 이름 써져 있어서.”

고개를 숙이고 슬리퍼를 보았다. 삼선 흰색 부분에 임석영 이름 세 글자가 써져 있다.

“그게 웃겨? 너 보면 이상한 데서 혼자 터지더라. 웃음도 많다.”

신기하다는 듯 말하자 임석영이 서서히 웃음기를 지운다.

“그럼 웃기지를 말든가.”

임석영이 손으로 이마를 쭉 밀어냈다. 고개가 뒤로 밀려났다가 돌아왔다. 뭐지? 미간을 찌푸리자 임석영이 후드를 올려 쓰며 시선을 돌린다.

“도서관 가는 길인데. 같이 갈래?”

도서관? 도서관이면 공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험공부 안 해?”

두 손을 후드 티 주머니에 집어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중간고사잖아.”

“내 성적도 아닌데, 뭐.”

“야, 그건 좀 잔인하다.”

“…아무튼, 공부 안 해도 돼. 그리고 내가 홍차연도 아닌데 시험을 잘 보면 그게 더 문제지. 전교 꼴등이 내 목표야.”

사모님도 하지 말라고 했고. 그리고 어차피 한 거나 안 한 거나 그게 그거다. 중학교 때 코피 흘려가며 밤도 새워봤지만, 대박은 없었다.

“그럼 너 오늘 뭐 하는데?”

“그냥 뒹굴거리다가 오후 되면 알바 가야지.”

임석영이 음, 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목표도 있는 놈이 왜 공부를 안 해? 너 이래가지고 전교 꼴등 하겠냐?”

“왜 못 해? 당연히 하지!”

“한 번호로 다 찍어도 그중에 몇 문제는 맞잖아. 너 운 좋아서 점수 잘 나오면 공부한 애들 서러워서 어떡해.”

“에이, 설마.”

“그렇게 되면 내가 학교에 대자보 붙이고 시위 좀 해도 될까?”

이 새끼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임석영이 허공을 턱짓한다.

“가방 챙겨서 나와. 공부를 해야 정답을 피해 가지. 그래야 네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거야. 전교 꼴등 희망자야.”

입술을 휘어 내리고 임석영을 보았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네가 홍차연도 아닌데 시험을 잘 보면 문제잖아?”

방금 내가 했던 말을 임석영이 그대로 되돌려줬다. 도망갈 구멍이 차단됐다. 아, 진짜. 입을 댓 발 내밀고 변명을 생각해 보다가 떠오르는 게 없어 걸음을 돌렸다.

“어디 가?”

“가방 챙기러 간다!”

빽 내지른 소리에 임석영이 피식 웃는다.

“알바 가기 전까지만 할 거야.”

“그건 뭐 너 알아서 하고.”

자동문이 열렸다. 발에 맞지 않는 슬리퍼를 끌며 돌아보자 임석영이 캐노피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작게 웃었다. 저 웃음은 가식이다. 나를 놀리는 게 재미있는 거야.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화를 억눌렀다.

투덜거리며 집에 들어와 씻었다. 숙제가 있어서 챙겨 온 교과서와 필통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대충 옷을 챙겨 입고 내려가자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 임석영이 보였다.

임석영이 무표정하게 나를 보더니 진짜로 가방을 챙겨 나온 내가 웃긴지 입술을 늘인다. 얄미워 죽겠네.

걸음을 떼는 임석영을 한번 쏘아보고는 쿵쿵거리며 앞서 걸었다. 뒤따라오던 임석영이 어딘 줄 알고는 가? 하고 물었다.

“몰라. 아파트 밖에 있을 거 아니야.”

단순한 답에 뒤에서 또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는 왜 웃기지도 않는데 웃어. 정문까지 혼자서 열심히 걸었다. 정문까지만.

여기서부터는 길을 몰라 가만 서 있다가 뒤따라온 임석영 옆에 붙어서 갔다. 그런데 임석영이 자꾸 길을 모르는 나를 놀렸다.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가다가 직진하고, 직진하는 것처럼 가다가 골목을 돌았다.

“아, 너 진짜 죽는다. 제대로 안 가냐?”

내 말에 임석영이 아, 알았어, 안 그럴게, 하며 웃었다.

임석영이 횡단보도 앞에 섰다. 옆에 가만히 서 있다가 불이 바뀌어서 건너가려는데 임석영이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직진했다. 몇 발자국 횡단보도를 밟고 나가다가 임석영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야!”

그러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 임석영이 배를 잡고 웃었다. 진짜, 저 새끼가.

임석영에게 달려가 멱살이라도 잡을까 어쩔까 생각하다가 팔뚝을 때렸다.

“너 진짜 자꾸 길 이딴 식으로 갈래?”

뭐가 그렇게 웃긴지 임석영이 눈물까지 글썽였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더니 내가 때린 팔뚝을 쓸며 아파, 한다.

아프긴 개뿔.

“너 도서관 가서 공부하자는 거 장난이지? 어? 이렇게 나 놀려 먹으려고. 진짜.”

“아니야. 나도 길을 잘 몰라서 그랬어.”

“아, 나 안 가. 안 갈래.”

홱 걸음을 돌리자 임석영이 팔을 잡았다. 인상을 쓰고 돌아보자 웃는 낯으로 옆에 있는 표지판을 가리켰다. 도서관까지 50m 남았다는 문구가 보였다.

“다 왔는데.”

임석영이 손목을 당긴다.

“안 가면 안 되지. 어떻게 온 길인데.”

임석영에게 잡힌 팔을 뒤로 빼고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아무래도 알이 큰 반지를 네 개 정도 사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오늘처럼 임석영 팔뚝에 주먹을 날릴 일이 있을 때 타격감을 더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도서관 안은 세상의 모든 소음이 죽은 듯 조용했다. 창가 앞자리에 임석영과 마주 보고 앉았다. 창문 너머로 만개한 벚나무가 보인다.

챙겨 온 교과서를 꺼내고 내용을 달달 암기했다. 팔랑팔랑, 앞에서 임석영이 책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눈동자를 올렸다. 턱을 괸 임석영이 손에 든 연필을 빙글 돌렸다. 책을 보느라 내리깐 눈꺼풀이 눈동자를 반쯤 가렸다. 답지 않게 집중한 모습이 퍽 낯설다.

시선을 창문으로 돌렸다. 임석영 어깨 너머로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벚꽃 잎이 우수수 흩날렸다.

예쁘다.

봄의 풍경이 아름다웠다. 정적 속에서 바라본 탓에 더 진득하게 느껴진 건지도 모른다.

두 손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그 풍경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꽃잎이 흩날리는 풍경에 괜스레 마음이 동했다. 이 순간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되도 않는 공부를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턱을 괴고 책을 보던 임석영이 고개를 들었다. 바로 눈이 마주친다.

턱을 괸 임석영이 포스트잇을 끌어와 글씨를 끄적거리더니 한 장을 떼어내 내 교과서에 붙였다.

[내 얼굴 그만 봐]

뭔 소리야. 창밖 보고 있었는데.

임석영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너 안 봤다. 그런 뜻이었는데 임석영이 제 앞에 있는 책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린다. 그러더니 작게 속삭였다.

“공부하러 왔잖아, 우리.”

뭐라는 거야, 진짜. 너 안 봤다니까.

“야.”

너무 황당해서 목소리를 뱉자 임석영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쉿, 한다. 그러곤 도서관 내부를 눈짓한다. 저는 할 말 다 해놓고 나보고는 조용히 하래.

허, 하자 임석영이 고개를 숙인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연필을 꼭 쥐고 임석영의 머리통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앞에 있는 문장을 훑다가 너무 억울해서 입술을 잘근 씹었다.

*

딸랑, 방울 소리와 함께 탁수반점에 입장했다.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에 철가방을 내려놓고 후다닥 달려 수화기를 들었다.

“네! 사랑과 정성을 담아 탁수반점입니다.”

이 멘트는 탁수 사장님의 고정 멘트로 그냥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았다가는 춘장이 묻은 국자가 무기가 되기 십상이었다.

― 짬뽕 주문하려고 하는데요. 한 그릇도 돼요?

“네. 가능합니다.”

― 아, 전화받는 본인이 배달해 줍니까?

불길한 예감이 든다. 꼭 외로운 꼰대들이 대화할 사람은 없고 대화는 하고 싶을 때 주문과 상관없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는 했다.

예전에는 자장면이 천오백 원이었는데. 그런 시절이 있었단 말이야, 천오백 원에 자장면 먹는 시절이. 자장면에 완두콩이랑 채 썬 오이를 꼭 올려줬어. 그게 얼마나 아삭아삭하고 맛있는지 몰라.

대체 어쩌라고 그런 소리를 탁수반점에 전화해서 하는지.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긴 말을 모조리 반말로 한다는 거였다.

짜고 치기라도 했나. 다들 누가 전화를 받는 줄 알고 그렇게 말들이 짧은지. 어이가 없어도 네네, 해야 하는 게 알바생의 운명이었다. 뭐, 그건 탁수 사장님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런데 지금 전화를 건 이놈은 목소리도 새파랗게 젊은데?

“네. 그렇습니다.”

누가 가도 알 게 뭐야. 전화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할 텐데.

― 아, 그럼 짬뽕 하나 주세요.

“네, 주소가?”

― 아, 여기가….

남자가 줄줄 주소를 외웠다. 메모를 하다가 멈칫했다. 몇 시간 전까지 내가 있었던 도서관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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