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이건 거의 사육이다.
임석영과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거실에 앉아 빈둥거리다가 진짜 자고 가고 싶지 않으면 도와주는 게 좋을 거라는 임석영의 말에 자료를 조사하고 정리하기를 한 시간, 임석영이 마우스를 놓고 부엌으로 가더니 과도를 들었다.
먹어, 라는 짧은 말과 함께 과일을 깎아 줬다. 과일을 먹고 또 자료 정리하고 분석하기를 몇 시간, 과자를 주고 주스를 주고 빵을 줬다.
저 부엌 뭐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언가가 계속 나왔다. 그런데 난 또 그걸 다 잘 받아먹었다. 도저히 안 먹고 배길 수 없는 것들만 줬다.
그러다 보니 해는 저물고, 날은 어두워지고, 저녁 먹을 시간이 됐다. 안 먹으려고 했는데.
“갈비찜 먹을래?”
인덕션 위에 있는 냄비를 살피던 임석영이 묻는다.
“아니. 안 먹어. 빨리 하고 집에 갈 거야.”
“소갈비인데.”
소갈비 깃발이 김누리 마을을 점령하였습니다. 소갈비가 입장할 수 있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세요.
삼중으로 걸려 있던 자물쇠가 풀리고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소갈비도, 소갈비를 주는 임석영도, 아무런 의심 없이 입장하는 순간이었다.
소갈비라는 소리에 마음이 물러졌다. 눈은 임석영을 향한 채 종이를 팔랑팔랑 넘겼다.
“너 눈빛이 지금 되게 간절하다?”
임석영이 눈을 맞춘 채 묻고, 나는 소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작은 고갯짓을 오해한 듯했다.
“아니, 맞다고…. 먹자….”
임석영이 피식 웃으며 식탁을 두드렸다.
“와서 앉아.”
딱히 임석영이 요리한 것은 없었다. 있는 것들을 데우고 꺼내고 퍼 담은 것뿐이었는데,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이 풍성했다.
“잘 먹을게.”
“뭐 다 집에 있던 건데.”
임석영이 자연스레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내 안에서 폭죽이 터졌다. 오른팔 셔틀의 대장정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숟가락을 든 임석영의 오른팔을 가리켰다. 숟가락이 닿으며 챙, 하는 소리가 났다.
“나 이제 네 오른팔 아닌 거야.”
“어?”
숟가락 쥔 손을 눈짓하자 임석영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네.”
“아쉽기는.”
“좋았는데.”
얼씨구. 임석영의 얼굴을 한 번 쏘아보고는 밥을 한 숟가락 떴다.
임석영이 먼저 밥그릇을 비웠다. 턱을 괴고는 내가 먹는 모습을 빤히 보는 탓에 밥이 목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알지도 못했다.
“설거지 내가 할게.”
“됐어.”
임석영이 빈 그릇과 수저를 수거해 갔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싱크대로 향하는 임석영을 따라가 그 옆에 섰다.
“이거 냉장고에 넣을까?”
“그냥 둬.”
계속 얻어먹기만 하고, 뭔가 민망한데.
지금 설거지를 할 생각은 없는 듯 임석영이 그릇을 대충 헹궈 싱크대 한쪽에 쌓았다. 그 옆에 멀뚱히 서 있자 임석영이 수도 레버를 내리며 나를 돌아본다.
“안 자고 갈 거라며.”
“응, 그렇지.”
“지금 8시야. 가서 얼른 한 장이라도 더 정리해.”
“어. 그래. 그래야지.”
그렇다. 나는 오늘 무조건 안 자고 갈 것이고, 임석영은 내일 시간이 안 된다고 했으니까, 저 미친 범위의 숙제를 오늘 안에 끝내야 했다. 조별만 아니었어도 여기 안 남아 있는 건데.
빠르게 거실로 가서 착석했다. 지금이 8시니까 못해도 네 시간 안에는 이걸 다 끝내야 한다.
펜을 쥐고 눈에 불을 켰다.
끔벅끔벅, 느리게 눈을 움직였다. 눈꺼풀이 무거운 게 아령이라도 올려놓은 느낌이었다.
뭐지. 잠들었나.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 엎드려 있었다. 한쪽 뺨이 얼마나 눌린 건지, 머리를 드는데 종이가 뺨에 붙어 올라왔다.
“일어났냐.”
임석영이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 조용한 거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괜스레 생소하다.
“몇 시야?”
탁, 가볍게 엔터를 친 임석영이 두 손을 탁자 아래로 내리고 나를 보았다.
“새벽 2시.”
“어?”
믿을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 벽시계를 보았다. 시침의 자리가, 그러니까, 2에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오래 잤다고?
“야, 깨우지!”
“깨우지?”
임석영이 말끝을 불만스럽게 올린다. 눈썹이 꿈틀대는 것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안 났다. 뭐지. 내가 뭘 실수했나.
“내가 원래 이런 짓 안 하는데. 너무 황당해서.”
뒷말을 자른 임석영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잠금을 풀고 배경 화면을 넘기더니 음성 메모로 들어갔다.
임석영의 손가락 끝을 눈으로 좇다가 불안한 생각에 마른침을 삼켰다. 음성 메모라니, 그는 도대체 무엇을 녹음했는가.
임석영의 기다란 손가락이 최근의 메모를 툭, 가볍게 눌렀다. 녹음된 소리가 재생됐다. 녹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움직이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임석영이 잘 들으라는 듯 핸드폰을 내 쪽으로 내밀고 턱을 괬다. 재생 시간이 올라가는 액정을 보다가 슬그머니 눈을 올려 임석영을 보았다.
― 야, 그만 자고 일어나.
임석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는 없고, 그의 목소리만 연달아 나오자 긴장감이 고조됐다. 나한테 이걸 들려준다는 건, 내 목소리도 나온다는 거잖아.
― 12시 넘었어. 집에 안 가?
― …만두
― 뭐라고?
― 갈비만두.
― 뭐래. 일어나. 집에 가라고.
― ….
― 홍차.
― …홍차라고 하지 말라고.
― 뭐?
― 만두. 만두라고 해. 난 홍차 안 좋아해. 만두 좋아하지. 갈비만두. 특히 좋아해.
― 진짜 뭐래냐.
― 홍차… 아니라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거.
― 헛소리 그만하고 일어나라고. 집에 가. 시간 늦었어.
― …만두 주면 가지.
― 진짜 황당하네. 일어나라고. 집에 가. 네가 가야 나도 잘 거 아니야.
― 만두! 만두! 만두!
툭, 정지 버튼을 눌렀다. 내가. 도저히 들을 수 없어서. 얼굴이 미친 듯 뜨거워졌다.
“…미안.”
임석영이 핸드폰을 가져가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홍만두라고 부르면 되겠냐.”
“…….”
“홍차도 뒤에 연 빼고 부른 거니까, 홍만두도 뒤에 두 빼고 부르면 되겠네. 그치?”
“아니.”
“홍만.”
“…아니라고.”
할머니는 코를 골고 나는 잠꼬대를 했다. 할머니가 너 잘 때 자꾸 헛소리한다, 라고 해서 무슨 소리 지껄이나 보려고 녹음기를 켜고 잤더니 헛소리와 드르렁의 콜라보로 차마 끝까지 듣지 못했다.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다행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임석영이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데려다줄게.”
입술을 휘어 내린 채 일어선 임석영을 올려다보았다. 자고 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순순히 집에 보내주네.
“아니야. 혼자 가도 돼.”
“시간 늦었잖아.”
“나 데려다주면 넌 혼자 아니냐. 괜찮아.”
널브러진 종이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기어코 됐다고 말렸는데도 임석영이 따라나섰다. 몇 동만 지나가면 되는 건데, 뭐 그게 그렇게 걱정된다고 유난인지.
듬성듬성 가로등 빛이 쏟아지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새벽이라 그런지 정적이 날 선 유리처럼 예리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무슨 달인가, 별은 얼마나 보이려나, 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이 자연스레 사선으로 흘러내린다.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임석영을 곁눈질했다.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임석영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눈길을 느꼈는지 정면을 보고 걷던 임석영이 고개를 돌려 내려다본다.
탁, 큼지막한 손이 이마 위에 가볍게 앉았다. 임석영의 온기가 반듯한 이마로 옮겨 왔다.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게 기분이 이상하다. 물끄러미 얼굴을 내려다보던 임석영이 묻는다.
“안 무섭냐. 다른 사람 대신에 학교 다니는 거.”
“뭐….”
젖혔던 고개를 내리자 이마 위에 얹어져 있던 임석영의 손이 자연스레 이마를 쓸고 올라와 머리 위에 놓였다. 머리칼 사이를 헤집는 그의 손가락이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남자인 척하는 건데.”
“그래서 조용히 다니잖아.”
“너 안 조용해.”
그럴 리가 없다는 얼굴로 보자 임석영이 머리 위에 얹은 손을 가볍게 툭, 툭 두드렸다.
“콩, 콩, 콩, 이렇게 다녀. 전학생 지나간다, 길을 비켜라, 그러고 다니는데.”
뭔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왜 그걸 모르지, 하는 얼굴로 임석영이 시선을 거둔다.
“너 걷는 폼이 있어. 귀여워서 자꾸 보게 되는.”
귀엽다니. 내 귀를 의심하며 눈을 크게 떴다.
“콩알만 한 게 겁도 없어.”
“야…. 콩알이라고 하지 말아줄래. 큰 편이거든?”
머리를 쓱 옆으로 빼자 임석영이 팔을 뻗어 멀어지는 머리를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애칭이야.”
“뭔, 뜬금없이 애칭.”
“네가 이름도 안 알려주잖아.”
임석영의 낮은 목소리가 새벽을 울렸다.
“네가 홍차연 아니라는 거 알면서 그 이름 부르기 싫어. 다 자기 이름이 있는데.”
임석영이 뒤통수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내려앉은 새벽 공기가 찼다. 이따금씩 가볍게 부는 바람이 옷깃에 시원하게 스몄다. 임석영이 손을 거두어 갔는데도 머리가 따뜻했다. 그의 온기가 남아도는 것처럼.
옆에 선 임석영에게서 비누 향이 났다. 그냥 비누 말고, 좀 비싼 비누.
멀대같이 큰 키와 벌어진 어깨에 어울리지 않는 향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벼운 옷차림에 말간 얼굴을 한 임석영을 보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왠지 모를 따뜻함에 기분이 부푸는 것도 잠시.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임석영이 입을 열며 분위기를 깨트린다.
“콩알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불러줄까?”
“뭐?”
“홍차연 흉내 내는 콩알, 홍콩 어때.”
“장난하냐.”
“아니면 임석영의 오른팔, 영팔이.”
“…….”
“석영이 친구, 영구.”
“…….”
“아니면, 아까 그 홍만?”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자 임석영이 싫구나, 하며 입을 다물었다.
사실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었다. 임석영은 홍차연 대신 다니게 된 학교에서 만난 같은 반 아이일 뿐이고, 홍차연이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될 때면 만날 일도 없는 애였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내 비밀을 아는 아이이기도 했다. 내게 처음으로 선물을 준 친구이기도 했고, 셔틀을 시킨 놈이기도 했다. 나쁜 것도, 좋은 것도, 다 가지고 있는 놈. 어쩌면 몸에 비밀을 덕지덕지 붙인 채 생활하는 학교에서 환기구가 될지도 모른다.
“누리.”
뜬금없이 튀어나간 이름 세 글자에 임석영이 고개를 돌리고 되물었다.
“어?”
“내 이름, 김누리야.”
임석영이 말없이 눈을 맞췄다. 고작 이름만 말했을 뿐인데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간다.
왜 민망하지.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돌렸다.
“예쁘다. 이름.”
고개를 올리자 무표정한 임석영의 얼굴이 보였다. 말을 마치고 다문 입술이 얼핏 호선을 그린 것 같았다.
“둘이 있을 땐 네 이름 불러도 되지?”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나타난 캐노피를 가리켰다. 집에 다 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임석영이 고개를 올려 캐노피 위에 써진 숫자를 보았다.
“가깝네.”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섰다. 계단 하나를 밟고 올라가 뒤돌자 임석영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서 있었다.
“가.”
“갈 거야. 너 들어가는 거 보고.”
뭐, 그러면 그러든가.
뒤돌아서 공동 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자동문이 열리고 들어가기 전 짧게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다가 흘긋 돌아보았다. 계속 보고 있으면 겁나 민망한데, 라고 생각하며 돌아본 곳에 다행히도 임석영의 모습은 없었다.
“같은 남자끼리 그럴 수 있지. 있는데, 너 내 앞에서 깔 수 있어?”
아까의 임석영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얼마나 숨이 막히고 심장이 빨리 뛰었는지, 다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공포였다.
아무리 확답을 얻으려고 그랬다지만, 아까의 임석영은 너무 날이 서 있었고, 무서웠다. 잔뜩 낮아진 음성이며 그 기운이 며칠간 봐왔던 녀석 같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발을 들였다.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돌리자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보인다. 머리가 그새 길었다. 구레나룻을 만지작거리며 거울 속 얼굴을 들여다봤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버섯 같은 머리가 볼 때마다 낯설다.
“이발하러 가야겠네.”
거울에 머리를 기댔다. 어깨가 축 처지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핸드폰을 잡아 꺼냈다. 눈을 돌려 액정을 확인했다. 임석영의 이름이 떠 있다.
[ㅇㅅㅇ: 사진을 보냈습니다.]
뭐지.
엄지를 움직여 카톡을 열었다. 빨간색 십자가가 박힌 교회 사진이었다. 십자가 아래 교회 이름이 걸려 있다. 온누리 교회.
징, 핸드폰이 진동하며 임석영이 보낸 카톡이 들어왔다.
[편의점 가는 길인데 교회 이름이 누리야.]
뭐 어쩌라는 거야. 얼굴을 굳히다가 툭, 웃음이 터졌다.
[그냥 그렇다고.]
[잘 자.]
[김누리.]
엄지로 액정을 쓱쓱 문지르다가 답을 적었다.
[ㅇ]
“엇.”
보내버렸다. 응, 너도, 라고 적으려고 했는데, 이응 하나만 쓴 채 가버렸다. 겁나 성의 없어 보이는데, 라고 생각하는 찰나 임석영에게서 답장이 왔다.
[설마 그게 응은 아니겠지.]
[응일 리가 없어.]
[김누리가 쏘아 올린 작은 콩알이겠지.]
연달아 세 개나.
생각보다 긍정적인 놈이구만?
히죽, 입술이 늘어지며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